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선생에게 수업하여 道學(도학)으로 저명하시었다 禑王元年(우왕원년) 1375乙卯에 과거에 합격하시어 위와 같은 관직에 이르렀는데 1388戊辰의 화를 당하여 楓嶽山(풍악산)으로 피하시었으며 禑王(우왕)이 폐위되고 최영이 죽음을 당하자 남산으로 돌아오시어 사셨다 고려가 망하니 동산의 나무에 冠(관)을 걸어 놓으시고 세상을 피하시어 산중으로 들어가시니 후인들이 이로 인하여 고개 이름을 일컬었다 하며 杜門(두문)동 70諸賢(제현)과 같이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이로부터 洞名(동명)이 되었다하며 인간은 다만 伯夷叔齊(백이숙제)처럼 죽을 뿐이다 라고 하는 시가 있으며 포은정몽주 목은이색 야은길재 세분의 선생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싯귀가 있으며 社稷(사직)의 璿源譜(선원보)에 기록이 남아있다 철종3년1852壬子에 士林(사림)의 論議(논의)에 따라 나주 금강원 장성 경현사에 모시고 예를 갖추어 향사하였는데 장성 경현사가 철폐되자 보성계신 후손인 琪鐸(기탁)께서 보성청계영당에 모시고 향사한다 처조부는 박계원 병부상서, 처증조부 박지빈 문형위사경이며, 처외조부는 양천許猷(허유)로 부사를 지냈다 공이 무진년의 화를 면하였다 함은 이미 유전해온 家蹟(가적)이나 또한 이성계가 최영의 모함을 풀어 주었다는 말이 있고 두문동의 遺蹟(유적)에도 여러 현인들이 주고 받았던 시가 산재해 있으며 또한 춘정변계량이 참의공을 송별하면서 쓴 遁荒野(둔황야)란 글을 살펴보아도 무진의 화를 면하였음이 분명한데 고려사절요 33권에는 1388戊辰정월18일 癸巳일에 서성군(국보) 동지밀직(치중) 전지밀직全彬(전빈) 밀직부사安思祖(안사조) 밀직제학朴仲容(박중용) 전법판사金乙鼎(김을정) 대호군金涵 辛靖(김함 신정) 성균제주尹琠(윤전) 사헌장령金肇(김조) 호군崔遲 林孟陽(최지 임맹양) 사복정甘成旦(감성단) 전강릉부사都希慶 宦者趙元吉(도희경 환자조원길) 등 50여명을 베었는데 이는 모두 처형을 당한 임견미 등의 족당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은 우왕원년 을묘에 과거 하였다 하였으나 과방록을 상고하여 보면 을묘방이 시행되지 않았다 또한 목은 이색선생이 지었던 신도비문 가운데 충경공이 1382壬戌3월18일에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분명하지만 사기에는 1379己未에 돌아가셨다라고 되었으니 의문점이 아닐 수 없으므로 주석을 붙여 후일의 참고에 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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