隱居(은거)하시면서 학문에 힘쓰셨고 명예와 높은 지위를 구하지 않으시다 세종때 公의 높은 절개를 듣고 위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으시고 집안사람을 데리고 나주금성산아래에 避世(피세)하여 사시면서 여러 자손들과 성리학을 강론하시다 나주의 고을은 都城(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그때만해도 불교를 숭상하는 풍습이 남아서 太學(태학)에서 제사지내는 일들은 소홀히 하였으며 또한 대성전이 잡초가 우거지고 명륜당이 파괴되어 있으므로 公이 살고있는 집터에 향교를 옮기고 학문을 가르치며 예법을 익히어 문물을 빛나게 하시다 이곳이 바로 나주西門(교동)밖인데 세상 사람들이 문성공安裕(안유)와 같다고 하였다 公이 會津(회진-영산강하구)에 옮겨 사시다가 다시 新村(신촌-영산)으로 옮겨 사시니 이때부터 후손들이 이곳 나주에 살기 시작하였다 나주 금강사에서 향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