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업고 난을 피하였고 그 후 어버이가 등창이 나자 이를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였으며 병환이 위독하자 변을 맛보아 치료를 하니 回甦(회소)하시다 학문을 독실이 하고 몸을 예절에 따라 거동하시니 유림들이 앙모하였으며 좌상으로 추대하였다 임진란에 婦翁(부옹)의병장과 같이 전략을 세우고 적을 토벌하여 수십명의 목을 베시다 이런일이 조정에 알려져 봉정대부군자감정을 제수하시다 숙종37년 1711辛卯에 향인들이 보성군 문덕면 陽地村 梁山祠(양지촌 양산사)를 건립하고 봄과 가을로 예를 갖추어 제사지냈으나 고종5년 1868戊辰에 朝命(조명)으로 인하여 輟祀(철사)가 되자 후손 日錫 成鉉(일석 성현) 두분께서 이를 탄식하시고 遺虛碑(유허비)세울 것을 주선하셨다 1932壬申2월에 안동 金寧漢(김영한)의 글로 된 유허비가 세워졌다 승지 홍병익이 축문을 지었으며 北窓李晬(북창이쉬)가 년보의 서문을 짓고 注書任興源(주서 임흥원)이 행장을 判書 勉菴(판서 면암) 최익현이 묘비명을 지었다 1721丙午에 숭정대부 병조판서 贈職(증직)에 제수되시다 사적이 삼강록 창의록 절의록 동국문헌록 사환록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자세한 것은 양산원지에 기재되어 있다 1800庚申에 장흥 임흥원 撰行狀(찬행장) 1871辛未에 여흥 민병승 撰神道碑銘 竝書(찬신도비명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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