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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경계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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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인 댓글 0건 조회 2,166회 작성일 07-01-07 10:16
정 철
내가 술을 즐기는 이유가 네 가지 있다.
마음이 불평하여 마시는 것이 첫째이고,
흥취가 나서 마시는 것이 둘째이고,
손님을 대접하느라 마시는 것이 셋째이고,
남이 권하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넷째이다.

마음이 불평스러우면 순리대로 풀어버리면 될 것이고, 흥취가 나면 시가(詩歌)나 읊조리면 될 것이고,
손님을 접대할 때는 정성으로만 하면 될 것이고, 남이 아무리 끈덕지게 권하더라도 내 뜻이 이미 굳게
서 있으면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좋은 방도를 버리고 한 가지 옳지 못한 데 빠져들어 끝내 혼미(昏迷)하여
일생을 그르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내가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쉬면서 다섯 번이나 임금님의 소명(召命)을 받았는데,
금년 봄에는 마지 못해 병을 무릅쓰고 조정에 달려가 소(疏)를 올려 사퇴하기를 청했다.
그러니 내 뜻이 정말 산수를 즐기는 데 있다면 의당 두문불출하여 자취를 감추고 언행을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동정(動靜)이 일정하지 못하고 언어가 늘 실수를 범하는 등
온갖 사망(邪妄)한 것들이 모두 이 술에서 나오곤 한다. 술이 한창 취할 때에는
마음 내키는대로 속시원히 언행을 마구 했다가 술이 깬 뒤에는 다 잊어버리고
취했을 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남이 혹 취했을 때의 일을 얘기해 주면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믿지 않다가 나중에 참으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알고 나면
부끄러운 생각에 꼭 죽고만 싶어진다. 그러나 오늘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내일 또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여 허물과 후회가 산더미처럼 쌓이되 그 허물을 만회할 날이 없는지라,
나와 친한 사람은 나를 슬퍼해 주고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은 더럽다고 침을 뱉곤 한다.
그래서 천명(天命)을 더럽히고 인기(人紀: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모멸함으로써
명교(名敎:인륜을 밝히는 교훈)에 버림을 받은 것이 적지 않다.

이달 초하루에 가묘(家廟)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국문(國門)을 나와 강가에 이르러 강을 건너려고
할 적에 나를 전송나온 사람이 배에 가득했다. 이 때 홀연히 한양 쪽으로 머리를 돌려
나의 과거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 자신이 마치 남의 집에 뛰어들어가 도둑질한 사람이
창·칼 속에서 간신히 뛰쳐나와 백주에 사람을 만나자 몹시 놀라 당황하고 군박(窘迫)하여
몸둘 곳이 없는 꼴과 똑같아서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종일토록 전전긍긍해 마지않았다.

내가 다시 강가에 돌아왔는데, 이 때 마침 선친(先親)의 기일(忌日)을 당했다.
나는 목이 메어 눈물을 삼키면서 애통해하는 가운데 일말의 선심(善心)이 우러나서
마침내 개연히 스스로 다음과 같이 반성한다.

어찌하면 명도(明道:북송의 유학자 程顥의 호) 같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사냥하기 좋아하던 마음이
10여 년 뒤에 다시 우러나왔고, 어찌하면 담암(澹庵:남송의 명신이며 유학자인 胡銓의 호) 같은
경지에 이르러서도 그 심한 고초를 겪은 터에 여색을 그리도 대단히 사모하였던가?

참으로 잡아 간직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뜻이라,
이 마음과 이 뜻을 누가 주장하는고. 주인옹(主人翁:마음)이여, 항상 스스로 경계하여 각성할지어다.
진실로 이 말과 같이 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다시 이 강물을 보겠는가.

만력 5년(1577,선조 10) 4월 7일에 서호정사(西湖亭舍)에서 쓴다.


저자: 정철(鄭澈 : 1536-1593)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조선 중엽의 명문장가이다.
이 글은 <松江集> 권2 잡저(雜著)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제는 [戒酒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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