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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는 인간사회(人間社會)에 있어서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이다. 사람으로서 효(孝)를 행하지 못하고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이기 어려우므로 충신(忠臣)은 구어효자지간(求於孝子之門)이라 하여, 예로부터 가정(家庭) 또는 국가적(國家的)으로 효(孝)를 강조(强調)하여
왔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되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어른들을 공경하라 하셨고, 유자(有子)도 효제(孝弟)는 기위인지본(其爲仁之本)이라 하여 효(孝)의 중요성(重要性)을
역설(力說)하셨다. 오랜 역사(歷史)를 통(通)하여 간혹 탁연(卓然)한 효행(孝行)이 있으면, 이를 널리 포양(褒揚)하여 세인(世人)들로 하여금 이를 본받게 하고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덕목(德目)으로 삼아온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러함에도 근래 물질문명(近來 物質文明)의 급진적 추세(急進的 趨勢)와 무분별한 외래 문화(外來 文化)의 유입(流入)으로 효사상(孝思想)이 해이(解弛)되어 불효행위(不孝行爲)가 속출(續出)하여 우리의 전통적(傳統的)인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점차 쇠퇴(衰退)하여 가는 이때, 다행이 우리 고장인 보성군 복내면 내동(寶城郡 福內面 內洞)에서 출생(出生)한 효자효부(孝子孝婦)가
있으니 이분이 바로 우석 염길섭씨(友石 廉吉燮氏)와 그 부인 김모례여사(夫人 金謨禮女史)이다. 우석(友石)께서는 1927년 정묘(丁卯) 11월 24일에
사인 동기씨(士人 東起氏)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인품(人品)이 고매(高邁)하고 성품(性品)이 중후(重厚)하다.
고려 명상(高麗 名相)인 곡성부원군 충경공 매헌 휘제신(曲城府院君 忠敬公 梅軒 諱悌臣)의 후예(後裔)이시며 임란절신 수문장 증통정대부 병조참의 정헌공 휘서(壬亂節臣 守門將贈通政大夫兵曹參議貞軒公 諱瑞)의 10세손(十世孫)이시다. 우석 선생(友石 先生)은 빈농(貧農)의 출신으로 가계(家計)가 여의(如意)치 못하여 10여세(十餘歲)에
출향(出鄕)하여 갖은 고생(苦生)을 다하면서도 항상 고향(故鄕)에 계시는 부모(父母)님을 못잊어 하다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산(家産)이 서서히 궤도(軌道)에 오르자 다시 부모(父母)님을 모시고 그동안 못 다한 효성(孝誠)을 다하여 좋아하시는 음식(飮食)과 의복(衣服)은 물론이요 항상 마음을 즐겁게 하여 드렸으나 세월(歲月)이 무상(無常)하여 생모(生母)는 별세(別世)하셨다. 아버지께서 부득이 계모(不得已
繼母)를 맞이하시니 우석(友石)께서는 계모(繼母) 섬김이 조금도 생모(生母)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부인 김모례(夫人金謨禮女史)는 본관(本貫)이
김해(金海)니 금녕군 목경(金寧君 牧卿)의 후예(後裔)요 부용(扶龍)의 여식(女息)이다. 부인(夫人) 또한 부군(夫君)의 뜻을 잘 받들어 시부모(媤父母)를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하니 인근(隣近)의 칭송(稱頌)이 자자하였다. 혹 부모(父母)님께서
병석(病席)에 누우시면 내외분(內外分)이 한결같이 다른 일을 다 제치고 오로지 병간호(病看護)에 전력(全力)을 다하였다.
후천명(後天命)으로 별세(別世) 하심에 애통(哀痛)함이
중천(中天)에 이르고 상장지절(喪葬之節)을 모두 예법(禮法)에 맞게 하니 주위(周圍) 사람들이 입을 모아 탄미(嘆美)하였다. 오호(嗚呼)라 부모(父母)님께서 이미 돌아가시니 부모(父母)에게 효성(孝誠)하는 그 정성(精誠)을
조상(祖上)에게 옮겨 누대 선조묘역(累代 先祖墓域)에 석물(石物)과 제위토(祭位土)를 무루완비(無漏完備)하고 충경서원(忠敬書院) 및 유천사 창건(柳川祠 創建)과 충경공(忠敬公) 이하 5세7위설단(五世七位設壇)과 제위토(祭位土)를 마련하는데도 거액(巨額)을 헌성(獻誠)하여 유종(有終)의 성과(成果)를 거양(擧揚)하였다.
그뿐이랴, 용연사(龍淵祠)와 우석정사(友石精舍)를 짓고 용연사(龍淵祠)에는 조령(祖靈)을 편안하게 모시고 우석정사(友石精舍)에서는 하시(何時)를 불문(不問)하고 유지 문사(有志 文士)들의 면학(勉學)의 기회(機會)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향토 발전(鄕土 發展)에 지대(至大)한 심혈(心血)을 기울여 군내 제관서(郡內 諸官署) 및 각급학교 신축보수(各級學校 新築補修)에 거액(巨額)을 쾌척(快擲)하셨고
복내고교 부지매입가(福內高校 敷地買入價)의 반액(半額)을 자담(自擔)하였으며 복내 노인회관 부지(福內 老人會館 敷地)를 마련하고 보성향교중수(寶城鄕校重修)와 사적비건립(史蹟碑建立) 및 삼강록 편찬(三綱錄 編纂)에 또한 거액(巨額)을 연조(捐助)하니 만구함송(萬□咸頌)에
보성군민(寶城郡民)의 상(賞)을 수상하고 내무(內務) 및 문교장관(文敎長官), 그리고 국세청장(國稅廳長),광주시장, 교육감, 보성향교, 광주동구청장(光州市長,敎育監,寶城鄕校,光州東區廳長) 등으로부터 감사장(感謝狀) 및 표창장(表彰狀)이 쇄도하니 이
모두가 효(孝)로부터 기인(起因) 된 것이다. 이에 본향 향교(本鄕 鄕校)와 유도회(儒道會) 및 많은 선비들이 발의(發議)하여 각 향교(鄕校)에 널리 알리고 또한 성균관(成均館)에 품달(稟達)하여 우답(優答)을 받았으므로 이 당대(當代)의 효행(孝行)을 그대로 묻히게 할 수 없어 산수구가(山水俱嘉)한 승구(勝區)에 기행비(紀行碑)를 건립(建立)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각계각층 제현(各界各層 諸賢)들로 효행비 건립추진위원회(孝行碑 建立推進委員會)를 구성(構成)하고 불초(不肖)에게 비문(碑文)을 청(請)하니 비록 문졸(文拙)하나 감동(感動)한 바를 어찌 찬양(讚揚)하지 않으리오.
나를 잃고 파묻혀 들어감이 이와 같으니 여기 기행비 건립은 어찌 우석내외효행(友石內外孝行)을 천양(闡揚)하는데 그칠 것이리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륜(人倫)의 고귀(高貴)함을 널리 알리는데 귀감(龜鑑)이 될 것이다. 슬하(膝下)에는 3男 3女를 두었는데, 장남(長男)은 기현(基鉉), 처(妻)는 한유미(韓流美)인데 2남 1녀를 두었고, 차남(次男)은 기범(基範), 처(妻)는 김정자(金正子)인데 2남 2녀를 두었으며, 3남은 기석(基錫)이고, 장녀(長女)는 이상천처 인숙(李相天妻 仁淑)인데 1남 1녀를 두었고, 차녀(次女)는 문무창처 기숙(文武昌妻 基淑)인데 1남 2녀를 두었으며, 3녀는 박영석처 경숙(朴榮錫妻 京淑)인데 1남 1녀를 두었다.
기행비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문덕면 덕치리 150-2.(서재필 박사 유적지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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