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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의 시조와 내력

파주염씨의 시조와 유래 및 내력

 

  개  요
  
이곳은 파주염씨의 시조와 유래 및 내력 등 가장 기본적인 내용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언급하고, 각 세부사항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이 있는 곳으로 안내합니다.

    파주염씨를  소개하는 간략하게 만든 '게시용'은 이곳을 누르시면 연결됩니다.☞

  염씨(廉氏)의 유래에 대한 기록으로는 [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부터 왔다]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여적(趙汝籍:선조~인조)이 쓴 청학집(靑鶴集)에 "廉氏 出于 帶方國也(염씨출우대방국)"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 정황들로 보아 염씨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으로 보는 것이다.

(아래 '3. 염씨 성의 유래' 참조)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으로, 生卒墓미상, 號大司徒公(호는 대사도공), 官三韓壁上公臣大司徒(관직은 삼한벽상공신대사도),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을 통일할때의 공적 등으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대사도에 오르신 분이다.
  고려 태조 23년(940) 新興寺(신흥사)를 重修(중수)하면서 功臣堂(공신당)을 세우고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동서 벽에 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를 삼한벽상공신이라하며 公께서도 이때 三韓公臣(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한때 諱字(휘자)를 明(교명)으로 기록하였으나 고려사 역사서 또 萬姓譜(만성보)와 氏族源流(씨족원류) 등에 모두 邢明(형명)으로 나타나 있어 改諱(개휘)하자는 대종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改諱(개휘)한다 기록을 남겨 후일의 참고에 供(공)한다

  물론 시조 이전에도 여러 염씨가 자료에 나타나 있는데,  국보 제104호인 '염거화상탑'의 장본인인 고승 '염거'와  서기 647년인 선덕여왕 16년에 국정에 참여했던 '염종', 또 648년인 진덕여왕 1년  6공(六公) 중 한 사람으로  대신을 지낸 '염장' 등이 있으나  정확한 계대를 알 수 없고,  고려초에 활동하신 염형명선조부터 계보가 이어지고 가문을 일으키게되어 '염형명'선조를 시조로 모시게 된 것이다.

 

   중시조는 염제신(廉悌臣 시호;충경공, 1304~1382년)인데, 시조의 13대후손이며 고려시대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공민왕, 우왕 등 다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여러 요직을 거치며, 문하시중까지 오르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져, 고려역사에 빛날 뿐만아니라 염씨를 부흥시킨 분으로, 후손들은 '염제신(廉悌臣)'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이분께는 공민왕께서 친히 그려 하사한 초상화가 있는데,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돌아가신 후 충경공 시호가 내려졌고, 또한 왕명에 의하여 목은 이색이 찬하고, 청성군 한수가 글을 써서 만들어진 신도비가 경기도 장단군 묘소앞에 세워졌다.

 

   본관은 파주(坡州)로, 시조 염형명이 살던곳이 봉성현이므로  처음에는  '봉성'이라 하였으나, 중시조 염제신이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하였다가, 다시 지명 이름을 따서 '서원'으로 삼았다가 '서원'이 '파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도 파주로 개관하게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파주이외에 다른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는 세거지일 뿐 모두 파주염씨로 염씨는 [파주] 단일본이다.

   본관 정정은 거주지 관할 가정법원에 본인이 소정의 서류를 갖추어 신청하면 본관을 파주로 정정할 수 있으며, 게시판의 자료실에 기본 신청양식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훈(遺訓)으로는 4세 염이(廉怡-閉窩公)선조의 유훈이 있는데,
폐와공께서 임종전에 자손들에게 유계로 하신 말씀으로

[忠孝爲本 經學爲業 以保門戶 勿事科第 勿求官達 以遠禍辱]

[충효로 근본을 삼고 경학으로 업을 삼아 문호를 보전하고 과제(과거보는 일)를 일 삼지 말 것이며 관작과 영달을 구하지 말고 화욕을 멀리하라.]
이는 [충효를 세습하되 청한으로 업을 삼은 것이 그 유래에 있어서이다 - 諸昆之世襲 忠孝 淸寒爲業者 有所由來矣]라는 말씀을 덧붙여 이 유계는 우리 가문에 있어 세습되어 내려온 훈계를 근간으로 하신 것으로 본다.

   역사의 인물로는 신라때의 고승 '염거'(경복궁 경내의 국보인 염거화상탑의 장본인)와  중시조 '염제신'과 세아들인 '국보'(예문관대제학, 국파공), '흥방'(예문관대제학 상호군, 동정공), '정수'(우문관대제학, 청강공)가 뛰어난 인물이며,  고려의 멸망과 무진참화이후 은둔생활로 두문불출하던 염씨들은 임진왜란때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의병을 일으켜 목숨바쳐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어,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때에 공을 세운 '염걸'.'염서'장군과, '염경', '염언상', '염홍립', '염세경'등이 있으며, 일제때에 광복군에서 활약한 '염온동'과,  백의사 총사령 염응택(염동진), 염재보, 소설가 횡보 '염상섭'등 무수히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고려사를 보면 높은 벼슬을 한 염씨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주요 문화유물로는 경복궁에 있는 국보 '전흥법사 염거화상탑'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보물 '전공민왕필염제신상'이있고, 지방문화재 및 기념물로는 강화의 '철종임금 외가', 보령의 '수현사', 전남 강진의 '사충부자형제묘', 통영의 '선무원종공신 염언상장군묘' 등등이 있다.  유물유적 문화재 안내☞

    

     아래로 가시면 각 부분별로 설명하였습니다.

  1. 파주염씨의 시조 : 염형명(廉邢明)

   벼슬 : 삼한공신,  대사도   (三韓功臣, 大司徒)

  •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을 통일할때의 공적 등으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대사도에 오르신 분이다.
    고려 태조 23년(940) 新興寺(신흥사)를 重修(중수)하면서 功臣堂(공신당)을 세우고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포상하고 동서 벽에 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를 삼한벽상공신이라하며 公께서도 이때 三韓公臣(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 生.卒, 묘소 등은 모두 불명하나,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시의 공적으로 삼한벽상공신에 봉해지고,
    대사도에 오르신 것으로 추정하면, 서기870년대에서 943년 이후까지 사신 것으로 추정된다.
  • 벼슬이 삼한공신 사도를 지내신 근거는
    1). 고려사 권7, 세가7-문종1편 '염가칭'선조에 대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래와 같이
       ...략...<軍器丞位之子三韓功臣司徒邢明之孫>...략
       (염가칭은 군기승 염위(位)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형명'의 손....)과 같이 수록되었고,
    2). 태조 23년(940년)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면서, 고려 개국과 후삼국 통일에
        공이 큰 공신 29명을 공신당의 동.서벽에 그렸는데, 벽위에 그렸다하여 '삼한벽상공신'이라 하며
        시조 '염형명'께서도 여기에 포함되어 삼한공신이 된 것임.
  • 자세한 내용은 아래 '6번의 역사적 자료 등 고찰'에 수록하였음.   

 

  2. 파주염씨의 중시조 : 염제신(廉悌臣)   (중시조님 자세히 보기)

    호(號): 매헌(號 : 梅軒),   자 : 개숙

  • 관 직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 曲城府院君
    (門下侍中)
    (고려국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곡성부원군) (문하시중)
  • 시 호 : 충경공(忠敬公) <諡號란 돌아가신후 왕께서 내린 호를 말함>
  • 생 애 : 1304년 충렬왕30년(갑진년) 10월 ~ 1382년(임술년) 3월18일.
  • 묘 소 :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 대곡원.
  • 사 단 :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냉정2리. 1987.11.22일 제막
  • 제신 중시조님은 6세때에  아버지 휘 세충을 여의고 11세부터는  원나라 중서평장사로 있는 고모부 말길의 집에서 10여년간 수학하던중, 매우 총명하시어 元나라 태정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시종 中에, 정동성낭중의 벼슬을 지내시었다. (대동보1986).
    한자와 해설: (悌臣),(中書平章事/부총리),(末吉),(修學),(泰定黃帝),(征東省郎中)
    그후 염제신은 40세때인 고려 충목왕(1344-48)때 영구 귀국하여,  32대 우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30여년 동안에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며, 문하시중에 올랐고, 곡성부원군이 되시었다.
    그러는 동안 많은 공적을 쌓으셨고, 특히 문무를 겸비한 출중한 명신으로 유명하고, 공민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 시호충경공이며, 슬하에 3형제 국보, 흥방, 정수  모두 공민왕때 과거 급제 후 고위관직에 오름으로써, 우리 염문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하게 되었고,  넷째 따님이 공민왕의 5째 왕비인 신비염씨이시다. (파주염씨대동보, 1986).
    또, 장단군에 있는 묘소의 신도비는 목은 이색이 봉교찬(왕의 하교에 의거 글을 지어 올리는 것)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도비명'을 보려면 이곳 선택>     
    한자 ; (諡號/돌아가신후 받는 호칭), (忠敬公).
  • 시조와 중시조의 관계 : 중시조님은 시조로부터 14세손으로, 시조의 13대 손자가 되는 것이며, 아래의 도표가 시조에서 중시조 까지의 선대조 계보를 나타낸 것임.  
  • 중시조께서는 그동안의 출장 입상한 공로로, 공민왕께서 친히 그려 하사한 유상(초상화)은 1991.9.30일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었고, 문화재청 홈( http://www.ocp.go.kr/ )에서  '염제신초상'으로 검색 됨. (중시조님 초상화 보기)
  •  중시조(중흥시조) 란? : 우리 염씨 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도 마찬가지로 족보가 없던 조선시대 이전의 선조에 대한 정확한 입증 자료가 없어, 가장 이름을 떨친 훌륭한  선조분을 중시조로 모시게 된다.
    우리 염씨도 시조부터 13세까지의 先系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어, 가장 전성기인 14세 '염제신' 선조님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지금의  대수는 이분부터 시작하여 다시 1世로 계산하고 있는 것임.
     

  3. 염씨 성의 유래

 염씨(廉氏)의 유래에 대한 기록으로는 [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부터 왔다]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여적(趙汝籍:선조~인조)이 쓴 청학집(靑鶴集)에 "廉氏 出于 帶方國也(염씨출우대방국)"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청학집은 조여적이 여러 도인들과 담화한 내용을 적은 책으로, 성씨 유래에 대한 기록은 청학상인(靑鶴上人)이란 사람이 녹두처사가 쓴 [삼한습유기(三韓拾遺紀)]에 적혀있는 내용을 보고 하는 얘기를 적은 것이라 한다.
  대방국은 황해도일부와 경기도 서북부 장단(長湍) 풍덕(豊德) 지역에 위치하였고, 고구려에 멸망하면서 유민들은 신라 등으로 투항한 것으로 전한다.

  여기서 우리의 조상과 본관 파주와 장단과의 연관 관계를 보면, 시조 이전부터 염씨가 이곳에서 나타났고,  고려태조 왕건이 시조 염형명께 하사한 농토과 집(永業田舍)이 이곳에 있고, 중시조 염제신 선조의 묘소가 또한 이곳 장단이고, 파주의 옛 지명이 장단현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이곳이 우리 염씨와는 매우 밀접한 곳이고, 본관이 [파주]로 된 것도 그냥 우연이거나 임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자료로 볼 때 염씨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으로 보는 것이다.

 낙랑군 시대의 염사치(廉斯) 염사치는 지금부터 약 2,000여년전인 1세기 경에 사신 분으로, 이때 처음으로 성과 이름(氏와 名)을 사용한 역사적 기록이 있는 것이다.(위지 위략, 해동역사, 후한서 동이전 등).

참고문헌 : 海東譯史(해동역사)편
'按後韓(?)書建武中韓廉斯人蘇馬諟來獻光武封爲廉斯邑君則廉斯本邑名而爲氏也
 集韻云測角切人名王莽時有'

'후한서를 상고하면 건무중(서기25~55년)에 한의 염사 사람 소마시가 래헌하니 광무(서기24년)가 염사읍의 군에 봉하고 염사는 본래 읍명 이었는데 이로  성을 삼았다.

 참고 : 여기서 정확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 부기합니다.
  '염사치'와 신라시대의 '염거', '염종', '염경' 및 시조와의 계대 관계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 '염사치'에 대한 설을 보면, "염사치는 진한의 우거수로 있다가 낙랑에 귀화한 사람으로, 공로가 있어 성과 이름을 하사 받았다"라는데 여기서 '염사'는 읍이름으로 이것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염사씨'라는 것이며, 이것이 훗날에 '염'씨로 바뀌어 우리의 득성조가 맞는지 고찰과 자료 발굴이 있었으면 하는 바랩입니다.

      참고 : 염사치에 대한 자료는 이곳에서 더 세밀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신라 때의 염씨로는 서기 647년인 선덕여왕 16년에  국정에 참여했던 '염종'과, 648년인 진덕여왕 1년  6공(六公) 가운데  1인으로  김유신과  함께  대신을 지낸 염장을 비롯하여,  국보제104호인 경복궁의 '염거화상탑'의 장본인 '염거'  등이  있다.(삼국유사, 東史綱目). 한자 : 廉宗, 金庾信, 廉長, 廉巨

고려(918-1392) 왕조의 개국 무렵인 918년경 염상이 혁혁한 공훈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고려태조 11~20년간에 大相 '염경'  또 태조 26년(934년)에도 재신으로의 廉相과 같은 인물이 나타난다.
(고려사 2권; 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한자 :  廉湘, 廉卿, 宰臣

  또, 왕건 즉위 불과 10여일 후에 궁예 휘하의 잔존세력인 반란군중 공주지역 실력자인 이흔암을 체포한 사람이 수의형대령 '염장'이고, 태조1년 청주 출신 순군낭중 현율과 같은 반역자를 체포한 사람이,  마군대장군 '염상진'이다.(고려사절요 군1). 한자 : (伊昕巖), (徇軍郎中 玄律), (高麗史節要)

  이를 보면, 염씨는 중국 왕족의 후예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귀화성씨가 아니라, 이미 2000여년 전 부터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한국토성중 하나인 것이다.(염태호, 2000).  한자 ; (廉氏), (韓國土姓)

  4. 본   관 :  파주 (坡州)    (本貫 : 본, 관 또는 관향이라고도 함)

         ※. 본관의 변경 : 봉성의 지명 개칭에 따라 본관도 변경되었음.
                 봉성 → 곡성 → 서원 → 파주    (파주의 변천사 보기)

본관을 '관', '관향'이라고도 하며, 호적등본에서는 '본'이라고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 파주염씨의 본관이 '파주'로 삼게 된 것은 고려사 등의 자료에도 있듯이 시조이신 '염형명'선조와 그 후손들의 설명에서 보면, 봉성현(파주의 옛이름)에 대대로 이어오는 집과 농토를 가지고 대를 이어 살았다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처음에는 '봉성'이었다가,  다음 1354년(공민왕 3년)에 중시조이신 매헌 충경공(염제신)선조께서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본관을 '곡성'으로 개관하였다가, 다시 지명이름으로 개관하였는데 이때는 '봉성'이 '서원'으로 바뀐뒤라 '서원'으로 하였고, 서원이 정부의 행정명칭 변경에 따라 '파주'로 바뀌어 우리 본관도 자연히 '파주'로 된 것입니다.

만성보와 일부 성보에  용담, 순창, 담양, 개성, 서원 등  70여본이 나타나 있으나, 이는 우왕 14년인 서기1388년의 무진참화를 피하기 위하여 각지방으로 분산되어 살면서 조상의 유업지, 또는 각자의 주거지명을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고, 우리나라 염씨는 모두 동근동원으로 파주염씨 단일본임.

  이는 마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후, 고려 태조 왕건의 후손을  멸족시키려  함으로써,  이들이  왕씨 성을 버리고  모친의 성을  따르거나, 王자가 든  玉, 全, 田, 琴, 馬, 龍 등으로  성을 바꾼 것과 다름없다.  용담염씨 역시 흥방의 후손들이 무진참화후 피난처 용담을  본관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태호, 2000).
참고 : 대종회 종보 1997년판 제10호 5면 '우리의 본관은'  참조
한자 ; (姓譜),(同根同源), (옥, 전, 전, 금, 마, 용), (龍潭廉氏), (廉興邦)

-. 파주염씨이면서 호적의 본관이 '파주'가 아니고 서원, 봉성, 파평, 용담 등 다른 이름으로 된 경우는 변호사에게 의뢰하여 '가정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호적을 고칠 수가 있으며,
참고로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전체 염씨는 26,585가구에,   인구수는  69,387명으로 나타났음.

참고로 집성촌을 말하면(순서는 특별한 의미 없음)

     경남 거창군 남산면 월평리
     전남 나주시 송월동 신월마을
     전남 나주군 세기면 동신마을
     전남 광산군 본량면 남산리
     전남 보성군 문덕면 양동리 양지마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오류리
     전남 화순군 청풍면 세청리 선하마을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교리
     경남 함양군 서하면 해평리
     전북 임실군 신평면 원천리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
     충북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충북 옥천군 청성면 구음리
     경기 수원시 율전동
     충북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등

    위 지명 이름은 옛 이름 그대로 적은 것은 것이며, 지금은 많이 바뀌었으니 참고하십시오.

  5. 시조 염형명에 관한 역사적 자료 등 고찰

  1). 삼한공신 대사도에 오른 근거 자료
 삼한벽상공신 태조 23년(940)에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면서 고려 개국과 후삼국통일에 공이 많은 삼한공신(三韓功臣)들을 공신당의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 여기에 책록된 공신을 '삼한벽상공신'이라 하며,  '염형명'시조님도 그 중의 한분임.

고려 삼한공신 명단

고려 개국공신 명단

 고려사(高麗史) 7권 세가7 문종 1 (1-10-03-1056 고려사 원문 소개)
'
十年丙申二月甲午有司奏: "沒蕃人廉可偁 軍器丞位之子三韓功臣司徒邢明之孫於庚戌年中充環衛公子軍役契丹兵 蘭入京城震騷奉二親避兵于故鄕峯城縣道遇賊被虜而去淸寧元年正月携一子亡來請可偁 父祖永業田舍 竝令還給." 制曰: "可偁 功臣苗裔丁年被 浮棄蕃土妻兒惟携一子皓首而歸深可憐憫可給舊業田廬.'

 '고려제11대 문종 10년 병신(서기1056년) 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거란군에게 잡혀 갔던 염가칭은 군기승 '位'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형명'의 孫인데 경술 년중(서기1010년)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되었다가 계단병의 경성침입으로 二親(二親; 조부,부)을 모시고 고향인 봉성현(지금의 파주군)으로 피하려다 도중에서 피로되었다가 청녕원년 정월에 아들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왔으니 부조의 영업전사(세습되는 농토와 집)를 환급하소서' 했더니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피로되었다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백발이 되어 왔으니 가련함에 구업전려를 돌려 주라'고 문종이 명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 : 4권 559쪽)의 내용
병신 10년(1056), 송 가우(嘉祐) 원년, 거란 청녕 2년
1056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에게 붙잡혔던 사람인 염가칭은 삼한공신(三韓功臣) 형명(邢明)의 손자로서 경술년에 거란 군사가 경성에 밀어닥치자 가칭이 부모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가 청녕 원년(1055) 정월에 그 자식을 데리고 도망해 왔으니, 그 아비와 할아비의 영업전사(永業田舍-대대로 세습되는 농토와 집)를 모두 돌려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2). 시조 염형명(廉邢明)에 대한 고찰(考察)
  시조님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정확한 '생.졸년대, 묘소, 유래 등과 계대' 등을 알 수 없어 후손의 한사람으로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며,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와 자료를 수집하여 정확히 밝혀 게재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에 고증 자료를 가진 분 또는 아는 분의 연락을 부탁합니다.(염명선)

 1). 시조님의 출생 기록과 생.졸 연대 및 묘소 등
 2). 고려 초기의 개국공신 '廉湘'과  왕건의 임종 무렵 유지를 받든 재신 '廉相', 또 삼한공신에 책봉된 '廉邢明'이 시기나 정황등으로 볼 때 동일인이 아닌지?

   1388년 무진사화때 고려와 우리 집안을 멸망시킨 그 장본인들이 고려사를 수 없이 고치고 다시 쓰면서 우리 집안의 어른들을 잘 챙겨 써 주었을리 없다고 보기 때문인데, 같은 시기의 '염상'선조의 한자는 오류는 아닌지?(KBS 드라마에서는 한사람으로 다루었음.)

  그럼 고려 초기에는 아무데도 없던 시조 '형명'님이 공신당의 '삼한공신'명단에 처음 나타나고, 3세조 '가칭'님을 언급하는 부분에 '삼한공신 사도 형명'이라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공신의 예우로 이름을 하사 받은 것은 아닌지?  이 시기에 1등공신 '홍유'가 '홍은열(남양홍씨 시조)'로, 또 '장정필'(안동장씨 시조)도 이름을 하사받았고, '어중익'(충주어씨 시조)은 성을 하사 받은 기록이 있음.

 어쨋든 이 부분에 대하여 좀더 정확한 연구와 고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별도로 '시조의 역사 고찰'이 있습니다. 이곳을 누르세요☞

 시조 염형명선조에 대한 부연 설명과 삼한공신 일람표 및 파주염씨 대종회 종보 제14 ~15호 등에 실려져 있는 염종환님의 시조님에 대하여 언급한 글들을 모아 별도의 페이지로 올려 있으니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6. 항렬자(行列字)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鉉
○현

○洙
○수

東○
동○


○섭


규○


○선


철○


○식


형○


○교

會○
회○

○承
○승

采○
채○

○默
○묵

○錫
○석

○永
○영

秉○
병○


○렬


기○


○호


태○


○래


노○


○균

鐘○
종○

○求
○구

秀○
수○

○熙
○희

 

 

 

○焞
○돈


사○


○옥


순○


○걸


희○


○곤

鎰○
일○

○浩
○호

柱○
주○

○薰
○훈

 7. 파주염씨의 姓源(성원)과 본관의 유래

   염씨(廉氏)의 유래에 대한 기록으로는 [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부터 왔다]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여적(趙汝籍:선조~인조)이 쓴 청학집(靑鶴集)에 "염씨출우대방국(廉氏 出于 帶方國也)"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자료로 볼 때 염씨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으로 보는 것이다.

  파주염씨는 우리나라 固有의 염씨로서 得姓祖인 염사치는 封君과 아울러 전택과 관모를 하사받을 때부터 낙랑군함자현에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시조인 휘 형명은 峯城縣(파주의 古號)에 世襲田舍를 가지고 世居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本貫을 봉성으로 삼았다. 다음에는 서기1354년 2월16일에 매헌선조 휘 제신 諡號 충경공이 곡성부원군에 封해지자 曲城으로 改貫하였으며 다시 곡성을 瑞原으로 개관하였다. 서기1504년 갑자에 서원이 다시 파주로 개칭되자 宗中의 합의에 의하여 파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밖에도 용담, 순천, 담양, 개성 등등 70여 본관이 각 姓譜에 나타나 있으나 이는 禑王14년(서기1388년) 戊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각지방으로 분산되어 살면서 조상의 유업지 또는 각자의 거주지명을 본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염씨는 同根同源이며 外他一般에 이르기까지도 파주염씨는 單一本으로 알고 있다.

  아래에 게시한 자료는 일부 오도된 자료에 대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 및 혼돈이 없기를 바라며 기록한다.
 (86년판 대동보 문헌록 52쪽에서 발췌)

 舊譜의 염씨 本蹟을 살펴보면 本姓은 公孫氏였는데 小典의 아들 黃帝軒轅씨가 姬水의 물가에 살때 姬氏로 姓을 삼았고 軒轅은 嫘祖에게 장가들어 昌意를 낳았는데 창의는 顓頊高陽氏를 낳았다. 고양씨의 증손은 大廉이다. 그 후손 中微는 王甫로 성을 삼았다. 「그 후손이  河東지방에 옮겨 살면서부터 廉씨로 改姓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黃帝헌원계의 염성이요.

  또 하나의 廉姓이 있다
  이는 畏吾世族인 布魯海牙가 廉訪使의 官職을 拜命받던 날 廉希憲이 출생되었는데 희헌의 아버지 布魯海牙는 옛날 官名으로써 성을 삼았다는데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姓이라하여 이로부터 자손들은 廉으로 성을 삼으라 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廉으로 성을 삼았다」라는 기록이 氏族博巧에 남아있다.

 그런데 중국계 염씨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大宗을 이루고 산다는 史的근거는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염씨의 姓源에 대하여 古史를 살펴보면 趙如籍이 저술한 '靑鶴集'에 염씨는 帶方國(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四사郡 중의 하나인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지금의 한강 이북 경기도지방과 자비령 이남의 황해도 지방을 총칭한 것임)에서 나왔다하였으며 '해동역사' 권67 염사치附戶來條에는 서기24년(후한 광무때)에 광무가 염사읍(지명)에 封君함으로 염씨로 성을 삼았다는 기록과 또한 일본인이 저술한 '조선인명사전'에도 '해동역사'와 동일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염씨로 得姓한 염사치는 후한 광무제의 봉군과 아울러 功을 표창하여 冠帽와 田宅을 賜하고 후한의 安帝 延光4년(서기125년)에 이르기 까지 백년동안 부역과 조세를 면제받았다는 사실이 魏書의 기록에 남아있으며 그후 신라선덕여왕때 국정에 참여한 廉宗과 신라진덕여왕때 六公中의 한사람으로 김유신과 함께 大臣이었던 廉長을 비롯하여 廉巨 廉卿 그리고 고려태조 26년(서기943년)에 宰臣이었던 廉相과 파주염씨 시조 諱 邢明은 고려태조 건국당시 삼한공신 대사도에 오르셨다.

  이와 같이 신라건국초기부터 파주염씨 시조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공훈과 업적이 連綿不絶함은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사적근거가 昭然한데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염씨가 중국계의 염성이라 함은 사실무근한 낭설이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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