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골이 장대하고 학식이 매우 깊었다 인조1627丁卯에 文科及第(문과급제)하셨으며 이름을 赫(혁)자로 지었다 벼슬이 사헌부장령에 이르렀으며 희천 문천 북청 연안 장연등의 倅令(졸령) 등을 지내셨다 재임하였던 고을마다 훌륭한 치적을 쌓으셨으며 淸白碑(청백비)도 세워지다 甲戌에 元宗(원종)을 追崇(추숭)하여 宗廟(종묘)에 모시자고 金瑬 崔鳴吉(김류 최명길) 등이 주동이 되어 건의하였을때 公이 言官(언관)에 있으시면서 상소문을 올리고 極諫(극간)하셨으며 또 禮說(예설)을 올리셨다가 문 밖으로 축출 당하셨으나 府啓(부계)에 의하여 용서를 받으셨다 丁丑에 胡人(호인)들의 난에 三學士(삼학사) 오달제 홍익한 윤집등 여러 어진이들과 더불어 斤和(근화)를 주장하셨다 辛丑7월9일에 長淵(장연)고을 衙中(아중)에서 돌아가셨으며 효행으로 旌閭(정려)가 세워지다 野史(야사)안변읍지에 말하기를 ‘官吏(관리)가 되어서는 廉直(염직)하셨고 어버이는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위 안동김씨는 시어머니를 火中(화중)에서 구원하시려다 함께 죽으시니 효부로서 旌閭(정려)가 세워지다 행적이 安邊邑誌(안변읍지)에 기재되어 있다 그분의 아버지는 就器(취기)이시다 86대동보에 호와 묘소의 기록이 없으나 1927년 길림성 발행 족보에서 인용하여 기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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