資稟(자품)이 純實(순실)하였고 효우가 돈독하다 자친의 성품이 엄격하시지만 조금도 뜻을 거역함이 없었고 서울에서 유학을 하신 백부를 위하여 모든 경비를 다 부담하였고 조카들을 친자처럼 여기다 흉년에는 양곡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다 山陽誌 湖南三綱錄(산양지 호남삼강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광산鄭時林(정시림)이 碑陰銘(비음명)을 撰(찬)하고 松沙奇宇萬(송사기우만)이 墓誌(묘지)를 撰(찬)하였으며 죽산安圭容(안규용)이 行狀(행장)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