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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를 소개하기 위한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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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인 댓글 0건 조회 3,397회 작성일 06-10-08 09:14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으로 고려(高麗)의 후삼국(後三國) 통일(統一) 공로(功勞)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봉되고 대사도(大司徒)를 지내신 분이다. 염형명이 교목세가의 후예이라든가 중국 후당에서 왔다라든가 하는 말은 모두 근거없는 낭설이니 더이상 언급하지 말야야 합니다.

중시조(中始祖)는 염제신(廉悌臣)으로 자(字)는 개숙(愷叔), 호(號)는 매헌(梅軒),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시다. 고려 충렬왕 30년(1304년) 10월에 출생했고, 6살 때 부친 세충(世忠)이 돌아가시고, 11살 때 원(元)나라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성장하며 훌륭한 스승 밑에서 10년을 수학하여 학덕(學德)과 기국(器局)이 당세에 걸출하였다. 원나라 태정(泰定) 왕에게 발탁되어 숙위(宿衛)로 있던 중,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고국에 혼자 계신 어머니를 잊지 못해 왕에게 간청하여 낭중(郎中)벼슬로 돌아온 후, 고려의 다섯 왕(충숙, 충목, 충정, 공민, 우왕)을 30여 년간 섬기면서 도첨의, 좌.우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도총도감 영삼사사 곡성후 판개성겸 춘추관사 문하시중 영문하사 판문하사(都僉議, 左.右政丞, 判軍簿司事 上護軍 都摠都監 領三司事 曲城候 判開城兼 春秋館事 門下侍中 領門下事 判門下事)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이 친히 공(公)의 초상(肖像)을 그려 하사하였다.

1382년 임술(壬戌) 3월 18일 향년 79세에 졸(卒)하시니 충성수의 동덕론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忠誠守義 同德論道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曲城府院君)이고 시호는 충경(諡號 : 忠敬)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에 배위(配位)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辰韓國大夫人 安東權氏)의 묘와 한 계곡에 있고, 전국 여러 곳에서 매년 향사(享祀)하고 있다.

중시조 제신(悌臣)의 첫 배위(配位)인 완산군부인 배씨(完山郡夫人 裵氏)는 일찍 별세(別世)하여 후손이 없고, 다음 배위(配位)인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辰韓國大夫人 安東權氏)는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국보(國寶), 흥방(興邦), 정수(廷秀)로 삼형제가 모두 과거 급제하였다. 서출(庶出)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김씨 소생의 아들 혜주(惠珠)는 통제원 주지(通濟院 住持)이고, 이씨 소생의 아들 광원(廣元)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였다.  아래의 “역대인물”편 \"염제신\"란에 자세한 내용 있음.

본관(本貫)은 처음에는 시조의 세거지(世居地)인 봉성(峯城; 지금의 파주)이었는데, 중시조가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곡성(曲城)으로 개관(改貫)하였다. 그 후 봉성이 서원(瑞原)으로 개칭(改稱)되어 서원(瑞原)으로 하였고, 조선 세조 때에 서원(瑞原)이 파주(坡州)로 개칭(改稱)되어 파주(坡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염씨(廉氏)의 본관은 파주(坡州)를 포함하여 광주(廣州)·개성(開城)·순창(淳昌)·담양(潭陽) 등 70여 본(本)으로 알려졌지만 이들 모두 파주염씨의 세거지명(世居地名) 또는 조상의 유업지(遺業地)일 뿐이다. 염씨는 시조 형명(邢明)과 중흥조 제신(中與祖 悌臣)을 축으로 하는 단일본이다. 염씨들이 서기1388년 무진지화 이후 더 이상의 화(禍)를 피해 전국 각지(全國各地)로 흩어져 숨어 살던 중 새 호적을 만들 때 각기 살던 고장을 본관으로 삼아서 본관이 많아 졌다. 그러나 파주이외의 본관을 가진 집안의 가첩(家牒)이나 가승보(家乘譜)를 보면 상계(上系)에서는 충경공 제신(忠敬公 悌臣), 현(顯)등 파주염씨(坡州廉氏)의 상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염씨(廉氏)는 파주 단일본(單一本)이다.

파주염씨는 파(派)를 구분하지 않는데, 이는 타 성씨(他姓氏)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은 집안이므로 분파(分派)의 구분(區分)이나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분류(分類) 한다면 국파공파(菊坡公派), 동정공파(東亭公派), 청강공파(淸江公派)의 셋으로 나눌 수도 있다.  2000년 기획예산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염씨는 19,807가구에 63,9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염씨와 역사를 빛낸 역대 인물(歷代人物)을 살펴보면 시조 염형명(始祖 邢明)이전의 인물로는 선덕여왕 때의 염종(廉宗)과 염장(廉長) 또 신라 구산선문 가지산문(九山禪門 迦智山門)의 도의국사(道義國師)의 법을 계승한 염거(廉居, 국보 104호 前興法寺 廉居和尙塔 장본인)등과 같은 염씨들이 알려져 있으나, 이 분들이 염문의 선조로 추정할 수 있는 계대(系代)는 알지 못하고 있다.

염씨(廉氏)는 주로 고려조(高麗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배출시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는데, 특히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호(諡號)를 받은 세분이 있으니, 태사 효문공(太師 孝文公) 염신약(廉信若)과 충정공(忠靖公) 염승익(廉承益) 그리고 중시조 충경공(忠敬公) 염제신(廉悌臣)이다. 또 중시조의 아들 3형제인 국보, 흥방, 정수를 꼽을 수 있다. 맏아들 염국보(國寶)가 공민왕(恭愍王)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염흥방(興邦)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 후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고,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셋째 아들 염정수(廷秀)도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388년 무진지화(戊辰之禍) 이후 고려 멸망과 함께 장기간 침체기로 큰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때가 되어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서된 분들이 있으니, 염걸(傑)과 염언상(彦祥) 염말경(末卿) 장군과 염서(瑞) 염세경(世慶) 염경(慶) 염제립(悌立) 염홍립(弘立)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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