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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 및 작품활동
- 보성중학, 일본 경응대 문과 수학
- 1920년 [폐허] 동인으로 문단활동 시작
이듬해 식민지 지식인의 정신적 고뇌를 그린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학예부장 등 언론계에 있으면서 명필을 얻음.
- 특히 <삼대>(1931, 조선일보 연재)는 당시 사회현실의 문제와 지적 분위기를 정면으로 묘사한
대표작.
- 경향 : 서울 중류층, 지식인, 예술가 등의 생활에서 소설적 제재를 많이 취함.
초기에는 주로 단편을, 30년대 이후에는 장편을 씀. 40년간 장편 28편, 단편
150편, 평론 101편, 수필 30편 발표
- 1963년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타계
- 유적지 - 작가횡보염상섭지묘 묘비(도봉구 방학동 천주교 묘지
내)
- 횡보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三代> <암야> <해방의 아들> 등의 작가로 장편,
단편, 수필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 일생 동안을 문학과 정론 직필에 바치며 사셨던 한국문단의 큰 별인 동시에 염씨 문중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염상섭이 이룩한 문학사적인 공로는 사실주의(寫實主義)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데 있다. 염상섭이 종생토록 이고 다녔던 화두는 주체의 정립과 리얼리즘의 정신이었다. 모든 우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과 진리를 찾으려는 열정을 그는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고, 이 열정이 그를 리얼리즘 작가로 만들었다.
자유롭고자 하는 주체,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을 찾으려는 자만이 엄정한 객관적인 방법에 기초해 현실을 개념적으로 재배열하고, 변화하기 마련인 현실과의 소통을 통해 개념을 재구성해 나가는 방법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시달린 암울했던 시대의 고독을 술로 달래며 살아온 산문 정신의 주도자인 염상섭은 술만 마시면 갈지(之)자로 걷는다는 뜻으로 스스로 호를 "횡보(橫步)"라고 이름지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술을 사랑하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 염상섭 일화 ◑
- 1. 출생과 檜나무에 대한 일화 염상섭은 1897년 8월 30일 이른바 도깨비
장난이 심하다고 하는 고가나무굴이라 불리는
낡은 집에서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염규항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염상섭이 실제로 성장한 곳은 속격동 종친부에 속했던 고가로서
지금의 수도육군병원의 자리였다. 그 당시에는 개천에 깨끗한 물이 흐르고 檜나무가 서 있어 여름이면 매미가 울어대는 운치 있는
곳이었다. 어려서 장난도 할 줄 모르고 동무라고는 제 발 끝에 채이는 제 그림자뿐이던 상섭에게는 그 檜나무가 이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공상을 자아내는 유일한 벗이었다.
그림책 하나 동화 한마디 얻어 보고 들을 수 없었던 고독한 소년은 우거진 고목 아래 쓸쓸히
앉아 매미 소리에 귀를 즐기는 것과, 뭉싯뭉싯 흐르는 앞 개천의 물이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소년의 시야에 비친 자연의
전부였다. 남들은 머리 깎고 학교에 다니는데 나는 언제나 가려는고 하고 제 댕기 꼬리를 원망스러이 휘잡고 섰던 때도 이 檜나무 밑이요,
첫겨울 모진 바람이 치내리고 치올리고 황혼에 혼자 서서 의병에 붙들리신 아버님 소식을 알러 간 전인군을 기다리던 곳도 이 檜나무
그늘이었던 것이다. -
- 그의 아버지 규항씨는 원래 영친왕(英親王)의 생모인 엄비(嚴妃)와 가까웠다고 한다. 염상섭은 "나의
아버지는 엄비의 소꼽동무였던 덕으로 어느골 군수를 지내서 한평생 호강을 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이 글로 볼
때에 횡보 자신이 술을 좋아한 것은 집안의 내력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 자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꼭 부러워한 것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소년 시절을 종친부에 속한 고가에서 산 것도 그러한 내력이 있는
것이라면 그의 큰형 창섭씨가 영친왕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유년 학교와 사관 학교를 거쳐서 일본의 육군 대위까지 승진했던 것도 우연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횡보가 독특한 성격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집안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큰형과는 달리 문학을 했다는 점에서
발견되지만, 그가 소년 시절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것도 아버지와 큰형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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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시력과 할아버지에 관한 일화
- 어려서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우면서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이 자식은 왜 이리 둔하냐"고 꾸중을 들으며 자란 소년 염상섭은 타고 난 근시여서 늘 머리가 아프고 기분이 무겁고
눈살이 찌붓한 명랑치 못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 1907년 염상섭은 머리를 깎고 수송 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관립학교여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싫어서 서대문에 있는 보성 소학교로 전학을 한다. 더 보고 더 배워야겠다는 당시의
젊은이의 꿈이 염상섭에게도 형성되어서 일본 유학의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염상섭은 1912년
9월 친구와 함께 부모 몰래 일본으로 떠나 중학 2학년의 나이로 외국 생활을 시작한다. -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열서너 살
적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중이나 될까하는 막연한 감상에 젖기도 했었고, 머리가 늘 아프고 깨끗하지 못해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본에 건너가서 안경을 쓰게 된 뒤부터는 머리도 상쾌하여지고 눈 찌푸리는 버릇도 없어짐으로써 염세적 감상과
우울증을 극복하고 문학에 눈을 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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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성학원(聖學院) 시절의 일화
- 일본말을 할 줄 몰라 처음으로 외국어를 독학한 그의 어려움은 아마 형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 가을 이미 학비가 떨어진 염상섭은 학비를 대주겠다고 하는 독지가의 도움으로 카톨릭 계통의
성학원(聖學院)으로 옮겼다. 성학원에서의 1년 6개월의 학교생활은 몇 가지 특기할 일이 있다.
첫째 모성애이기는 하나 여성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여자는 상섭의 잊혀지지 않는 첫 여성으로 남은 것이다. 그녀는 혼혈아였다. 교회 합창단에서 피아노를 치는 벽안의
소녀였다.
둘째 상섭이 세례를 받았고 찬양대에서 노래까지 부르게 되어, 신앙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셋째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규율과 규범을 무시하는 윤리 답안지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비를 부담하던 독지가로부터 중학교 졸업 후에 상고에 입학하여 주산 부기를 배운 다음 자기와 함께 사업을 하자는 권고를 받고 이를
거절한 다음 학교를 떠나 교토로 갔다. 교토에는 큰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교토 부립 제2중학에 편입, 1918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곧 게이오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가 기자로
첫발을 디딘 신문은 쓰루가에 있는 지방 신문이었으나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2개월만에 그만두고 일자리를 찾으러 나고야,
오사카에 떠돌아다녔다. 오사카에서 국내의 3·1 운동을 알게 된 그는 곧 오사카의 한국인 학생들과 거사를 도모하던 중 일본 형사들에게 들통이 나서 도쿄로 떠났다. - 4.「폐허」사와 관련된 일화
- 폐허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염상섭 자신의 회고록에 나타나 있다.
"그 폐허사의 문패를 붙였던 적선동 그 집이 바로 나의 조부 때부터 중형이 출생한 후까지 살던 집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근처 '고가나무굴'이라는 도깨비장난이 심하더라는 집으로 옮겨간 뒤에 낳았지마는, 하여간 그 집주인 K군의
호의로 안방만 내놓고는 마음대로 쓰게 되었었다. ……(중략)…… 폐허사 현판을 붙였던 그 집을 제공한 K군을 만난 것은 어느 날 밤
그 근방인 종교 예배당에서였다. 나는 어릴 적, 일본 도교에 있을 때부터 교회 앞을 지나다가 주일이고 삼일 예배고
간에 설교가 있는 눈치면 들어가서 듣는 버릇이 있었는데, 언젠가 초저녁에 종교 예배당에를 들어갔다가 파헤 나올 제, K군이
나를 어디에서 보았던지 알은 체를 하여 주어서 그의 집에도 찾아가게 되었고, 그 집에 문단의 양산박 셈즉한 폐허사
간판도 붙이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기 발랄한 문학청년들이 모여 앉아서는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불똥이 뛸 듯한 기염을 토하며 의기 충천하던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집 주인 K군은 동인은 아니오 철학서를 그뜩이 쌓아 놓고
독학을 하였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일선 기자로서 활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운동을 주도하게된 그의
생활은 갑자기 우리 문화의 중심부에 그의 존재를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
- 5. 고집스런 성격에 관한 일화
- 그가 그처럼 열심히 일하던 동아일보를 그는 7개월만에 그만두었다.
유흥렬씨는 "그의 강한 자존심은 동아에도 오래 있지 아니하였다"고 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훗날 그의 회고담에서 보면, 그가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 데는 신문사 내부에 반목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그의 성격이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이력서를 보게 되면 어떤 직장에서든지 그가 오래 근무한적이 별로 없다. 그것은 그의 성격이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자신이 싫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않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일종의
'고집'과 같은 것이지만 아마도 그 때문에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의 염상섭에 대해서
유광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횡보는 재분(才分)이 높은 사람인 동시에 누구의 앞에서나 굽히지 않는
성격을 가졌었다. 이것이 그의 장처(長處)인 동시에 그의 생애를 더욱 다난하게 하고 다한하게 하지 아니하였는가
한다." "학문상으로 진리로 믿는 신념에서 굽히지 않는 것은 학구(學究)나 예술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생활에서 다소간 현실과의 타협은 있기 쉬운데 횡보는 이것을 못하고 안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염상섭의 성격은
어떤 직장의 어떤 자리든지 자신의 뜻과 맞지 않으면 사심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따라서 그 대가로 그는 평생 동안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였다. -
- 6.《동명》시절에 관한 일화
- 1912년 7월 서울로 돌아온 염상섭은 《개벽》 8월호부터 10월호까지 3회에 걸쳐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연재하여 직업적인 작가로서 출발하기 시작한다.
1922년 9월에 육당 최남선이 《동명》을 창간하게 되자
편집을 맡았고, 《동명》이 시대일보로 바뀌자 사회부장의 직책을 맡아서 1925년 신문이 휴간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하였다. 이
무렵의 그의 성격에 대해서 박종화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마음은 호통하고 호협(豪俠)하지 못했으나, 뇌락(磊落)하고 컸다.
웬만한 사람은 사람으로 대해 보지 아니했다. 마음이 큰 까닭에 오만하고, 세상 사람들을 쥐똥같이 보았으므로 백안시하는
태도였다. 더구나, 여자는 사람으로 치지 아니하여 안중에 없었다. 당시의 여류 하가요 문명까지 높았던 정월 나혜석은
동경으로부터 오빠, 오빠하고 꽤 쫓아다녔지만, 뒤퉁그러지고 태산 반석 같은 강장(强 )의 주인공인 상섭은 따로이 정월을 충고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타협할 줄 모르며 자신의 주장이 서면 논리적으로 극복되지 않는 한 물러서지
않는 그의 성격은 그로 하여금 평생토록 부(富)와는 거리를 두고 살게 하였지만 그의 인격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고 살게 하였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말년에도 집 한 칸 없이 셋방을 떠돌아다녔으나 그의 개인적인 지조나 정치적 색채에 비난받을 만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
- 7. 양주동과의 술에 관한 일화
- 1925년 말 시대일보가 내분으로 문을 닫음로써 염상섭은 다시 무직의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이듬해(1926년) 다시 일본에 건너간다. 염상섭은 도쿄에 있는 동안 나도향, 양주동과 자주 술을 마시며 2년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 그는 '주정'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이렇게 술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한참 젊은 나이에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당대 지식인의 고뇌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는 이처럼 술을 마시면서도 소설을 계속 썼고 소설 속에서 당시
사회의 모습과 개인의 삶의 양상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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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결혼에 관한 일화
- 1929년 2월 23일 만 32세의 노총각으로 장가를 들었다. 구식 결혼식이었다. 연미복
차림의 신랑과 족두리에 예복을 입은 신부는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상섭의 결혼은 하나의 이단적 행위였다.
첫째
당시는 보통 13∼18세면 결혼을 하는 早婚이었다. 상섭은 결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침울한 환경과 암담한 사회적 정세하에서
결혼생활의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은 綠木求魚式이라고 생각했다. 즉, 자유주의자요 부정적 사회관에 젖어 있던 상섭은 결혼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다. 둘째 결혼이 늦어진 것은 상섭의 가난한 생활 때문이다. 더욱 구속을 싫어하는 성미에 책임을 짊어지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다수 식솔의 뒷바라지에 눈코뜰새 없으니 자기의 문제는 여차의 것으로 생각했다. 셋째 실연의 충격이었다.
이들의 결혼생활초는 순탄하지 못했다. 상섭의 술과 무질서한 생활태도와 지나치게 가난한 생활에 나이 어린 신부는 놀라서
친정으로 달아난 것이다. 김氏네서는 딸 잘못 보냈다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섭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단주(斷酒)를 한 것이다.
첫아들을 보게 되면서 이들 부부는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아현동에 새 살림을 차리고 새 직장을 얻게 되면서부터 상섭은
가정의 평안을 알게 되었다. - 9. 염상섭의 연인에 관한 일화
- 염상섭이 여자를 알기는 1914년 봄 성학원 시절이었다. 17세의 사춘기에 모정을
그리워하는 사나이의 정은 연상의 여인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 상대는 브라운이라는 20세의 벽안의 이국 처녀였다. 상섭은 이 여자를
30이 넘도록 잊지 못했다. 브라운과의 관계는 순정한 사나이의 마음에 여인의 순결성을 심어 주었다. 한없는 동경을 낳게 했다.
그 다음에 알게 된 여자는 약혼한 사나이가 있는 시나꼬라는 일본 여자였다. 동경중학시절이었다. 브라운을 잊기 위한 반동적
행위였다. 시나꼬는 상섭의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다정다감한 청년의 감정을 사로잡았었다. 그러나 약혼한 여자란 사실을 알고 부터는
손을 끊었으나 그 충격은 컸다. 이를 소재로 한 작품만도 여러 편 있다. 시나꼬는 이성적인 성적결합을 의미하는 연인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상섭이 '나에게도 초연이 있었으니 20세의 동경시절이었다.' 라고 했듯이, 시나꼬는 상섭의 첫 연인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와의 실연은 不知中에 여자에 대한 경멸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 세 번째로 알게 된 여인은 한국여자였다. 慶大에 입학한
해였다. L이라는 여류로 미술가였다. 둘이는 서로 우정으로 이해가 깊어 갔다. L은 앞의 어느 여자보다도 상섭의 성격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의 실연은 똑같이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상섭은 술을 알게 되었고, 첫 동정을 22세에 유녀에게 바치게 되었을
정도로 생활은 문란해졌다. L은 갈등 속에서 약혼을 했다. 상섭과 L은 귀국 후에도 계속 접촉을 했었다. 그 예로 「폐허」의
동인으로 활동했고, 상섭의 첫 단편집 《견우화》의 표제화까지 그려 축의를 표했다는 사실과, 상섭은
L을 모델로 하여 《해바라기》를 썼고 해방 후에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追悼》라는 작품까지 써서 영혼을 위로하고 자기 마음을 달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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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해군시절의 일화
- 1950년 10월, 이무영, 윤백남과 함께 해군에 입대한다. 이듬해 2월에 훈련을 끝낸
그는 소령으로 임관되어 1963년 휴전이 될 때까지 해군 생활을 하게 된다. 이선구는 그 때의 염상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6·25 동란이 일어났다. 우리는 모두 부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나는 횡보 선생을 두 번째 만났다. 그것은 해군
정훈감실이었다. 횡보 선생이 중립으로 해방이후 문단의 좌우 합작을 시도한 것은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6·25 동란으로 공산당의 정체가 노출됨에 따라 횡보 선생은 중립의 꿈이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길은 한 갈래, 그 분은 감연히 해군
초청에 응하여 현역 정훈장교로 입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장교 생활도 물론 실패이었다. 군대에서도 장교의 허락이 있어야
사병이 외출을 한다. 그러나 장교는 군율보다도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사병에게 무엇이나 허가할 때는 힘을 키고 까다롭게 구는
일이 많았다. 그러므로 당시 횡보 선생이 소속한 부대에서는 사병들이 횡보 선생이 당직을 서는 날만 고대하였다.
「얘 이놈아, 됐다. 오늘이 염소령님 당직이시다.」 이날 사병들은 염소령님의 허가를 받을 것도 없이 최대 한도의 외출을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횡보 선생은 아예 도장을 사병들에게 맡겨 놓고 불관하였기 때문이다. 「외출들
나갔는가?」 「예, 벌써 내어 보냈습니다.」 「그래, 음 쩝쩝쩝……」 - 몇 명을 내어 보냈느냐, 몇 시부터 몇 시까지냐, 그런 것을 횡보 선생은 도무지
물으시는 일이 없었다. 그 분은 수복 후 제대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내리 가난한 자택에 칩거하시었다. "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일화는 그가 공직 생활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작가의 관용을 갖고 있었음을 충분히 알게 하는 것이다. -
- 11. 가난과 관련된 일화
- 그는 1953년에 환성한 장편 《취우》로 1954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예술원이
생기자 그 종신 회원이 되었으며,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박영준은 "문단이 한참 시끄러운 때였는데 여기저기서 각기
조직체의 책임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해 왔지만 염상섭은 일체 그것을 사절하였고 두문불출 하였다." 고 하면서 그가 서라벌예대
학장이 되고서도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은 건강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외출을 하게 되면 문단 생활도 하게 될 것을 걱정한 때문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성격적으로 결백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선생처럼 문단에 휩쓸리지 않은 분도 없으리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염상섭의 생애는 간을 벗어 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가난하셨다. 구멍가게에서 외상으로 식료품을 사들이며
사시다가 돈이 생기면 외상값을 갚고 또 다시 외상 생활을 시작하시곤 했다. 더구나 술 때문에 건강은 하루하루 나빠갔다."고 북아현동의
이웃에서 산 박영준은 이야기한다. 그는 이처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외부 인사들과 접촉을 갖거나 하는 일이 없이 집에서 작품만을 써
나갔다.
1956년에 작품 《부부》《짖지 않는 개》로 아시아 재단에서 문화 증진책으로 주던 자유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57년에는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이 연속된 수상에서 받은 상금으로 그는 1959년 상도동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갈 수 있었다.
그 동안 살던 북아현동 집은 그의 질녀의 집으로서 방 한 칸을 얻어 살던 것이었다. 김종균의 조사에 의하면 이 무렵 염상섭은
위장병과 신경 계통의 여러 가지 병마로 고통을 겪었고, 또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난이
어느 정도인지는 "예술원상으로 받은 시계와 반지를 팔았다는 소문"이 충분히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는 위의 통증과 신경 계통의 통증을
잊기 위하여 약주를 마시고 글을 썼다고 한다. -
- 12. 임종에 대한 일화
- 상섭은 오랜 辛苦로 극도로 쇠약해진 몸에 잠시도 붓을 놓으려 하지 않았고, 정신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신경이 날카로와지면서 헛소리와 고함으로 그 괴로움을 참으려 했던지 몹시 불안해 하며 안절부절을 못하다가 급기야
의식을 잃고 인사불성 지경에 빠지기를 거듭하니 식구들은 더욱 불안과 고통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메디컬센터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입원 후에도 하등의 차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악화됨을 보고 의사의 허락을 받아 자택으로 옮겼다. 1963년 3월 13일
저녁 때였다. 둘째딸이 신부님을 모셔왔고, 고통과 괴로움의 13일 밤이 새고 14일 아침이 되어 부인이 평생 즐기던 정종 3수저를 떠
입에 넣으니 永眠했다 한다. 시간은 上午 9시쯤이었고 상섭의 나이 만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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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기타
- 횡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고르기 위해 동네 문패를 하나씩 살피면서 그 이름의
항렬도 따져 볼 정도로 꼼꼼하게 작업했다고 한다.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함께 그는 소설 공간의 현실성 확보를 지향했다. 그는 문학
지망생들을 향한 산문에서 "첫째, 말과 글을 배울 것이요, 둘째, 소설을 지향하거든 사실주의를 탐구하고 여기에 철저하라" 고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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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염상섭의 생애
- 본명은 상섭(尙燮), 호는 횡보(橫步). 1897년 8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문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2월 《동아일보》 창간과 함께 진학문(秦學文)의 추천으로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1963년 3월 14일 사망했다. 1920년 7월 김억, 김찬영, 민태원,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 동인지 《폐허》를 창간하고, 김환의 <자연의 자각>의 평가에 관해 김동인과 논쟁을 벌였다. <표본실의
청개고리>, <암야>, <제야>, <만세전> 등을 발표하며 문단적인 지위를 굳혔다. 1920년대에
발표된 염상섭의 소설은 대체로 당시 문단에서 양대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중립적인 노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하는데,
그의 가치중립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 것이 단편 <윤전기>이다. 1931년 발표된 <삼대>는 식민지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가족간에 벌어지는 세대갈등을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한 서울 중산층 집안에서 벌어지는 재산싸움을 중심으로
1930년대의 여러 이념들의 상호관계와 함께 유교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현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속편으로 <무화과>를 내놓은 이후 <모란꽃 필 때>, <그 여자의 운명>과 같은 통속소설을
발표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주로 가정을 무대로 한 인륜관계의 갈등과 대립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의주에서 삼팔선에
이르기까지의 도정을 그린 <삼팔선>, 옥임의 정신적 파산과 정례의 경제적
파산을 통해 당대의 세대를 적실하게 표현한 <두 파산>, 그리고 인민군 치하의 서울의 모습을 통해 위기에 직면한 인물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취우>가 주목된다. 그의 소설들은 당대의 사회 현실의 문제와 정신적 분위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리얼리즘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조선일보에 소개된 염상섭관련 기사 소개
다음은
조선일보 2002년 11월 18일자 A21면에 게재된 기사임.
[문화] 염상섭 소설언어 그 ‘寶庫’ 를 열다
(2002.11.17)
‘ 삼대(三代)’ ‘만세전’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적 작가로 평가되는 횡보(橫步) 염상섭(1897~1963·廉想涉)의 소설어 사전이 출간됐다.
문학평론가 곽원석(郭元石· 숭실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씨가 펴낸 ‘염상섭
소설어사전’(고려대학교 출판부)은, 횡보의 중·장편 소설 28편과 단편소설 129편 등 157편을 정밀히 분석, 총 1만여 개의 표제어와
문장용례를 작품출전과 함께 수록하고 있다. 횡보가 사용한 서울말, 한자어, 외래어·외국어, 의성어·의태어, 관용어(비속어, 속담, 비유어)등을
총망라해 원고 분량만 2만4000여 장에 이르는 대작이다.
염상섭은 흔히 한국 근대사회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작가로 불린다. 특히
서울토박이인 그의 소설은 당대 서울 중류계층의 삶을 생생히 포착한 생활어휘들이 풍부해 ‘순수국어의 보고(寶庫)’ 또는 ‘근대적 생활 감각의
언어’로도 평가된다.
월탄 박종화는 일찌기 횡보의 언어에 대해 “상섭은 순 서울 태생이다. 그의 작품에는 서울말 중에서도 순 경아리(서울 사람을 이르는 말)
중류 계급의 말이 풍성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횡보 역시 자신의 서울말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김동인을 겨냥한 한 글에서
그는 “최후로 사사로이 청할 것은 경어(京語)와 서도(西道)의 방언을 혼용치 마시라는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사전에 수록된 횡보의 서울말 중에는 국어사전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 만큼 생소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한결같이 감칠 맛나는 우리말의 어감과
묘미를 한껏 살려내고 있는 말들이다. 예를 들면, ‘생패매기’(어떤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나 ‘귀살머리적다’(사물이
뒤엉켜 정신이 산란한 상태)같은 말을 들 수 있다. ‘달뜬 목소리’ ‘씨근발딱하는 아내의 얼굴’ ‘스멀스멀’ 등도 인상적이다.
‘포실포실하다’ ‘덕적덕적’ ‘소양바양하다’처럼 신문학 시대의 고유어들을 즐겨 사용한 것도 횡보 문학의 특징이다. 곽씨는 횡보가 비슷한
시기의 이광수, 채만식보다 신소설계 언어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는 점을 지적, “관념적인 언어보다는 당대의 삶 자체에 녹아있던 생활어를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재생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염상섭 소설을 ‘순수 고유어의 보고’로 평가할 수 있는 결정적인 논거는
의성어·의태어의 활용에 있다고 곽씨는 분석한다. ‘간당간당하다’ ‘거반거반’ ‘강중강중’ ‘곰실곰실하다’ ‘깐죽깐죽’ ‘생글방글하다’
‘어근버근하다’ 등 작중 인물을 실제 생활현실 속의 인간으로 그려내는 구상적 표현은 현대소설의 한 싹이기도 하다.
횡보가 즐겨 사용한 비속어, 속담, 비유어도 그의 사실주의 문학의 한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리골 빠지다’ ‘대가리가 터지다’ ‘동리집
암강아지나 얻어오듯’ ‘뛰던 생선에 소금 뿌리듯’ ‘대청 내놓고 행랑살이 하듯이’ ‘등치고 배만지는 격’ ‘떼 논 당상’ ‘똥누러 갈제 다르고
올제 다르다’ 등이 그것이다.
염상섭 문학의 ‘서울 중심주의’가 갖는 언어적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핍박받는 식민지 현실 전반을 온전히 조감하지 못하고 도시생활에만 포커스를 맞췄다거나, 본격적인 농촌(농민)소설을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곽씨는 “한 작가가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 독창적 사유와 문학적 감각을 아무런 어려움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속한
생활현실 속의 언어일 수 밖에 없다”면서 “그것이 바로 염상섭 언어를 ‘관념어에서
생활어로’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는 근거”라고 설명한다.
이번 작업 과정에서 곽 씨는 횡보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여객(女客)’을 새로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그동안 발표 지면이
불확실했던 몇몇 작품의 서지(書誌)도 확인했다. 김종균(金鍾均)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염상섭 소설어사전’을 “한국소설 연구 분야의 쾌거”로 평가하고, “전문영역의 사전이야말로 현대
정보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학문 분야”라고 말했다.
(承仁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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