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 총사령 염응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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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전에는
독립투사로 또 해방후에는 백의사 총사령으로 활약하신 백의사 염응택(염동진)에 관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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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신동아 2001년 10월호에 게재된 도진순 교수의 글을 옮겨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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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도진순 < 창원대교수·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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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의 방선주 박사와 정병준 박사가 귀중한 문서인
‘김구: 암살 배경 정보(1949. 6. 29)’(이하 <문서 1>)와 ‘남한 내 우익 활동(1948. 11. 11)’(이하
<문서 2>)을 발굴함으로써, 지난 9월 초 각 신문들은 백범 암살에 대해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하나는 안두희가
CIC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백범 암살에 미국의 개입을 추정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의사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련혐의에 대해서는 필자도 이미 한두 번 분석·주장한 바 있다(‘백범 암살의 배후는 미국
CIC인가’-‘월간 말’ 1992년 5월호. ‘백범 김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성곡논총’ 27집 4권). 반면 백의사
관련사실은 아무도 주장한 바 없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된 문서에서 언급되지도 않는 명백한 오보라고
판단된다. 우선 <문서>에서 주목할 내용을 간추리면 ① 안두희가 백의사 내 혁명단이라는 특공대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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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CIC 정보원(informer) 내지 요원(agent)이었다는 것 ② 청부 암살 전문 조직인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하면 단원들은 피의 맹세를 하고 수행한다는 것 ③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 ④ 이러한
염동진에 의하면 1948년 말 당시 김구를 추종하는 일단의 우익 장교들이 반이승만정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② 부분에서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했다”는 구절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문서 1>은 주정보원
염동진을 설명하면서 백의사가 청부 암살을 즐기는 테러단체이고, 암살을 명령받으면 피의 맹세를 한다는 단원의 규율을 참고로 기술한 것뿐이다. 이
가운데 안두희와 관련되는 부분의 원문은 “He(안두희: 역자) has also taken the blood oath to assassinate,
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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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오보 이것은 안두희가 실제 염동진으로부터 암살지령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만약 암살지령을 받았다면(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 그도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가정적 조건문에서도 염동진이 ‘김구’ 암살을 지령했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구절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문서가 안두희를 비롯해 백범을 암살한 인물이나 조직을 파헤치는 것이 기본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서를 통독해 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듯이, 문서 전반의 흐름에서 염동진-백의사와 김구의 관련은 적대적이라기보다 상호의존적이다. 먼저 <문서 1> 모두에 “김구의 밀고로 염동진이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구절은 염동진이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며, 또 사실과 다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의 밀고로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었다. 다음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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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당시 염동진은 스스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부를 원하고 있는 일종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스스로 김구의 개인적 친구라고 말한다” “염동진의 추종자(백의사) 대부분은 김구씨의 추종자”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으며, 염씨는 한국군 내부의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첨부된 편지(<문서
2>)는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씨와 염동진씨가 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등에 이르면 당시 염동진은 백범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명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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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계의 연원은 별도의 검토를 요하지만, 적어도 1946년 찬탁·반탁과 좌우대립의 정국에서 백의사가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대북 테러공작을 전개한 사실은 꽤 유명하다(도진순, 1997,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76~80쪽). 1946년 3월1일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백의사 요원들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83년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기리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 제작하였고, 1984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면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하여 노비첸코를 만났다. 올해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러시아를 방문할 때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을 만날 것인지가 이슈가 된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이상의 언급을 정리하면 위의 두 문서에 보고된 범위 내에서 염동진은 백범에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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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쿠데타 주장이 문서의
핵심 그렇다면 문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1948년 11월 당시 김구가 반이승만 군부쿠데타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같이 연루되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염동진을 통해서, 미군 정보장교가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문서는 김구 암살자인 안두희의 배후나 지령자를 밝혀낼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1949년 이후 백범 암살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문서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김구가 암살된 이유를 여순사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쿠데타를 중심으로 찾으려고 하는 미국의 시각이 깊이 깔려 있다. 이것이 문서의 이름이 ‘김구 암살의 배경’이 되는 이유이며, 별도로 1948년 11월 초의 쿠데타 관련 <문서 2>를 첨부한 이유다.
여기서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캐내다가 CIC 요원이 난처해지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는 <문서 2>에서 정보제공자 염동진과 정보활용자 CIC의 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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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관계를
보여준다. 1948년 말 군부쿠데타 문제는 별도의 사실적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안두희, 나아가 이승만 정부와 미국도 당시 김구가 군부쿠데타와 관련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암살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당시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된 일부 극우분자”라는 표현으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국무총리 이범석은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과 연락한 극좌와 극우의 공모”라고 밝혔다.
또한 CIC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은 위의 문서 외에도 “G-2 Periodic Report” no. 164(1948. 11. 5), “G-2 Highlight” no. 332(1948. 11. 3),
“Joint Weeka” (1948. 11. 6) 등에서 김구의 쿠데타와 공산주의자의 공격이 결합되는 것을 지극히 우려하였다(자세한 것은
도진순, 1997, 293쪽, 321-326쪽). 그간 이러한 보고서의 정보원(情報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문서로 볼 때 염동진 등이
중요한 정보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순사건과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대처는 백범 암살사건에서도 분수령의 위치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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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진영과 이승만 진영의 대립은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1948년 4월 백범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으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화의 길을 걸었고, 1948년 말 여순사건 직후부터 1949년 초에 걸쳐 그 대립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비화되었다. 이 시기 정부조직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 이승만대통령의 친위조직이 강화되었으며,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조직적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즉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이승만 친정체제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백범 암살을 위한 구조가 정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가 1949년 5월 이후 국회프락치사건과 조국전선 결성 문제가 부상하면서 시기를 못박아가면서 백범 암살이 촉구·집행되던 시기다. 이렇게 보면 “안두희가 백의사의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은 김구의 쿠데타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염동진-백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 짧게 언급한 부수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서 작성자인 실리(George E. Cilley)의 의도와는 별개로,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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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진실의
문 안두희는 이미 백범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해 몇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1984년 ‘월간조선’의 오효진과 인터뷰,
1992년 4월13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된 권중희에 의한 자백, 1995년 김석용의 권유로 녹취한 테이프 121개에 담긴 그의 ‘마지막
증언’ 등이 그것이다.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안두희는 문화방송의 박경재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의 내용은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부인하였다. 안두희의 말대로 위의 내용 중에는 권중희의 강압으로 잘못 포장된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OSS다.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주 그 무식쟁이(권중희)가 OSS라는 말은 어떻게 외워 가지고서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자기 유식을 과시한다고 OSS를 찾는데…OSS가 무슨 뭐 미국 CIA말고 뭐 또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몰라”라고 사연을 설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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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골칫거리
백범 사실 OSS는 1945년 10월 초 해체되었고, 광복 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CIC가 대표적이었다. 때문에
OSS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OSS가 착오라고 해서 1992년 증언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문서 1>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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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안두희는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
서청 등 청년단체 요원들과 경찰·군·정보원의 연결을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경찰과 군부는 ‘비합법적으로 빨갱이를 때리는 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은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특히 장택상은 그의 환갑연에 안두희를 초청하였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정보과장 최운하 등 정보 전문가들은 안두희와 정보를 자주 교환하였다. 나아가 안두희는 동향인 육군 중령
김일환의 주선으로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 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의 김창룡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숙군의 마왕’으로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이런 안두희가, 그의 서청(西靑)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CIC 요원이며, 그의 백의사 보스인 총사령 염동진이 그러한 것처럼 CIC에
적극 협조하였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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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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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언에 따르면 안두희의 접촉대상인 미군은 두가지 차원이었다. 하나는 미24군의 중령급
인물과 간혹 접촉하였는데, 문서 작성자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이 레벨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실무선의
중위급 인물 마이클이며 이 사람에게 영어를 배울 정도로 자주 접촉하여 정보를 교환하였다. 필자로서는 CIC 정보장교 명단에서 마이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보장교들은 원래 본이름과 계급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예컨대 맥아더 사령부의 일개
사병이던 노만 존슨은 한국전쟁기에 여러 이름과 20개 정도의 계급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노만 존슨, 1994, ‘한국작전’,
삼진기획). 따라서 구체적인 안두희의 증언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마이클 중위는 서북청년단에 자주 찾아와서 안두희가 모르는 ‘빨갱이 계통
정보’를 주었으며, 그것은 한국 경찰과 특무대의 정보와 일치하는 ‘고급 수준의 것’이었다.
마이클이 준 소위 정보 소스 같은 걸
일일이 뭐 인천에 김일한이 같은 놈한테 전화 걸어서 알아보고, 또 특무대 본부의 장대위를 불러서 알아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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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지금은 정정당당히 대한민국
경찰관 형사가 돼 있는 노덕술이 같은 거, 혹은 그 외에 몇몇 사람들을 일부러 만나서 지나가는 척하고서 얘기를 슬슬 물어보게 되면은, 이거 대개
앞뒤 꼬리가 맞는 얘기예요. 맞는 얘기니까 자연히 나도 이 사람을 중시하게 되고, 이 사람의 얘기를 내가 중요 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되지요.(‘마지막 증언’ 185) 이 정보꾼 마이클은 백범과 한독당의 동향, 특히 ‘혁신보(革新報)’의 양근환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이클의 정보와 평가는 노덕술이 있는 한국경찰, 김창룡의 특무대 정보는 물론, 백범 암살을 기획·주도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거 물어보게 되면 김지웅이도 어떻게 알아보는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특히 양근환이는 주변 사건을 갔다가
아주 정확하게 마이켈 중위하고 이제 맥이 딱 맞아 들어가요.…그러니 점점 김지웅이를 중요한 정보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됐습니다.(‘마지막
증언’ 185) 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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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미국측 공식문서에서는
백범 암살 당시 미국의 개입 여부를 엿볼 수는 없는가? 아마도 정보문건 계통에서는 앞으로 발굴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1949년 2월
“백범이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 위해 잘못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는 대단히 비판적인 보고서 두 건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G-2
Perodic Report’ no. 1052(1949. 2. 1), no. 1055(1949. 2. 4)
한편 공간된 ‘미
외교문서(FRUS)’에서는 그 성격상 암살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문건은 찾을 수 없다. ‘미 외교문서’에서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주한 미대사
무쵸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은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수록된 것은 1949년 6월27일 오후 5시발의 3급비밀
지급(Confidencial Priority) ‘전문 788호’가 유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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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미국정보장교와 정기적
회합 외교문서의 공간은 적절한 세탁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예상한 바와 같이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은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암살 사건을 한독당 내 노선 대립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김구가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면서 장례식 이후의 정국의 추이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 전문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 발신 일시, “6월27일 오후 5시”다.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분석해보면, 암살 이튿날인 27일 그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사령부에서 김창룡의 특무대로 이송되어 “호텔 같은 감옥”에서 취조대신 대대적인 의료진단 서비스를 받았다. 그 후로도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들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암살사건이 일어난 지 근 2주가 되는 7월 8일부터 ‘우호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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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무쵸 미대사의
보고는 안두희에 대한 취조와 전혀 관계없이 마련된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은 암살사건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미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이승만 정권과
보조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정보 활동을 기반으로 해서 미군 철수의 혼란기에 일어난 백범 암살사건을 능란하게 처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백범 암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부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제는 개입의 범위와 강도일 것이다. 현지
CIC 정보장교 차원이었는지, 대사관까지 개입된 수준이었는지, 본국 정부 정책의 일부였는지가 불분명할 뿐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한 책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대외공작사의 암살사건에서 김구 암살이 첫 사례로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 1>에서 언급한 백의사가 백범 암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그럼 누가 백범 암살을 지시한 것인가. 이를
위해 다시 그간의 연구를 존중하면서 광복 직후부터 암살사건까지 안두희의 활동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두희는 1945년
12월 ‘신의주 학생사건’의 여파로 자신이 수사대상에 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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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집안 재산이 몰수되자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월남을 결심했다. 1947년 봄 신의주에서 사리원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항으로 월남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자 실세인 김성주와의 친분으로 얼마 후 서청의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극단적인
반공·반북주의자인 안두희가 백의사 요원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두희나 서북청년단·백의사 요원들은
한편으로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 깊이 연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군 정보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안두희가 백범암살의 구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여순사건 이후 1948년 후반부터다. 동향인 김일환의 소개로 안두희가 김창룡을 만난 그날 저녁이다. 백범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한 김지웅(金志雄)과 홍종만(洪鍾萬)은 목로주점에서 안두희를 만나 한독당 가입을 권유하는 단계부터 안두희는 거대한 암살 구조에
편입되었다. 결국 1949년 1월 말 ~ 2월 초 홍종만은 안두희를 김학규에게 소개하였고, 안두희는 입당 절차를 밟게 되어 4월14일자의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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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단계에서는 안두희의 직속 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날짜를 박아서
채근하였다. 6월23일 안두희가 지시받은 경교장 습격사건을 시행하지 않자, 6월25일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다음과 같은 최종 명령을
하달하였다.
무조건 내일 들어가서, 그전과 같이 일요일이니까, 그저 안중위가 놀러왔다는 것처럼 얘기허구, 가서 어저께 왜 공주 안
가셨냐는 거 물어보구, 또 김구 선생 있으면 올라가서 얘기하다가 그런 계제가 되구 타임(time)이 되어 해야 겠으면 해라.…너밖에 할 사람
없다. 우리가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안 했지만은 이거 할라구 약속했던 것 아니냐?(‘마지막 증언’ 193) 장은산은 당시 알리바이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특별 테러단체인 남의사(藍衣社)의 사칙(社則)과
행동관례(行動慣例)를 언급하면서, ‘만약 일이 실패하면 너도 갈(죽을) 수 있다’고 협박하였다고 한다. 남의사의 사칙과 관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백의사 단원인 안두희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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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요약하면 암살 공모자는 김지웅·홍종만이었으며, 구체적 지령자는
장은산 포병사령관이었다. 그 배후로는 안두희가 후송된 특무대의 김창룡, 특무대 이송을 지시한 채병덕 참모총장, 안두희의 재판을 담당한 원용덕,
이들의 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 등이 그간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인데, 이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자세하고 흥미 있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일요신문’ 1996. 11. 3). 이에 따르면 ① 안두희는 1949년 6월20일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며, ② 대통령은 안두희에게 악수를 청하며 ‘으음, 자네가 안소위인가. 신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라고 말하고 백범이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다만 집무실을 나올 때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듣게나’
했다는 것이다. ③ 퇴근 무렵 장은산 사령관에게 경무대 방문을 보고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하더라는 것이다. 즉
안두희가 잘 움직이지 않자 신성모·채병덕·장은산 등이 경무대 면담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안두희는 “내게 뒤가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최종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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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과의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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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이외 이승만 관련에 대한 증언으로는 “김익진 검찰총장이 영감님(이승만 대통령)이 노망이 들어서 한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는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증언, 1960년 4월 민주화운동 직후 장은산의 고백을 폭로한 고정훈의 증언, 사건 후 경무대에 보고하러 가니 ‘이박사가
이미 알고 있더라’던 당시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의 증언 등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당시
우익 내 정치적 대립구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위의 문서는 여순사건 이후 백범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구조와 지령 구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나 증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백범
암살 당시는 정부 수립 이후 근 1년이 되어, 백의사·서청 등 민간단체 요원들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시기이고 보면, 역시 군과 경찰에서
안두희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민간단체보다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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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1년 10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배진영 기장의 글을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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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金日成 암삼 기도 白衣社 행동대원 李聖烈씨
『安斗熙는 白衣社 요원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불거져 나온 安斗熙의 白衣社 및 美CIC요원 說 李씨는 『金九 선생을 추종한 白衣社가
선생을 암살할 이유가 없었다』면서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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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보고서가 일으킨 파문 / 「金九의 테러조직」 소리 들었던 白衣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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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李成茂·이성무)는
지난 9월4일 기자회견을 열고 『白凡 金九 시해범 安斗熙가 美 방첩대(CIC) 요원이자, 右翼 단체인 「白衣社(백의사)」 특공대원이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美 제1군 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 소령이 白凡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29일 작성한 「金九 암살관련 배경정보」라는 문서가
공개되자, 언론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李成茂 국사편찬위원장은 『현재로선 미국이나 白衣社가 白凡 암살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일부 언론들은 미국이 金九 암살의 배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7일 한 노인이 「月刊朝鮮社」로
찾아왔다. 노인의 이름은 李聖烈(이성렬). 그는 1946년 3월1일 평양驛前에서 있었던 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당시 白衣社 행동대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그후 美 CIC에 근무했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마치 白衣社나 美 CIC가 白凡 선생 암살 배후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누군가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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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의 테러조직」 소리 들었던 白衣社 李聖烈씨는 1926년 평남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李根春(이근춘)은 日帝末 白凡 金九 선생의 조카 金興斗(김흥두)를 집에 숨겨주는
등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었다고 한다. 1945년 7월 어느 날 친구 金元三(김원삼)이 李聖烈씨를 찾아왔다. 金씨는 『서울에서 呂運亨(여운형)
선생의 密使(밀사)가 왔다. 일본이 곧 망한다고 하면서 서울에 와서 건국운동을 하자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李聖烈씨는
金元三·康赫(강혁) 등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몇 달간 李聖烈은 건국준비위원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광복 후의
혼란을 목격했다. 한번은 呂運亨의 수행비서였던 金容基(김용기·前 가나안 농군학교장)씨가 그에게 『宋鎭禹(송진우)·張德秀(장덕수)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金씨는 그들이 왜 민족반역자인지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민주당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다.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呂運亨을 존경하고 있던 李聖烈은 金容基의 얘기를 들으면서 呂運亨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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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종로에서 韓民黨이
주최한 연합군 환영 시민행진을 左翼이 폭력으로 막는 일이 발생했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左右翼 갈등을 의아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李聖烈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울의 상황을 부친께 보고하자 부친은 『염응택에게 가 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그와 白衣社 司令(사령;단장)
廉東震(염동진·본명 염응택)과의 첫 만남이었다. 白衣社는 낙양군관학교 출신인 廉東震이 1942년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독립운동단체
「大同團(대동단)」이 母體. 白衣社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의 토착 공산주의자 玄준혁 암살사건으로 일대 검거 선풍이 불어 조직원들이
越南한 後부터라고 한다. 이번에 공개된 실리 소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廉東震은 그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金九의 배신으로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겨졌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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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 의해 고문을 받다가 눈이 멀게 되었다고 한다. 李聖烈씨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광복 후 左翼들이 「李承晩(이승만)의 테러조직은 三友會(삼우회), 金九의 테러조직은 白衣社」라고 할 정도로 白衣社는 白凡선생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白凡 선생이 廉 司令을 중국 공산당 정보부에 넘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내가 1945년 9월 廉 司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는 했지만 盲人(맹인)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38선을 넘어올 때 같이 越南하던 白寬玉(백관옥)에게
廉司令이 「눈이 안 보인다」는 얘기를 하더랍니다. 서울에 와서는 아주 盲人 행세를 했지만, 모두 半信半疑(반신반의)했어요. 무슨 다른 생각이
있어 廉 司令이 맹인 행세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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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衣社와 중앙정치공작대
실리
보고서에는 廉東震의 白衣社 조직은 軍·경찰·공무원·정당·사회단체·청년단체 등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李聖烈씨에 의하면
白衣社 조직이 그처럼 각계 각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廉東震이 李範奭(이범석)·申翼熙(신익희)·李靑天(이청천) 등과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를 이끌었던 申翼熙와 가까이 지냈는데, 조직운영에 있어서는
「白衣社=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앙정치공작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李聖烈씨는 白衣社가
파시스트적·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이라는 실리보고서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白衣社가 親 金九노선의 민족주의 단체였지만 확고한 이념적 바탕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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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적이니, 國粹主義的이니 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미국측의 오해입니다』
1946년 2월 李聖烈은 廉東震 司令의 부름을 받았다. 副司令
朴徑九(박경구)도 함께 있었다. 廉 司令은 朴徑九를 통해 권총을 한 자루 내주면서 『바로 평양으로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직전 白衣社와 정치공작대 사이에서 연결 고리 역할을 하던 정치공작대 조직부장 曺仲瑞(조중서)와 정치공작대원 金濟哲(김제철·당시
39세)·金亨集(김형집·당시 19세)·崔基成(최기성·당시 20세) 등이 金日成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먼저 당시 서울 가회동에 머무르고
있던 延安派(연안파) 공산주의자인 독립동맹 부위원장 韓彬(한빈)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北으로 떠났다. 李聖烈씨에게 떨어진 임무는 일종의
督察(독찰) 임무였다. 北으로 간 일행이 정말 金日成을 암살하려 하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으면 배신자로 간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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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成을 암살하라
평양에서 金濟哲 일행과 합류한 李聖烈은 金日成을 암살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확인했다. 1946년 3월1일 평양驛前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행사장에는 「李承晩·金九 타도」, 「민족반역자 曺晩植(조만식) 타도」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金亨集은 수류탄, 李聖烈과 崔基成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행사장에 참석했다. 金日成이 연설을 시작하는 순간 李聖烈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면, 金亨集이 수류탄을 투척하고, 수류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崔基成이 권총으로 金日成을 쏘기로 했다. 金濟哲은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여긴 知人이 따라붙어 미행을 하는 바람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거사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金亨集이 안전핀을 제대로 뽑지 않은 채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연단에
떨어진 수류탄은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경비 중이던 소련군 야코프 노비첸코 준위가 수류탄을 집어 멀리 던져버리려는 순간 수류탄이 터졌다.
노비첸코는 오른팔이 잘려나가는 등 몸 다섯 군데에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訪蘇한 金日成과
재회했다. 그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金日成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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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지난 8월 러시아를 방문한 金正日은 귀국길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金亨集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아지트로 돌아온 나머지 白衣社 社員들은 다른 공산당 요인들의 목숨을 노렸다. 金日成 암살작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金濟哲(그는 이때부터 金正義로 改名했다)과 새로 가담한 李希斗(이희두)가 거사에 참여했다. 이들은 3월5일과 7일에는 崔庸健(최용건)의 집을,
같은 달 9일에는 金策(김책)의 집을 습격했지만, 그들이 金日成 암살미수 사건 이후 집을 비우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李聖烈 일행은
3월13일 자정 무렵 북조선 임시위원회 서기장 康良煜(강양욱·前북한 국가부주석)의 집을 습격했다. 이날 거사에는 李聖烈의 중학 동창인 최의호도
가담했다.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권총을 난사, 康良煜의 가족들을 몰살시켰지만, 康良煜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李聖烈 등은 추적해 온
보안대원들과 교전 중 崔基成이 사망했고, 李希斗는 얼굴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최의호는 부근에 사는 친지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다른
아지트에 은신하고 있던 金濟哲과 또 다른 동지 조재국도 며칠 후 체포되었다. 李聖烈만이 간신히 체포를 모면, 3月末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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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斗熙는 白衣社 社員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온 李聖烈은 美軍 CIC에서 조사관(Investigator)-그 후에는 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白衣社에서 美軍 CIC로 파견나간 것』이라고 표현했다. 후일 張勉(장면) 총리의 정치고문을 지낸 도널드 위태커가 이 무렵 CIC
북한課에 있었다. 1947년 7월 呂運亨이 암살되었다. 사건 직후 白衣社 內에서는 「집행부장」으로 알려졌던 李聖烈이 呂運亨을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 범인은 한지근이라는 젊은이였다. 李聖烈과는 CIC에 출입하던 政治 浪人 신동운을 통해 아는 사이였다. 실리 보고서는
呂運亨 암살에 白衣社가 개입했으리라고 시사하고 있지만, 李씨는 이를 부인했다. 李聖烈이 CIC에 근무하던 어느 날, 金聖柱(김성주)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 지나가는 한 젊은이를 가리키며 『쟤는 말(영어)도 못하면서 뭐하러 여길 드나들어』라고 말했다. 李聖烈은 金興斗와의 인연도 있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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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凡선생의 거처인 京橋莊(경교장)에도 곧잘 드나들었다. 白凡선생이 자서전 「白凡逸志(백범일지)」에
西山대사의 禪詩(선시)를 써서 준 일도 있었다 (이 책은 6·25 전쟁 때 분실했다고 한다). 京橋莊에서 그는 金聖柱가 말하던 그 젊은이를
봤다. 白凡선생의 비서들은 『저 사람 白凡선생님과 가까운 척하면서 자꾸 여길 드나든다. 뭘 하려는 건지…』라고 말했다. 1949년 6월26일
白凡 암살사건이 나고 암살범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을 때, 李聖烈은 그 젊은이가 安斗熙(안두희)라는 것을 알았다. 李聖烈씨는 『내가 아는 한 安斗熙는 白衣社 社員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자신은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조직원들을 거의 다 알고 있었지만
安斗熙는 알지 못했으며, 白衣社의 親 金九노선으로 보아 白衣社가 金九를 암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리보고서를 접한 이신철 역사문제
선임연구원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白凡의 사상적 노선 변화가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容共性으로 보일 빌미를 마련해 주었으며, 이것이 곧 암살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9월4일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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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斗熙의 범행은 小영웅주의의 발로』 그 가능성을 강하게 부정하는 李聖烈씨에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白衣社의 입장을 물어보았다. 그것은 곧 白凡에 대한 白衣社의 평가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社員들은 「우선 나라는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廉 司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구요.
그런 廉 司令을 보면서 「廉 司令도 이젠 역부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廉 司令과 李承晩 박사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李박사보다는 金九선생과 더욱 가까웠을 겁니다』 ―白凡선생의 單政 수립 반대·남북협상 노선이 白衣社 社員들에게
容共的인 것으로 보였고, 그 때문에 암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절대 아닙니다. 白衣社 社員들은 대개 單政 수립에 찬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金九선생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요. 우리들로서는
白凡선생을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李聖烈씨는 安斗熙가 자기가 모르는 현장요원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美
CIC 요원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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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美 CIC가 白凡암살의 배후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라는 부대 이름에서도 보듯 부대 성격상 美CIC는 암살이나 암살 사주와 같은 적극 공작을 벌이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 李씨의 주장이었다. 李씨는 安斗熙가 白凡선생을 암살한 것은 특정 집단의 치밀한 계획과 使嗾(사주)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越南 후 기댈 데 없어 마음속에 울분을 품고 있던 젊은이의 小영웅주의의 발로로 보았다. 『내가 처음 越南해 왔을 때 金容基씨가 「宋鎭禹·張德秀는 민족반역자」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걸핏하면 「○○○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얘기가 떠돌곤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熱血 청년들이 일을 저지르곤 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어요. 安斗熙가
白凡선생을 암살한 것도 그런 의식의 발로일 겁니다』李씨는 실리보고서에 대한 보도를 접하는 순간 『의도적으로 이 땅의 右翼과 미국을 흠집내려는
세력이 장난을 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白衣社와 美 CIC에서 근무했고, 먼 발치에서 安斗熙를 지켜보았던 자기로서는
그런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月刊朝鮮社」를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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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후 反혁명죄로 투옥되기도 白衣社는
1948년을 전후하여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고 공권력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白衣社의 활동 공간은 좁아졌다.
조직원들은 軍이나 경찰에 투신하거나, 각자 밥벌이를 찾아 흩어졌고, 白衣社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廉東震 司令은 6·25 전쟁이 일어난 후
공산군에게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李聖烈씨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美 7항만사령부 정보치안국·美 7사단 CIC·8240부대 등에서
근무하면서 전쟁을 치뤘다.
白衣社와 申翼熙의 중앙정치공작대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柳珍山(유진산)이 白衣社 총무를 지낸 인연으로 민주당系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그는 1962년 민주당 反혁명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獄苦(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옛 8240부대 출신자들을 동원, 朴正熙 장군을 암살할 생각으로
동조자들을 물색하다가 가까이 지내던 민주당系 정치인들과 함께 反혁명음모죄로 엮여 들어간 것. 이후 特赦(특사)를 받아 풀려났지만, 정보기관의
要視察(요시찰) 인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1969년에는 「3選 개헌반대 汎국민투쟁위원회」 최고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90년 金日成 암살시도 등 反共투쟁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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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英哲 국사편찬위원회
編史부장과의 一問一答
『실리 보고서 공개에 政治的 의도는 없다』 기자는 9월11일 저녁 국사편찬위원회 姜英哲(강영철·57) 編史部長(편사부장)과 실리 보고서에
관해 전화통화를 나누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언론에서는 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리 보고서 관련 내용을 공개한 것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진행 중인 「海外史料(해외사료) 移轉(이전) 사업」의 성과를
알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언론보도가 우리의 본의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우리도
당혹스럽다』 姜부장은 『「海外史料 이전사업」은 금년에 10억 원, 내년에 1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국사편찬위원회 추진 단위 사업
가운데 가장 큰 사업』이라고 덧붙였다. 姜부장은 『그동안 海外 史料의 발굴, 이전사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끌지 못해왔다. 그래서
이번에 발굴한 史料 가운데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놀랍고 특이한 내용들을 공개하여 이 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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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실리 보고서 공개로 인해 국민들은 白凡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마치 右翼 세력과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한두 가지 文件을 가지고 해방 정국의 의혹들이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나도 우리 언론이 이렇게까지
얄팍하고 선정적인 줄은 몰랐다』
─이 시점에 右翼과 미국에 흠집을 내는 史料를 공개한 데에는 어떤 정치적 黑幕(흑막)이 있는 것 아니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8·15 訪北團 파문을 잠재우려고 실리 보고서를 공개한 것 아니냐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학자적 양심을
걸고 말하는데 그건 절대로 아니다. 발표 날짜를 9월3일로 잡은 것은 방북단 파문 훨씬 이전이었다. 이번 발표에 정치적 의도 같은 것은
없다』姜부장은 『反共단체 등에서 항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나도 대한민국이라는 집의 기본틀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이 이렇게
돼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리 보고서 관련 보도가 국사편찬위원회의 본의와는 다르게 흘렀다면, 적극적으로 해명 기자회견을 하든가 해서 국민들의 오해를 풀어줘야 하지
않나?
『지금 보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인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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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지만, 그런 계획은 없다』姜부장과 통화하기 前인 9월10일 기자와 통화한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운 연구사도 姜부장과 거의 같은 얘기를 했다. 金연구사는 『이번에 발굴한 실리 보고서 등만 가지고 어떤 역사적 사건의 실체가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언론에서는 白凡선생 암살 사건의 배후에 白衣社와 미국이 개입되어 있는 것으로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南勞黨 출신 북한 외무성 초대 副相 李康國(이강국)과 詩人 林和(임화)가 美 CIC의 첩자였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리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것은 安斗熙가 白衣社 및 美CIC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 - 그것도 1949년 6월이 아니라 1948년 12월의
시점에서 - 과 관련되는 부분 뿐이다. 나머지 내용들은 각 언론사에서 자체적으로 취재해서 쓴 것이다』李成茂(이성무·64) 국사편찬위원장과는 수차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李위원장의 국정감사 출석·회의 주재·訪北 등으로 통화하지 못했다. 9월11일 오후 기자와 통화한 이영춘
국사편찬위원장 비서관은 『「月刊朝鮮」기자로부터 전화인터뷰 요청이 있었다는 사실과, 김광운 연구사와 통화한 내용을 위원장께 보고드렸다』면서
『위원장께서는 「김광운 연구사의 얘기를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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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구 암살 관련 배경정보’
전문번역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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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미군방첩대(CIC) 조지 E.실리 소령이 작성한
‘김구 암살 관련 배경정보’
전문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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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방첩대(CIC) 일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업무상 다수의 한국인과 접촉하였다. 이들 가운데 흥미롭고도
가장 악명 높은(the most malignant) 인물은 흔히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염동진(Lyum Tong
Chin)이다. 이 사람은 일제시기 강력한 적이었던 한국인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넘겨졌으며, 중국공산당 정보부의 고문으로 눈이 멀었다. 그
배신자가 오늘날 가장 유력한 한국 정치인 중의 하나이며, 가장 사랑받는 애국자의 한 사람인 김구다. 일단의 장교 파벌을 주로 조종하는 그의
정당(한독당: 번역자)이 저지른 무책임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염씨는 규모나 구성을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인 비밀조직의 대표다. 그는 자신의 견해와 추종자의 구성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외부인들은 그를
청부살인자, 국수주의적 광신도들로 구성된 방대한 지하조직의 대장(총사령: 역자)으로 알고 있다. 염씨는 본인(실리)을 신뢰해서 이미
보고서로 제출한 바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아주 민감하거나 아직 검증되지 않아서 보고서에 기재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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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씨는 파시스트 성향의 반공 지하조직을 설립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김구씨의 추종자다. 이 지하조직은 남한·북한·만주와 중국
전역에 뻗어 있다. 작금의 사태에 비추어 어느 정도로 그의 공작이 실행되고 어떤 통신망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지하조직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조직에는 군인, 해안경비대, 세관원, 경찰관, 소방관, 정부 관리,
정치인, 상인, 산업가, 밀수꾼, 농부, 보통 시민 등 한국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조직의 대다수는 수많은 좌우익 청년단체의 회원이기도
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직 내부에는 “혁명단(Revolu-tionary Group)”이라는 특공대(Special
Attack Corps)가 있다. 특공대는 5개의 소조로, 각 소조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 한국과 한국 민족주의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를
암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소조의 구성원들은 애국자로 죽겠다는 피의 맹세를 한다. 안두희(Ahn Tok Hi)는 이 비밀조직(백의사: 역자)의
회원이자 혁명단 제1소조의 구성원이다. 나는 그가 한국 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이었으며, 후에는 요원(agent)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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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동진으로부터 암살을 명령받았다면, 안두희도 역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다(He has also taken the
blood oath to assassinate, 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Dong Chin).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그 어떤 보고서도 없지만, 저명한 한국 정치인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대략 20개월간 염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다. 나는 그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때로 나는 그가 미국 요원들과 인터뷰할 때 동석한 바 있는데, 그때마다 그는 통역을
활용했다. 그는 나 이외 어느 누구에게도 영어로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그와 가까운 여러 사람들의 관찰로도 그러하다.
그가 지휘하는 조직은 백의사(“White Clothes Party” 또는 “White Clothes Society”)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묘한 모양의 흰옷을 입기 때문에 백의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의사라는 조직 이름은 또한 한국의 모든 계층에 이
조직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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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들은 부여받은 각각의 활동과 임무에 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편지는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김구씨와 염동진씨가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염씨는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당했으나, 이런 사실이 공표되거나 경찰에 보고된 적은 없다. 죽기로 맹세한 60명의
청년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그를 경호하고 있다.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씨는 한국군 내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이 우익 반대파는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어 있다. 한번은 내가 직접 제출되는 정보의 보안장치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점검해본 적이 있다. 그 결과 중요한 정보가 있는 한 비밀보고서의 내용이 유포되어 김구씨에게 전달된 것을
발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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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러한 유출을 우려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문서가 아닌
구두로 보고되었다. 김구씨의 암살과 관련하여 아래의 보고 사본을 제출한다.
<문서 2>
1. “1948년 11월9일자 보고, 제목: ‘남한 내 좌익(우익의
오류라고 판단됨: 역자)의 활동과 추정되는 계획’ 제3단락 참조할 것. 이하의 정보는 서울의 영향력 있는 민간인들의 지도·지원으로 한국군
장교들이 계획중인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 한 요원이 어려움을 당할 경우,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제출되었다. 쿠데타 집단들은 좌익 성향이 아니고, 파시스트 유형의 배경을 지니고 있다.
2. 광주지구사무소의 한
요원은 CIC 작전 중 서울의 한 민간인과 친해졌으며, 광주지구 사무소로 전근 갈 때 그 민간인이 광주 주둔 국군 제5여단 제4연대 연대장에게
개인적인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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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민간인은 스스로 김구의 친구라고 말하지만, 일부 사람들 사이에는
중국에서 그의 독립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만큼 되진 않지만, 김구에 대한 그의 증오도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
민간인은 이승만 수반의 현정부보다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다. CIC 요원은 현재 국군 제4연대
연대장을 매개로 하여 그 민간인으로부터 서신을 받고 있다.
4.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표명되었으며, 그럴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한 정부가 수립되면 북한군도 내부의 친소장교를 일소하고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 요원은 많은 장교들과 경찰 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비록 현재는 배후인 미국의 능력,
힘과 위신 때문에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가 결코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을 재건하여 국가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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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기서 언급하는 그 민간인은 한국 주재 CIC의 일부 인사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가장 명백하고 독특한 특징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토론하길 싫어하며,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로는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이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민간인은 과거에 CIC에 잘
복무하였으며, 군사과학과 전술에 조예가 깊다.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숙독하고 연구했다. 그는 중국 중경의 군사대학을 졸업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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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그곳에서 현재 조직(백의사)의 핵심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정치조직, 육군 및 해군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조직원을 침투시켰고 모집하였다. 이들
요원의 다수는 1947~48년 동안 CIC 임무를 추진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이 보고가 한국인 요원의 손에 들어갈 위험성 때문에
과거에는 그 민간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민간인의 이름은 백의사의 대장(총사령: 역자) 염동진이다.
주한미군사령부에는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외국인들이 통역관, 번역관, 고문관으로 고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정보는 기록물로 작성되지 않았으며, 미군 관련 요원들이
1948년 12월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CIC의) 전체 조직망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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