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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명신 청강공 염정수

파주염씨 2世祖 청강공 염정수

청강 염정수(淸江 廉廷秀, 생년미상-1388)  고려말의 문신   
榮祿大夫 司憲府大司憲 右文館大提學
(영록대부 사헌부 대사헌 우문관 대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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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정수(廉廷秀, ?-1388) -고려말의 문신-

   자(字) 민망(民望). 호(號) 청강(淸江) 또는 훤정(萱庭). 출생년도는 미상이다.
   중시조이신 곡성부원군 염제신(曲城府院君 廉悌臣)의 셋째 아들이시다.  

   관직 : 정순대부(正順大夫),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정3품) 겸판전의시사(兼判典議寺事), 지제고(知製誥), 충춘추관수찬관(充春秋館修撰官), 지전리내시다방사(知典理內侍茶房事), 영록대부(榮祿大夫), 대사헌(大司憲).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대동보 1권 13-15)

   경력 : 청강공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셨는데, 덕행(德行)이 일찍부터 현저하시었다. 목은 선생이 남기신 호기(號記, 萱庭記)가 있다. 공민왕 20년 신해(1371년) 3월 문과(文科)에 합격하시다. 과거시험때의 시험관 좌주(坐主)는 목은 이색(李穡)과 야은 전녹생(野隱 田祿生)이다. 맏형님 국보(國寶)의 1355년 급제, 둘째 형님 흥방(興邦)의 1357년 장원급제에 뒤이어서 막내 아우 정수(廷秀)가 1371년에 급제함으로써, 공민왕(1351-74)은 삼형제 모두의 과거 급제라는 염씨가문의 대경사에 대한 축복을 내리셨고, 모친 가순택주조씨(嘉順宅主趙氏)에게 늠료를 내림과 함께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했다. 청강공은 앞에 열거한 관직(官職)에 계셨다. 우왕 13년 6월에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강회백(姜淮伯) 등과 더불어 문무관(文武官)의 관복(官服)과 품대(品帶)를 정하는 건의(建議)에 주동이 되어 1품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도록 하여 품대에 차등을 표시하도록 하시다. 무진(1388년) 정월 11일에 동정공(東亭公)이 최영(崔塋)의 모함을 받아 화(禍)를 당하니 공도 또한 그 화를 면치 못하시고 같은 날 화를 당해 돌아가셨다.

  묘소는 함남 북청군 거산면 성천리(北淸 居山 城川里 後松鶴山南脈左川字中穴中麓子坐 -후송학산남맥좌천자중혈중록자좌). 비갈 있음. 1927년 길림성 발행 정묘보 참조.

  배위 : 성주이씨(配位 星州李氏), 아버지는 원구(父 元具) 성산인(星山人) 생졸미상, 묘소실전. 배위 백천조씨(配位 白川趙氏) 아버지는 득주(父 得珠) 관 전농시사(官 典農寺事), 생졸미상, 묘는 북청 거산 건위와 합봉.

  자녀 : 1남 3녀를 두었다. 외아들 치성(致誠)은 생졸미상, 관직은 좌사(左使). 경력은 우왕 14년 무진(1388년)에 화를 입어 북청(北靑)에서 귀양살이를 했고, 이곳에 머물러 천도(天道)를 즐기시며 사셨다. 조선 태종(太宗) 때에 염치성을 여러 차례 부르셨으나 끝내 사양하셨다. 염치성의 아내는 공인남양홍씨(配 恭人 南陽洪氏), 아버지는 탁 시중(父 鐸 侍中). 생졸미상. 묘 북청거산에 합봉했다. 첫째 따님의 남편은 홍의로(洪義老, 상호군/上護軍), 둘째 따님의 남편은 한계복(韓季復), 셋째 따님의 남편은 민보문(閔普文)이다(파주염씨대동보 1권 13-15쪽. 1986)

   淸江公의 셋째 사위인 민보문(閔普文)은 고려말의 문신이며 충신으로 두문동 72현중 한분이다.
   여흥인(驪興人)으로 공조전서 시 문양 민중훤(工曹典書 諡 文襄 閔仲萱)의 아들이며,  문하시중 여평군 민함계(驪平君 閔咸啓)의 손자로, 고려말에 도사(都事)를 거쳐 소윤(少尹: 正四品)을 역임하였다. 공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시중 구홍(具鴻)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 갔다가 후에 배록동(排祿洞)으로 돌아가 항절(抗節)하고 망복지신(罔僕之臣)으로 정절(靖節)를 지키며 살다가 끝내 순절(殉節)하였다. 그 절의(節義)와 청백(淸白)함이 많은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여흥민씨(驪興閔氏) 소윤공파(少尹公派)의 중시조(中始祖)이다.  묘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백령리 175-3에 상하분(上下墳)으로 모셔져 있다.

  <소윤공 행적문헌사료> :  경현사지두문동서원지 규장각려조충렬록. 승국명류표방록.려사보유.  고려명신전.고려충신일사전.  조선왕조실록.  대동기문.송경지.  부조현언지록 등

  고찰 : 성산이씨(星山李氏)의 가계도를 보면, 염정수의 장인 이원구(李元具)는 2남 3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도은 이숭인(淘隱 李崇仁, 1347-1392)이고, 둘째 아들은 이숭문(李崇文, 대호군/大護軍)이다. 그리고 첫째 따님의 남편은 이이 예의판서(李怡 禮儀判書), 둘째 따님의 남편은 염정수 좌부대언(廉廷秀 左副代言), 셋째 따님의의 남편은 김제 사헌규정(金제 司憲糾正)이다(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 한국문집총간해제 > 도은집. 확인 : 2004년 8월 26일 염태호). 그러나 이숭인의 가계도는 먼저 두 아들과 다음에 세 따님을 출생순서대로 소개했다. 그러므로 염정수가 이숭인의 매제 또는 매형 여부는 성산이씨 족보를 통해서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한다.

  한국 역대인물편의 염정수(廉廷秀)
    염정수(廉廷秀)는 고려말의 문신. 본관 서원(瑞原). 자는 민망(民望), 호는 훤정(萱庭). 곡성부원군 염제신(曲城府院君 廉悌臣)의 아들이며, 서성군(瑞城君) 흥방(興邦)의 아우이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383년(우왕 9) 지신사(知申事)로서 한때 전주(銓注)를 맡았었다.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뒤에 동지밀직(同知密直) ·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영(崔瑩) · 이성계(李成桂)에 의해서 형님 흥방(興邦)과 임견미(林堅味)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염정수는 살해 당했다. 저서에 《훤정집/萱庭集》이 있다(고려사/高麗史,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영정/ 林英正). http://www.koreandb.net

  목은 이색과 염정수(廉廷秀)
   중시조 염제신(廉悌臣, 1304-1382)의 셋째 아들인 청강공 염정수(淸江 廉廷秀)는 큰 형님 국보(國寶)와 둘째 형님 흥방(興邦)과 마찬가지로 출생년월일,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성장기에 대한 기록들이 전해오지 않는다. 따라서 염정수에 관한 문자기록 상으로 젊었을 시절의 일면을 알려주는 것은 2004년 현재를 기준으로 1986년판 염문대동보 손록에서 “목은 이색의 문하생”과 이색의 염정수를 위해 글을 썼던 훤정기(萱庭記)의 한 모습이라고 본다.

   대동보 : “염정수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셨는데, 덕행(德行)이 일찍부터 현저하시었다”(대동보 1권 13-15쪽. 파주염씨대종회, 1986).

   훤정기(萱庭記) : “민망(民望, 염정수)은 나이는 가장 적으면서도 학문(學問)은 가장 풍부하고, 또 당시 문사(文士)들과 교유(交游)함으로써 습감(濕坎, 험난한 일이 거듭난다는 뜻)의 대상(大象)이 이미 나타났다. 이 때문에 뜻이 독실하여 한만(汗漫)한데에 들어가지 않고, 행실(行實)을 힘써 허원(虛遠)한데 치달리지 않고, 돌이켜 자기 마음에 반성하여 구하되 근심하는 것도 없고, 답답한 것도 없어 오직 천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고 또 그 마음을 미루어 임금을 섬기면서, 오직 아름다운 수목과 향기로운 풀이 전야(밭과 들판)에 가득하게 되기를 바랐으니, 그의 마음가짐이 진정 심원하다 하겠다”(파주염씨대동보 1권 13-15쪽 ;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 민족문화위원회 > 한국역사정보종합시스템 > 한국문집총간 : 동문선/東文選 73권 記, 훤정기 ; 목은문고 제2권 記, 훤정기 ).

   염정수의 스승과 좌주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 본관 한산(韓山).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이제현의 문하생,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으로 성리학(性理學) 연구. 1351년(충정왕 3) 부친상으로 귀국, 1352년(공민왕 1) 전제개혁 국방강화 교육진흥 불교억제 등 당면정책을 왕에게 건의했다. 1353년 향시(鄕試)와 정동행성 향시에 장원 급제, 1354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서 회시(會試)에 장원,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 국사원편수관 등을 지내다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의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1356년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부시랑 등 인사행정을 주관, 정방을 폐지, 이듬해 우간의대부때는 3년상을 제도화했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의 남행을 호종, l등공신이 된 후 좌승선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자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책봉된 후에는 신병으로 관직을 사퇴했으나 1375년(우왕 l) 우왕의 청으로 다시 정당문학 등을 역임했다.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 사건에는 화평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유배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李成桂)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이성계가 득세하자 장단 함창 등지에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다시 여흥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조선 개국 후 인재를 아낀 태조가 1395년 한산백(韓山伯)에 책봉했으나 사양, 1396년 여강으로 가던 중 죽었다. 문하에 권근(權近) 김종직(金宗直)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 학문과 정치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371년 중 염문의 5가지 대경사
      1371년 3월 : 염정수(廉廷秀)의 과거급제.   
                         훤정기(萱庭記) : 좌주 이색의 문생 염정수 과거급제 축하문
      1371년 7월 : 염제신(廉悌臣) ‘보국/輔國’,    공민왕 친필 염제신초상화 하사
      1371년 9월 : 서북면도통사 염제신
      1371년11월 : 공민왕의 신비염씨(愼妃廉氏) 책봉. 삼형제 과거급제,
                         공민왕 축하,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1371년은 염씨 가문에 있어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이 많았던 경사스러운 해였다. 첫째는 1371년(공민왕 20) 3월에 염제신의 3남 정수(廷秀)가 과거 급제를 함으로써,  1남 국보(國寶)와  2남 흥방(興邦)의 급제에 뒤를 이어서 삼형제가 모두 과거급제(三兄弟 科擧及弟)라는 대경사가 있었다. 이는 염제신(廉悌臣)의 4부자(四父子)가 공민왕(1351-74)과 우왕(1374-88) 제위기간에 고려 조정의 중신으로서 함께 국정의 일익을 담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삼형제 과거급제자를 길러낸 모친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해졌다는 것이다. 셋째는 신돈이 집권한 이래 5,6년 동안 정계를 떠나 집에 있었던 부친 염제신(廉悌臣)이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1371년 7월에 염제신은 공민왕으로부터 친필 염제신초상화(御筆 廉悌臣肖像畵)를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11월에 넷째 딸이 공민왕의 왕비 신비염씨(愼妃廉氏)로 책봉됨으로써 염문이 고려왕실과 인척관계로 격상되었다는 것이다.  

  1371년 3월 : 염정수 과거급제(廉廷秀 科擧及弟)

  고려사 : 공민왕 20년(1371년) 3월 이색(李穡) 지공거와 전록생(田祿生) 동지공거가 진사를 뽑았으며, 6월 공민왕의 친시(親試)에서 김잠(金潛) 등 33인에게 급제시켰다(고려사 73권-志 27권-選擧 1-科目 1-048 : 恭愍王二十年三月李穡知貢擧田祿生同知貢擧取進士六月親試賜金潛等三十一人及第).

  고려사절요 : 1371년 6월 김잠(金潛)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 신해 20년, 서기 1371). 
  대동보 : 청강공 염정수는 공민왕 20년 신해(1371년) 3월에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시었다. 과거 시험관 좌주(座主)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야은 전녹생(野隱 田祿生)이었다(대동보 1권 13-15쪽 ; 고려사 73권 ; 고려사절요 29권)

  고찰 : 염정수는 공민왕 20년 과거(科擧)와 공민왕 친시(親試)에서 33명의 급제자 중 1인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염정수의 과거 급제 당시의 연령은 밝혀진 바 없다. 염정수의 1371년 과거급제는 맏형님 국보의 1355년 과거급제와 둘째 형님 흥방의 1357년 장원급제에 뒤를 이은 것으로서 3형제 모두의 과거 급제는 염문 대경사의 극치로 볼 수 있다. 이로써, 부친 염제신과 아들 3형제, 즉 4부자(四父子)가 함께 고려 조정의 중신으로서 활약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염문에 대해서 목은 이색(李穡)은 그의 시(詩)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부귀 광영을 누구라 견주리오. 세 아들이 함께 과거에 급제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일커르네”(富貴光榮誰並美, 三子登科世共暄. 인용 : 1986년판 갑자보 서문, 문헌록 6-7쪽, 동정공 19세손 염경환).

  염정수의 좌주 전녹생(田祿生, 1318-1375) :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담양(潭陽). 호 야은(野隱).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 제주사록 전교시교감을 지냈으며, 원나라 정동향시(征東鄕試)에 급제하였다. 1347년(충목왕3)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으로서 백문보(白文寶)와 함께 기삼만(奇三萬 : 奇皇后 族弟)을 옥사시켜 원나라 사신에게 국문당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서 간의 이색(李穡), 사간 이보림(李寶林) 정추(鄭樞) 등과 함께 염철별감의 폐단을 상소하고, 1361년 전중시어사를 거쳐 전라도 안찰사로 나갔다.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 공신으로 좌상시가 되고 1364년 감찰대부로서 원나라에 다녀와서 계림윤(鷄林尹) 밀직제학이 되었다. 1367년 경상도도순문사, 1371년 동지공거 대사헌을 거쳐 1373년 정당문학으로서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禑王)의 사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사 문하평리 등을 지내고 추충찬화보리공신(推忠贊化輔理功臣)이 되었다. 1375년(우왕1)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북원(北元)의 배척과 이인임(李仁任)의 주살을 청했다가 투옥된 사건에 연루, 유배 도중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숙종 때 장흥(長興)의 감호사에 배향되었고, 문집 [야은일고(絶隱逸稿)]를 남겼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야은 전록생(野隱 田祿生)의 문생 : 김잠, 이행, 윤취, 장지도, 남재, 정목, 유관, 김낙항, 김진양, 유창, 허응, 조서, 김약채, 염정수(廉廷秀) 등이다. 이들은 조선(朝鮮)의 초기에 크게 활약한 이름들이다(고려사 112권-열전 25권-전녹생 ; 野隱先生逸稿, 규장각 3136).

  훤정기(萱庭記) : 좌주 이색의 문생 염정수 과거급제 축하문
           1) 고전국역총서 동문선(東文選) 73권 : 기(記)-> 훤정기(萱庭記)
           2) 한국문집총간 목은문고 제2권 : 기(記)-> 훤정기(萱庭記)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3)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606-608쪽. 파주염씨대종회, 1986

   동문선(東文選) :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은 책. 154권 45책. 서거정(徐居正) 등의 편저. 고활자본(古活字本)과 목판본. 내용은 목록 3권, 정편(正篇) 130권, 속편(續編) 21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편은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이다. 속편은 1518년(중종 13)에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 등이 편찬한 것을 1713년(숙종 39)에 대제학(大提學) 송상기(宋相琦) 등이 개편한 것이다. 정편은 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이고, 속편은 그 이후부터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수집 정리한 것이다. 1914년에는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출판하였으나 속편이 누락되어 있다. * 민족문화 추진위원회에서 1968~70년 12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훤정기(萱庭記) : 글 이색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어찌하면 훤초(萱草, 원추리)를 얻어 저 북당(北堂)에 심을고”라고 하였는데, 해석하는 사람이 이 훤초를 망우초(忘憂草)라 하였다.

   자서(字書)에서도 훤(萱)자를 해석하면서 역시 망우초라고 하였다. 훤이라는 잊는다(忘)는 뜻이니 곧 근심을 잊는 것이다. 훤자가 선(宣)자를 따라 써진 것은 그 답답함을 풀어버린다(宣)이다. 마음이 답답한 것이 있을 때 이를 풀어버리면 통하게 되고, 마음에 근심이 있을 때 이를 잊어버리면 즐거워지며, 어버이에게 효순(孝順)하여 어버이도 또한 즐거워지고, 마음이 통하게 되면 이것이 천지에 통하여 천지가 화평해지는 것이니, 천지가 화평해지고 부모가 즐거워진다면 요순(堯舜)이 만방의 백성들까지 화락(和樂)하게 했던 다스림도 여기에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치의 소재를 찾아보면 상(象)에 나타나있고, 그 상의 소재를 찾아보면 원추리(萱草)에 나타나 있다. 원추리란 하나의 미물이요, 훤은 하찮은 글자 한 자에 불과하지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밝게 나타나있고, 정체(政體, 정치하는 방식)와 국풍(國風, 나라의 풍속)에 관계가 크므로, 내가 항상 이 시(詩)를 읽고 완미하면서 동지들과 더불어 강론할 것을 생각해 온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자(字)가 민망(民望)인 문생 염정수(門生 廉廷秀)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큰 형님(국보)은 거소를 국파(菊坡), 둘째 형님(흥방)은 그 거소를 동정(東亭)이라고 호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불초 제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아들 3형제가 급제했다는 이유로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나라에서 어머니에게 늠료(凜料=상금)를 내리셨으니 우리 형제들은 힘을 같이 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무릇 거처하고 동작하는데 있어 서로 보고 서로 책망하여 오직 착하게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장차 훤정(萱庭)이라고 호를 할까 하오니, 선생님께서는 대략 그 뜻을 서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짐짓 시경의 말을 인용해서 대략 그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었는데, 거듭 여기에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천지(天地)는 기(氣)인데, 사람과 물건은 이 기를 받아 태어나서, 무리로 나누고 같은 것끼리 모이며, 습한데로 흐르고 마른데로 나아가서, 겉으로는 마치 어지러히 헝크러진 것 같지만 그 속은 실상 질서가 있고 빛나서 윤리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사군자(士君子)가 젊어서는 글을 읽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천하에 사리가 밝게 터득될 것이고, 장성해서는 임금을 섬기어 사물을 다스리면 천하의 사리가 아주 평탄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그토록 평탄한데 무엇이 나의 기를 더럽히겠으며, 그렇게 화락한데 무엇이 나의 마음을 상하겠는가. 화평하여 이치가 순조롭고 시원하게 의심이 풀어버린다면 어찌 털끝 만큼이나마 그 가운데 어긋나는 것이 있겠는가.

   민망(民望)은 나이는 가장 적으면서도 학문은 가장 풍부하고, 또 당시 문사(文士)들과 교유(交游)함으로써 습감(濕坎, 험난한 일이 거듭난다는 뜻)의 대상(大象)이 이미 나타났다. 이 때문에 뜻이 독실하여 한만(汗漫)한데에 들어가지 않고, 행실을 힘써 허원(虛遠)한데 치달리지 않고, 돌이켜 자기 마음에 반성하여 구하되 근심하는 것도 없고, 답답한 것도 없어 오직 천지를 섬기는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고 또 그 마음을 미루어 임금을 섬기면서, 오직 아름다운 수목과 향기로운 풀이 전야(밭과 들판)에 가득하게 되기를 바랐으니, 그의 마음가짐이 진정 심원하다 하겠다. 시경 위풍 백혜(詩經 衛風 伯兮)의 맨 수장(首章)에 “당신이 무용(武勇)이 있으니, 이 나라의 호걸이로다” 하지 않았는가. 그 “이 나라의 호걸”이라는 것은 무슨 특별한 재덕이 있는 것을 말한 게 아니라, 오직 부모에게 효순하고 천지에 마음이 통해서 몸소 직접 요순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것 뿐이니, 민망은 힘쓸지어다(동문선/東文選 73권-기/記 훤정기 ; 목은문고 2권-기/記 훤정기 ; 파주염씨대동보 1권 13-15쪽).

   훤정기(萱庭記)  한국문집총간 : 동문선/東文選 73권, 목은문고 제2권 : 기(記)
   詩曰。焉得萱草。言樹之背。釋之者曰。忘憂草也。字書 釋萱。亦曰。忘憂草也。諼之言。忘。忘其憂也。萱之從宣。 宣其鬱也。有鬱于心而宣之則通。有憂于心而忘之 則樂。樂則順乎親而親亦樂。通則通于天地而天地 以平。天地之平。父母之樂。堯舜時雍之理。所以不可及也。求其理之所在。則著於象。求其象之所在。則見 乎萱。二物微矣。一字末矣。而天理人情之昭著。政體 國風之關係。予嘗讀而玩之。思與同志講之久矣。一日。門生廉廷秀字民望來曰。吾伯氏號其居曰菊坡。仲氏號其居曰東亭。予以不肖。僥倖科第。三子之故。援例廩母。吾兄弟三人。同氣同心。凡所以居與動也。相勸相責。惟善之歸。竊不自量。將以萱庭。號吾所居。願先生略述其義。子故引詩而略訓其字。重爲告曰。天地。氣也人與物受是氣以生。分群聚類。流濕就燥。外若紛揉。而內實秩然粲然。倫理未嘗紊也。士君子少也讀書而格物。則天下之事理致其明。壯也事君 而理物。則天下之事理歸于平。蕩蕩也何累於吾氣 愉愉也何傷於吾心。怡然理順。渙然氷釋。夫豈有一 毫之齟齬於其間哉。民望年甚火。學甚富。又與當世文士游。習坎之大象著矣。是以。志之篤而不入於汗漫。行之力而不馳於虛遠。反而求之心。無所憂無所鬱。惟以事天地事父母而移之於君。直欲使嘉禾朱 草遍于田野。其操心可謂遠矣。首章不云乎。伯兮伯兮。邦之桀兮。邦之桀。非有他才德也。順乎父母。通乎 天地。身親見堯舜之理而已。民望勉諸。

   1382년 3월 : 염제신 별세, 동정집, 염국보 서성군, 염정수 대사헌

   고려사 : 염제신은 별세할 때 향년 79세였다. 염제신의 아들은 국보(國寶), 흥방(興邦), 정수(廷秀)였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염흥방은 자기 전기(傳記, 동정집/東亭集)가 있다. 염국보(廉國寶)는 서성군(瑞城君)으로 봉하였다. 염정수(廉廷秀)는 벼슬이 대사헌(大司憲)까지 지내었다(고려사 111권 열전 24 염제신).

   1383년 : 승정원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
    고려사 : 우왕 9년(1383년)에 염정수(廉廷秀)는 지신사(知申事)로서 한때 전주(錢柱)를 맡았다(고려사 111권 열전 24 염제신).

   고찰 : 청강공은 일찍이 훤정(萱庭)이라고 호를 하여 노친(老親, 부친 염제신과 모친 안동권씨)을 기쁘게 하였으며,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을 하면서 왕명(王命)의 출납을 맡았고, 때로는 현사(賢士)들과 종유(從遊)하며 궁리(窮理) 격물(格物)의 학문(學問)에 공력(功力)을 쏟았으니, 목은 이색(李穡)의 시(詩)와 둔촌 이집(李集)의 시(詩)와 서문(序文)을 보면 알 수 있다(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77-179쪽, 1986 ; 1849년판 곡성염씨세고/曲城廉氏世稿書).

   1383년 : 성균시 시관(試官) 염정수
   고려사 : 1383년 4월에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는 우홍명 등 99명을, 명경 6명을 선발하였다(고려사 74권-지 28-선거 2-과목 2-국자시지액/國子試之額-020 : 辛禑九年四月知申事廉廷秀取禹洪命等九十九人明經六人).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 

   스승 이색의 문생 염정수의 시관에 대한 축하 글과 노래
   나의 문생 염정수(門生 廉廷秀)가 성균시 시관(試官)을 맡았는데, 그는 곧 정승 예천 권공(政丞 醴泉 權公-권한공/權漢功)의 외손자다. 나는 성균시의 좌주였던 송정 김선생(松亭 金先生)이 문려준 서대(犀帶)를 그에게 물려주었는데, 송정은 또 이것을 예천 권정승(權政丞)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단가(短歌)를 읊게 된 것은 이 늙은이의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며 선배들이 남긴 업적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국가가 원기(元氣)를 짝하여 사문(斯文)이 정맥(正脈)을 전하였도다.
   저 훌륭하신 우리 광종께서 처음으로 시서(詩書)의 늪을 개척해 놓으사
   점차로 단계의 숲에 젖어드니 향기 은은하고 바람 이슬 깊기도 해라
   뭇 인재들은 국가의 동량이 되어 혁혁하여 고금에 빛이 나도다.
   좌주께선 다행히 아직 건강하시고 문생은 풍채가 화평도 하네
   좌주는 문생을 맞이하여 한창 기뻐하며 칭찬을 하였도다.  
   무엇으로 그 진심을 표하는가 하면 무소 가죽으로 만든 붉은 띠라네
   두 번 절하고 그 띠를 받으니 모두들 세상에 드문 영광이라 말하네.
   무엇이 다르랴, 늙은 부모가 자식이 훌륭한 임금 만난 걸 기뻐하는 것과
   하루 아침에 문생들을 거느리고 풍악 잡히고 수주를 따르네.
   내 또한 다행스럽게도 세 번이나 과거 시험관이 되었는데
   어찌 알았으랴, 가장 연소한 사람이 문생들을 거느리고 올 줄을
   이 때문에 내가 붓을 들어 폭풍우처럼 거침없이 시를 쓴다오.
   이 성대한 일 끊임없이 서로 전하면 항상 천지와 함께 길이 보존되리.(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211-214쪽, 1986)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목은시고 제26권 :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
 菊齋權政丞。集光廟設科以來座主壯元姓名爲一卷。又集父子孫相繼掌試者及座主無恙。門生掌試者。爲圖於後。題其目曰桂苑錄。四百餘年文會之盛。粲然在目。門生座主恩義之全。足以培養國家之元氣。而詩書之澤。詞翰之華。雖百世可無替也。柳中贊璥之掌試也。其座主任平章景肅。解所帶烏犀 紅鞓以帶之曰。卿門下有如卿者出。方知吾今日之心矣。其以此帶與之。此又紅鞓授受之所起也。距今癸亥。一百二十餘年。而吾門生廉廷秀掌試成均。醴泉政丞權公之外孫也。予以成均座主。松亭金先生所留犀帶與之。松亭所親受於醴泉者也。吟成短歌。老夫之至幸也。先進之餘烈也。歌曰

國家配元氣。斯文傳正脈。穆穆我光廟。肇泒詩書澤。浸漬丹桂林。香浮風露深。群村作棟樑。赫赫光古今。座主幸無恙。門生風彩暢。庭謁領門生。座主方喜賞。何以表眞情。犀銙映紅鞓。再拜荷珍錫。人曰稀世榮。何異老父母。驚喜子遭遇。一旦領門生。張樂斟壽酒。伊我亦幸哉。三見文闈開。何期最少者。乃率門生來。所以動我筆。題詩風雨疾。相傳庶無墜。當與天地畢。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1384년 3월 : 밀직사지신사 염정수

   문경공 사제문(文敬公 賜祭文) : 유항 한수(柳巷 韓脩)

    동사강목 : 1384년 3월에 판후덕부사 한수(判厚德府事 韓脩, 1333-1384)가 별세하였다.
    한수(韓脩)는 학행(學行)으로 세상에서 중히 여김을 받았으며 또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유항집(柳巷集)》이 세상에 전한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6권 하 우왕 10년 > 한국문집총서 > 유항집.
http://210.90.62.195/M/jsp/index_m.htm).

   한수(韓脩, 1333-1384) : 고려시대의 문신 명필. 본관 청주(淸州). 자 맹운(孟雲). 호 유항(柳巷). 시호 문경(文敬).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 충정왕 때 정방필도치(政房必闍赤)가 되고, 왕이 손위(遜位)하고 강화도로 쫓겨갈 때 왕을 시종하여 사람들의 숭앙을 받았다. 공민왕 때 재차 필도치가 되었고, 신돈(辛旽)을 경계해야 한다고 왕에게 밀계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전직되었다. 1371년 신돈의 사후 이부상서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에 기용되고, 우승선(右承宣)에 올랐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제학(密直提學)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올랐으나, 앞서 공민왕을 시해한 한안(韓安)의 친척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이 되고, 이어 청성군(淸城君)에 개봉(改封)되어 후덕부판사(厚德府判事)에 이르렀다. 식견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유항시집(柳巷詩集)》이 있고,  그리고 글씨로는《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개성)《안심사사리탑비(安心寺舍利塔碑》(영변)《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양주) 등이 있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참고 :  염제신 별세 후 충경염공신도비 건립 때 왕명에 의해 이색이 글을 짓고, 붓글씨는 문경공 유항 한수가 쓴 것이다.

   문경공 사제문(文敬公 賜祭文) : 유항 한수(柳巷 韓脩)
   파견 밀직지신사 우문관제학 춘추관수찬 염정수 제사를 지내다.(遣 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春秋館修撰 廉廷秀致祭)
   왕(王)은 말하노라. 생(生)과 사(死)의 이치는 음양과 통하나니 이것은 사람의 정상적인 길이요. 왕과 신하의의 義는 처음과 끝이 견고하니 국가의 일정한 규칙이다. 하물며 친히 섬긴 스승이요, 거유(巨儒)니 특별히 사례를 가해야 할 것이다.

   고인(故)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 한수(韓脩)는 학문은 염락(廉洛)의 전통을 이어 받았고 필법(筆法)은 왕희지(王羲之)를 이었다.

   일찍이 선고(先考, 공민왕)의 명을 받아서 곧 대언(代言)의 직책을 맡았으니 임금께 고하면 반드시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을 말하였으므로 신중히 동료 중에서 선택하여 나의 스승으로 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가르치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재앙을 내리니 나는 많은 고난을 이길 수 없었다. 중간에 변고를 만나 폐척되어 한가한 땅에 있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등용되어 반드시 도유(都愈)의 정치를 이루리라 했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우리 집안을 돕지 못하는구나. 말이 여기에 미치니 마음이 아프고 슬픔이 한이 없다.

   이제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우문관제학지제교(右文館提學知製敎) 충춘추관수찬관(充春秋館修撰官)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염정수(廉廷秀)를 술을 주어 보내 奠(제사 지내다)하게 하노라.

   아 !, 기를 모으고 흩어짐에 경(卿)은 물화(物化)를 따라 선뜻갔지만 노성(老成)한 사람이 없으니 나는 나라가 병들 것을 생각하니 슬프도다. 지금도 곧은 넋이 나의 마음의 글월을 받아줄 줄 믿는다. 이와 같이 교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모두 알지어다( 1) 동문선 제24권 : 교서/敎書 ; 2) 양촌집 > 양촌선생문집 제 30권 > 교서류 > 교서 판후덕부사 한수(敎 判厚德府事 韓脩) ; http://www.hanssi.pe.kr/sang-b25.htm ).

  양촌선생문집 제30권 : 교서류  판후덕부사 한수에게 내리는 교서
  王若曰死生之理通乎陰陽是人物之常道君臣之義篤於終始爲國家之恒規矧所事之師儒宜特加於恩禮故 輸忠贊化功臣匡靖大夫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韓脩學傳廉洛筆繼鍾王早承先考之知久荷代言之職入告于后必陳經世之謨愼簡乃僚受傳子之命玆以幼沖之年獲聞敎誨之言何其天不弔以降災子靡堪於多難中罹變故雖廢斥以投閑終謂登庸必都愈而致理胡不幸而短命乃莫相於我家興言及玆痛悼無己今遣密直司知申事右文館提學知製誥充春秋館修撰官知典理司事廉廷秀賜酒往奠嗚呼氣有聚散卿隨物化而不疑人無老成 予念邦瘁而有慼 尙期貞魄應此寵章故玆敎示想宜知悉
(
http://hansroots.net/sang3a-14-4.htm)

   1384년 10월 : 지신사 염정수와 문하시중 최영

   고려사 : 1384년 9월 우왕이 활과 화살을 차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닭과 개를 쏘고, 마침내 진헌반전색(進獻盤纏色)에 달려 들어가서 좋은 말 5필을 취하여 내구로 돌려보냈다. 최영(崔塋)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고, 이성림(李成林)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삼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우왕이 수시중 임견미(守侍中 林堅味)의 욕심 많은 것을 미워하여 매양 그 아들 임치에게 일깨워 주었더니, 임견미가 병을 칭탁하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영삼사사 이인임(領三司事 李仁任)과 판문하부사 최영(判門下府事 崔瑩), 시중 조민수(侍中 曹敏修)가 또한 모두 물러가기를 청하여, 우왕의 뜻을 살펴보았더니, 이인임은 영삼사로 그대로 두고 홍영통을 판문하로 삼았으며, 조민수는 파면하여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삼았고, 임견미는 평원 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삼았으며, 최영과 이성림으로 이를 대신케 하였다. 또 환관 김실(金實)로 문하찬성사상의를 삼으니, 실이 도당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1384년 겨울 10월에 최영(崔塋)이 도통사(都通使)를 사직하려고 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최영(崔瑩)이 두 번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면서부터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도 도통사의 도장을 봉하여 올리고 군사의 권한을 놓기를 청하였다. 우왕이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를 보내 위로를 하고서 일보기를 권면하여 복무하게 하였다. 최영(崔瑩)이 도당에 이르러 여러 재상의 겸병하는 폐단을 극도로 말하고 드디어 문안을 갖추어 침탈하는 것을 금지하며, 여러 재상을 보면서 말하기를, “이 문안에 서명한 뒤에도 다시 전과 같이 할 사람이 있을까” 하니, 여러 재상들이 말이 없었다(고려사절요 제32권-신우 3년 1384년 ; 고려사 113권 열전 26 최영).

   1385년 : 지신사 염정수

   고려사 : 1385년 7월에 좌사의대부 이지(李至) 등이 상소하여 놀고 사냥하는 것을 간하였다. 이에 우왕이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로 하여금 그 글뜻을 해석하게 하고 문득 크게 화를 내면서 “바야흐로 위난한데, 이 무리들이 나에게 말달리기를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불충(不忠)한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있으랴. 마땅히 철저히 징계하여 써 말하는 자를 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재상(宰相)이 서로 보고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뒤에 우왕이 간관(諫官)의 모두 이름을 다 써서 간직하며 말하기를 “이런 무리는 하여금 가히 왜적을 막게하여야 한다” 하니 이로부터 간관이 병을 칭탁하는 이가 많이 있었다(고려사 135권 열전 48 신우 3 ; 고려사절요 제32권-신우 3, 을축 신우 11년, 1385).

  고려사 : 우왕이 임견미(林堅味)의 과도한 탐오를 좋지 않게 여기고 여러 차례 그의 아들 임치에게 암시를 주었다. 그래서 임견미가 병을 이유로 퇴직을 청하였으므로 우왕이 그것을 허가하고 평원부원군으로 봉했으며,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를 보내서 궁중에서 빚은 술을 주며 위로하였다(고려사 126권 열전 39 임견미/林堅味).  

  고려사 : 1385년 우왕이 마암(馬巖, 말바위)에서 강무하는 것을 보면서 친히 말을 타고 사격을 하고 술에 취하여 저물게 정비궁(定妃宮)에 돌아왔다. 그리고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로 하여금 술을 무예도감에게 하사하였다. 우왕이 “과거에 이빈(李斌)과 성중용(成仲庸)을 벌 준 것은 이것이 국가대사이요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니 경들은 힘쓸지어다”라고 유시를 하였다(고려사 135권 열전 48 신우 3).

   1387년 6월 : 염정수 등의 문무관복 품패 건의

  고려사 : 1387년(우왕 13) 6월에 청강 염정수(淸江 廉廷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호정 하륜(河崙), 이숭인(李崇仁) 강회백(姜淮伯) 등과 더불어 원나라 때 의복제도를 고쳐서 명(明)나라 의복제도로 문무관(文武官)의 관복(官服)과 품대(品帶)를 정하는 건의(建議)에 주동이 되어 1품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모(紗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도록 하여 품대에 차등을 표시하도록 하시다(대동보 1권 13-15쪽. 1986 ; 고려사 117권 열전 30권 정몽주 ; 동사강목 16권 하)

   통정공 강희백 : 정몽주(鄭夢周), 하륜(河崙), 염정수(廉廷秀), 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건의하여 오랑캐의 복장(胡服)을 개혁을 하여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게 하였다(강회백/姜淮伯)
http://user.chollian.net/~bagsagong/bimun/tongj/hebaeg_haeng.htm

   1387년 6월 : 명나라 방식의 문무관복 착용

   고려사절요 : 1387년 6월 백관(百官)의 관복(冠服)을 정하였다.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입고 그 품대(品帶)도 차등(差等)이 있었다. 이 의논을 주장한 사람은 정몽주(鄭夢周), 하륜(河崙), 염정수(廉廷秀), 강희백(姜淮伯), 이숭인(李崇仁) 등이다. 백관이 바뀌어진 관복을 입고 (중국사신) 서질(徐質)에게 보였다. 서질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착용할 줄 생각지 못했습니다. 천자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면 어찌 가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우왕과 환관 및 총애받는 신하들만 입지 않았다. 이옥(李沃)은 좌상시로 호복(胡服)을 입고 매를 부르며, 우왕을 따라 달리고 쏘았다(李沃 以左常侍 胡服呼鷹 從禑馳射
http://blog.naver.com/lyh275.do?Redirect=Log&logNo 고려사절요 32권-신우 13년/1387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의 이옥(李沃) : 성현은 조선 성종때 학자, 호는 용재 또는 허백당(虛白堂). <용재총화>의 정절공 이옥(靖節公 李沃)에 관한 기사(記事).
   “이옥(李沃)은 시중 이춘부(侍中 李春富)의 아들인데, 시중이 목을 베이자 이옥은 강릉부의 병졸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 왜구가 동해에 몰려와 주군(州郡)을 약탈하니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피하였다. 부(府)의 앞뜰에 큰 나무가 많았는데 이옥이 밤사이에 사람을 시켜 화살 수백개를 나무에 꽂아 놓았다. 이튿날 상복을 벗고 말을 달려 해구로 나가 몇개의 화살을 적에게 쏘고는 거짓 패한 체하면서 나무 사이로 달려 들어가니 왜적이 구름과 같이 몰려왔다. 혼자서 당해내는데 꽃혔던 화살을 뽑아 쏘며 종횡으로 달리며 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전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나 시위를 헛되게 당기지 아니하여 쏘기만 하면 반드시 맞으니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이 군의 지경을 범하지 못하여 한 도(道)가 그의 힘으로 편안하니 조정이 가상히 여겨 벼슬을 내렸다.
(http://blog.naver.com/lyh275.do?Redirect=Log&logNo=60000757884).

   자료 참고 : '대종회종보(신문) 제13호 3면 용재총화'.

   동사강목 : 백관의 관복(冠服)을 정하였는데, 중국 제도를 썼다. 이보다 먼저 본국에서 여러 번 의관(衣冠)의 제도를 청하였었는데, 이때 이르러 사신으로 들어간 설장수가 황제가 내린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입고 와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관복의 제도를 알게 되었다. 이 때에 정몽주(鄭夢周)ㆍ하륜(河崙)ㆍ염정수(廉廷秀)ㆍ강회백(姜淮伯)ㆍ이숭인(李崇仁) 등이 백관의 관복을 정하기를 청하여, 1품(品)에서 9품(品)까지 모두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띠도 품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서질이 보고 감탄하기를,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冠帶)를 습용(襲用)하니, 천자가 들으면 어찌 가상히 여기지 않으랴?” 하였다. 우(禑)와 환자(宦者), 그리고 행신(倖臣)들만 그렇게 입지 않았다(동사강목 제16권 하 : 정묘년 우왕 13년 6월).

   1387년 : 우왕. 임견미와 지신사 염정수
   고려사 : 우왕이 임견미(林堅味)의 과도한 탐오를 좋지 않게 여기고 여러 차례 그의 아들 임치에게 암시를 주었다. 그리하여 임견미가 병을 이유로 퇴직을 청원하였으므로 우왕이 그것을 허가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를 보내서 궁중에서 빚은 술을 주며 위로하였다. 미구에 다시 임견미는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또 이성림 등과 실록(實錄) 편수(編修)를 제조(提調)했다(고려사 126권-열전 39권-임견미).

  1387년 : 염정수 동지밀직, 대제학, 저서 훤정집
  청강공은 그후 벼슬이 동지밀직(同知密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둘째 형님 흥방과 임견미(林堅味) 등이 제거된 1388년 무진참화때 청강공도 함께 별세하셨다. 저서에는 [훤정집/萱庭集]이 있다(문헌록, 1986).

  1388년 1월 무진참화 : 삼사좌사 염흥방, 대사헌 염정수
  고려사 : 우왕 14년(1388) 1월 삼사좌사 염흥방(三司左使 廉興邦)과 영삼사사 임견미(林堅味), 찬성사 도길부, 우시중 이성림, 찬성사 반복해, 대사헌 염정수(大司憲 廉廷秀), 지밀직 김영진, 밀직부사 임치 등을 옥에 가두었다(고려사 137권 열전 50 신우/辛禑 5 창/昌 : 126권 열전 39 임견미).

  사헌부 대사헌 : 공민왕 18년에 어사대(御史臺)를 다시 사헌부(司憲府)라 칭하고 대부를 고쳐 대사헌(大司憲, 정2품)이라 하고 집의를 혁파하였으며 지사 겸지사(知事 兼知事)를 두어 종3품으로 하고 장령을 시사(侍史)로 고치고 지평을 잡단(雜端)으로 고쳐 종5품으로 낮추었고 겸규정(兼糾正)을 더 두었다(고려사 76권-지/志 30권-백관/百官 1)

   1388년 1월 : 순군에서 조사와 국문
   고려사 : 순군이 흥방 등의 죄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으니, 우왕이 크게 노하여 전 평리 왕안덕을 도만호로, 지문하 이거인을 상만호로, 공정왕(조선 2대 정종)을 부만호로 삼아서 다시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밀직부사 임치는 총각때부터 우왕을 친근히 시종하여 우왕이 놀이하러 드나들 때면 반드시 수행하였고,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부사로 승진한 이후부터는 늘 궁중에 입직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강제로 자기 집에 돌려보냈다. 찬성사 왕복해는 성(姓)을 주어 아들을 삼았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최영과 함께 숙위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복해가 다른 뜻이 있어서 돌격 기마대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성을 순찰한다는 핑계로 최영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갔다. 최영이 갑옷을 입고 호상에 걸터앉아 부하 장수들을 지휘하여 눈을 부치지 않으니 복해가 해치지 못하였다(고려사절요 제33권-신우 4, 무진 신우 14년. 1388년 ; 고려사 126권 열전 39 임견미).

   1388년 1월 : 사형, 재산적몰, 토지와 노비 반환
   고려사 : 1388년 정월 병술일에 염흥방(興邦) 임견미 도길부 이성림 염정수(廷秀) 반복해 김영진 임치를 사형에 처하고, 족당인 찬성사 김용휘, 삼사우사 이존성, 판개성 임제미, 밀직 홍징(洪徵) 임헌(任獻) 박인귀 반덕해 이희번, 개성윤 정각, 전법판서 이송(李悚), 우시중 반익순, 우사의 신권, 대호군 신봉생, 집의 이미생, 좌랑 홍상연, 판내부시사 김만흥 등을 베고, 드디어 견미 등의 집을 적몰하였다. 그리고 여러 도에 찰방(察訪)을 나누어 보내어 빼앗겼던 토지와 노비를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고려사절요 제33권-신우 4, 무진 신우 14. 1388년 ; 고려사 126권 열전 39 임견미 ; 무진지화에 대한 자료보기).

  고찰 : 무진(1388년) 정월 11일에 동정공(東亭公)이 최영(崔塋)의 모함을 받아 화(禍)를 당하니 공(염정수)도 또한 그 화를 면치 못하시고 같은 날 화를 당해 돌아가셨다(대동보 1권 13-15쪽. 1986).

   불교 탑비에 기록된 청강공 염정수
   정순대부 염정수(正順大夫 廉廷秀) : 평북 영변군 북신현면 안심사에 우왕 10년(1384년) 갑자에 세워진 지실, 나옹, 사리석종비에 보면 우바새(출가하지 않고 집에있는 남자 신도)로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 중대광 문하찬성사 판전예사사 성균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염흥방(廉興邦)(중대광 종1품), 같은 비에 정순대부 염정수(正順大夫 廉廷秀)라고 명기되어 있다(고려말 우리 선조분들과 선승. 염종환. 파주염씨종보 제9호 2면. 1996년 11월).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 :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우왕 9년 계해년, 1383)에도 좌사 염흥방 지신사 염정수(左使 廉興邦 知申事 廉廷秀)로 두 분의 기록이 있다(고려말 우리 선조분들과 선승. 염종환. 파주염씨종보 제9호 2면. 1996년 11월).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 : 수원 일동면 선교리 소재 창성사지에 있는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국보 제22호)에도 삼사좌사로 동정공이 지신사로 청강공(三司左使 廉興邦 知申事 廉廷秀)이 있는 것으로 보아 2세 두분 선조께서도 불문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고려말 우리 선조분들과 선승. 염종환. 파주염씨종보 제9호 2면. 1996년 11월)

  청강공 염정수의 삶과 죽엄
   1388년 무진참화 당시 청강공 염정수께서 고려사 기록에 둘째 형님 흥방께서 문하시중 최영의 모함으로 연루되어 사형했을 때 맏형님 염국보와 매제 홍징(洪徵) 등과 함께 피화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전혀 달리, 청강공이 별세 후 세워진 청강공사적(淸江公事蹟)에 무진참화때 사망이 아니고 북청(北靑)에서 살고 있다가 별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조선왕조실록]의 세종(世宗)조의 허조(許稠)에 관한 기록 중 청강공이 무진참화 때에 별세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고 있다. 한편 고려사 열전의 임견미 편을 보면 무진참화 당시에 별세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청강공사적’ 및 ‘조선왕조실록 세종조’를 소개하려고 한다.

   청강공사적(淸江公事蹟)
   공의 휘는 정수이고, 호는 청강이며 또는 훤정이라고도 하는데, 충경공의 셋째 아들이다. 목은 이색 선생에게 학업을 닦았다. 목은 선생이 일찍이 칭찬한 시에, “뛰어난 풍류는 옥수/玉樹와 같도다”라고 하였고, 또는 “제자가 임금 돕는 걸 눈으로 보겠구나”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덕망이 당세에 으뜸이었음을 알겠다.

   공민왕 20년(1371년) 3월 김잠(金潛)의 과방(科榜)에 급제하였는데, 좌주(座主)는 목은 이색 선생과 야은 전록생 선생이었다. 벼슬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지신사겸판전의시사(密直知申事兼判典儀寺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지제교(知製敎) 춘추관사(春秋館事) 지전리내시다방사(知典理內侍茶房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호정 하륜(浩亭 河崙) 등 제현들과 함께 백관의 관복(官服)과 품대(品帶)를 의논하여 개정하였다. 청강은 무진년에 화를 당하여 북청(北靑)으로 귀양갔는데, 조선에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하여 청강공을 특별히 불러서 정승(政丞)에 임명하였으나 청강공은 극력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청강공이 작고하자 조선의 태조가 예관(禮官)을 보내서 치제(治祭)하고 북청의 거산(巨山)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그리하여 청강공의 후손들은 아직도 북청(北靑)에서 살고 있다. 청강공의 문집 훤정집(萱庭集)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 오지 않는다. 다만 청강공의 시(詩) 해인사운(海印寺韻) 1수와, 뒤의 청강시고에 소개할 “이색”, “이숭인”, “이집”, “정도전”과 나눈 시들이 남아있다(문헌록 506-507쪽, 기타).

   고찰 : 청강공사적에는 염정수가 무진참화 이후 북청으로 귀양갔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공을 최대한 예우하려 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청강공의 사형건은 언급이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는 허조(許稠)의 과거때 시관(試官)이던 염정수(廉廷秀)께서 고려사의 기록처럼 사형을 당한 것으로 재확인 되었다.

   은문 염정수(恩門 廉廷秀)-문생 허조(門生 許稠, 1369-1439)
   세종실록 : “28일 좌의정 허조(左議政 許稠)가 사망했다. 허조(許稠)는 경상도 하양현(下陽縣) 사람인데, 자는 중통(仲通)이다. 나이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뒤에 은문 염정수(恩門 廉廷秀)가 사형을 당했는데(1388년), 문생(門生)과 옛부하이던 아전(故吏)들이 감히 가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허조(稠)는 홀로 시체를 어루만지며 슬피 울고, 관각을 준비하여 장사지냈다”(조선왕조실록 세종 실록 87권 21/12/28 ; 대동보 문헌록 1144쪽, 1986 ).

   염정수의 문생 허조(許稠, 1369-1439년) : 조선조 세종때 문신으로 자는 중통, 호는 경암(敬庵),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하양(下陽)이다. 양촌 권근(陽村 權近)에게 학문을 배우고, 1385년 17세에 진사, 19세에 생원에 각각 합격하였다. 허조는 사헌잡서(司憲雜瑞), 완산판관(完山判官), 사조정랑(史曹正郞)을 지내고 예조참의에 이르러 소(疏)를 올려 학당을 세웠다. 조묘(朝廟)의 의예(儀禮)와 모든 상제(喪制)를 참작하여 새법전을 만들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허조는 예조판서가 되어 대마도인(對馬島人)의 출입을 제안하고 불법입국으로 안치되어있는 왜인을 돌려보내기를 요청하였으며, 진하사로 명나라에 출입하는 등 외교적인 활약을 많이 하였다.

(http://museum.yu.ac.kr/center/index_minsok.htm 민속학술정보센터. 인물사). 허조(許稠)는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훌륭한 치적을 나타냈다.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이르렀는데, 법령에 한결 같았다. 세상에서 어진 정승(賢相)을 일컬을 제는 허조(許稠)와 황희(黃喜)를 우두머리로 친다. 세종(世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7 하양현)

  세종 때 현감부인인 감동(甘同)이란 여인이 왕자를 비롯, 정승에서 말단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38명과 간통한 사건이 나라 안을 뒤흔들었을 때 조정에서는 폐창에 합의를 도출했었다. 이에 누구보다 앞장설 것으로 기대했던 깐깐한 허조(許稠) 대감이 유일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면 숨어서 사가(私家)를 침범할 것이 자명한 일이라 했고 세종대왕도 이에 따랐다 한다. 이보다 앞서 태종 11년에도 조정에서 폐창 논의가 있을 때 정승·판서 거의가 폐창을 지지했다. 오로지 하륜(河崙)만이 법이 금한다 해서 사라지지 않을 사안이라 하여 반대했고, 정치에서 법보다 인성에 비중을 더 두었던 태종은 이 하륜의 의견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노랑꽃과의 전쟁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410/200410100296.html

   청강시고(淸江詩稿)
   청강시고에 나오는 염정수 본인의 유일한 작품으로 남겨진  “합천 해인사” 시 1수,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 2수,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의 시 4수, 둔촌 이집(遁村 李集)의 시 3수는 1986년판 대동보 문헌록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2004년도에 새로 찾아진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의 염정수에 관한 시 1수와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염정수에 관한 시 2수를 더 보태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들 중에서 “민망(民望)의 시에서 차운한다”라는 7편의 시들이 들어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공이 “합천 해인사” 라는 시 이외에도 당대의 명사들이 공의 시운을 따서 시를 지을 만큼 많은 시를 썼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염정수 어르신의 그러한 자작시들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2004. 염태호)

   염정수(廉廷秀) : 합천 해인사(題 陜川 海印寺) 

山寺春晴絶點埃
道情詩思渺難裁
洞中花色如鋪錦
橋下溪聲似轉雷
碁閣苔封餘古字
月峯松老有荒臺
孤雲一去今千載
羞對仙蹤倒酒盃

산사춘청절점애
도정시사묘난재
동중화색여포금
교하계성사전뢰
기각태봉여고자
월봉송노유황대
고운일거금천재
수대선종도주배

개인 봄 산사에 티끌 한 점 없어
도심과 시사를 억누르기 어렵구나
골 가운데 꽃빛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다리밑 시냇소린 우레가 구르는 듯
누각에 이끼 낀 체 옛 글자 남아있고
달 뜨는 봉우리 노송사이엔 황량한 대각있네
고운(최치원)이 떠나간지 1천년이라
신선 자취 마주하며 술잔 기울기 부끄럽네

        (1986년판 대동보 문헌록,971-2쪽 ; 신증동국여지승람 30권 경상도 10, 합천군)

   목은 이색의 염정수에 대한 시 3수

   1) 부염정수동상연(赴廉廷秀東床讌, 목은시고 21권 ; 1986년판 문헌록 975-6쪽)
       모자위의 구슬꽃은 춤추는 적삼에 비치는데 / 帽上瓊花映舞杉
       거나하자 호기 또한 높기도 하네. / 醉來豪氣更巖巖
       병든 몸이 누차 동상연에 참여하니 / 病餘屢赴東床讌
       먹을 것 탐한 이 미친 늙은이 스스로 비웃노라. / 自笑狂夫老更饞

       동상연-혼례가 끝난 후 신랑이 신부집에서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잔치를 함

   2) 축하 염정수 대언(賀廉代言 廷秀, 목은시고 28권)
       세 아들 모두 급제하여 일찍부터 명망 높은데 / 三子登科早有名
       막내 아들(정수) 사랑한 분은 바로 어머니라오 /愛鍾於季是萱庭
       고당의 늙은 어버이는 모두 건강하시고       / 高堂鶴髮俱無恙
       태평성대 임금님 근신(近臣)이라 더 없는 영화로세 / 盛代龍喉罕比榮

       맑고 깨끗한 인품은 옥수와 같고             / 蕭洒風儀同玉樹
       드높은 대궐(大闕)은 하늘에 가 닿는다.       / 岧嶢森直近靑冥
       이 늙은이 몹시 기뻐함 무어 물을 것 있나    / 牧翁驚喜何須問
       성주(聖主, 임금) 보좌하는 문생(門生)을 보아서라네/ 眼見門生佐聖明 

  3) 목은시고 21권 : 詩,  대호군 염정수
      病不出數日矣。邀上黨韓公。登西峯賞花。旣至。又邀禮安君禹公同坐。旣而禹携我輩至其第設酌。
      默稿一聯曰。花開將爛熳。我老豈蕭條。獻酬談笑。未暇成篇。適有賓客携酒過陋巷。家僮走報。
      辭出馳歸又飮。大醉頹然達旦。足成 一首。賓客者。版圖判書鄭達可,判閤李士渭,前左尹金九容,
      諫議李崇仁,司成崔彪及門生判事崔崇謙,大護軍廉廷秀也。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1347-92년)의 청강운(淸江韻) 3수

   이숭인(李崇仁, 1349~1392) : 고려 말기의 학자. 본관 성주(星州). 자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곧 장흥고사(長興庫使)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으며 명나라 과거시험에 응시할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우왕 때 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주청하다가 한때 유배 당했다. 그후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어, 정당문학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실록(實錄)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에 전임하였으나 친명(親明) 친원(親元) 양쪽의 모함을 받으며 여러 옥사(獄事)를 겪었다. 조선이 개국할 때 정도전의 원한을 사서 그의 심복 황거정(黃巨正)에게 살해되었다. 문장이 전아(典雅)하여 중국의 명사들도 탄복하였다. 저서에 《도은집(陶隱集)》이 있다(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 야좌차민망운(夜坐次民望/염정수韻, 도은선생시집 제2권 ; 문헌록 972-3쪽) 
      산마을 밤에 혼자 앉았으니 긴 밤 다시 짧은 밤이로세
      병풍엔 외론 촛불 그림자 흔들리고 문창엔 시냇물 소리 들려오네.
      해는 장차 다하려 하는데 나그네 마음은 툭하면 놀래누나
      곰곰이 생각건대 저 도성엔 진토가 드높이 싸이리라

      獨坐山村夜  屛搖孤燭影 長更復短更  窓撼一溪聲
     歲律行將盡  還思九街上 羈懷動輒驚  鹿土漲崢嶸 

    2) 지일용민망운(至日用民望韻, 도은선생시집 제2권, 문헌록 973쪽)
      쫒겨난 손이 은혜입어 고향에 돌아가는데
      더구나 좋은 시절 일양(一陽)이 생하였네.
      콩죽을 서로 먹이니 이웃 인심 후하기도
      숫실이 더해지니 해가 길어짐을 알겠네.

      찬 시냇가 버들은 일천 나무가 앙상하고
      따뜻한 뜨락 매화꽃은 한 가지가 향기롭네.
      꿈은 대궐에서 임금님 행차 따르는데 놀래고
      기쁨은 고당 양친의 만수상에 넘치누나

       逐客承恩返故鄕  佳辰況復是生陽  豆糜相饋隣人厚  綉綿初添覺日長
      柳色溪寒千樹澁  梅花砌暖一枝香  夢驚雙闕隨仙仗 喜滿高堂萬壽觴

    3) 산중에서 지내며-民望의 詩에 차운하다 -(李崇仁, 1347-1392)
      (山居卽事 次民望韻)
      無才堪世用。絶意鬪年芳。藥圃風初暖。書窓日漸長。要僧分水石。
      見客置壺觴。寫得閑居賦。聊因扁草堂。

      세상에 쓰일 재능이 없으니(無才堪世用)
      꽃다운 나이들과 겨룰 생각 끊었다네(絶意鬪年芳).
      봄 되니 약밭엔 바람이 따스하고(藥圃風初暖)
      서실 창에는 해가 차츰 길어지네(書窓日漸長).

      중이 오면 함께 풍광을 즐기고(要僧分水石)
      벗 만나면 이곳에서 술잔을 주고받지(見客置壺觴).
      한가한 산중생활 한 편 시에 담아내어(寫得閑居賦)
      그냥 그렇게 초당에 내걸었네(聊因扁草堂).

      (출처 http://user.chollian.net/~tsym/mok2si04.htm           http://user.chollian.net/~tsym/e008.htm

     차민망운(次民望韻, 도은선생시집 제2권)
      誰道村居僻。眞成適我情。雲閑身覺懶。山好眼增明。
      詩稿吟餘改。茶甌飯後傾。從來知此味。更別策功名。

    * 민망(民望)은 염정수(廉廷秀)의 자(字)이며, 염정수는 이숭인의 누이의 남편으로 처남.매제간입니다.
       정몽주, 이색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숭인과는 아마도 열 살 이내의 나이차였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둔촌 이집 : 정청강염지신사(呈淸江廉知申事) 시 3수(문헌록 973-974쪽)
     달이 반쯤 기울때까지 승정원에서 밤늦게 일하고 (夜直銀臺月半斜)
     아침조회에서 돌아와 한 낙에야 수레에서 내리네(朝廻日午下公車)
     부친(염제신) 당년에 학발의 시중(문하시중) 댁이었고(當年鶴髮侍中宅)
     지금은 승지벼슬의 학자(염정수) 집이네(今是龍喉學士家)

     맑은 향기 은은하고 그림자는 비꼈는데        (淸香荏苒影橫斜)
     많은 사람은 말타고 수레타고 꽃구경하는데  (多少看花馬與車)
     한 많은 노부는 전원에 있어 찾아가지 못하니(自限老夫尋不得)
     꽃가지 하나꺾어 산자락에라도 보내주구려   (一枝能소折寄山家)

     따스한 봄날 한강에 버들가지 춤추면                  (漢江春暖柳欹斜)
     혹은 외로운 배 저어보고 혹은 화려한 차도 타며   (或悼孤舟或命車)
     모두들 서울이 한 없이 좋다고 하지만                 (共道帝鄕無限好)
     아이 데리고 일찍이 전원에 돌아옴만 못하리        (不如携幼早還家)

   둔촌 이집(遁村 李集, 1327-1387) : 이집은 동정 염흥방은 물론 청강 염정수 앞으로도 시 3수를 적어 보낸 것은 광주이씨 문중과 파주염씨 문중의 친교를 말해준다. 둔촌 이집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원령, 원령(元齡)은 초명, 뒤에 휘는 집(集), 호는 둔촌, 휘 당(唐)의 2남으로 고려 충목왕대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돈의 전횡을 비판한 것이 화가 되어 노부를 모시고 광주땅(서울 송파구 둔촌동)에 은거한 후 다시 영천(永川)으로 피신했다가 신돈이 죽은 후 개성 용수산밑 현화리에 귀가했다. 이집(李集)은 그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천령현(川寧縣, 경기도 여주군)에 낙향하여 지내다가 우왕 13년에 별세하였다. 둔촌의 후손이 조선 선조때의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했던 이한음(李漢陰)이시다(파주염씨종보 1998년 제11호 7면, 천년(千年)을 이을 우의(友誼), 대종회 부회장 염홍주). 광주이씨의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인데, 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둔촌동이다. 이집의 호에서 둔촌동이 되었다.

   봉화 정도전의 시(奉化 鄭道傳 詩)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제목 : 민망의 시에 차운하여 박생을 보내다(삼봉집 제2권: 오언율시)
          次民望韻送朴生 按民望。염정수 자(廉廷秀字)。호(號) 훤정(萱庭)

           나도 집 떠나 온 나그네로서    / 以我未歸客
           고향 가는 그대를 전송하다니  / 送君還故鄕
           시 지어 원고는 불어만 나고    / 詩成添舊草
           돈이 다 떨어지니 빈 주머니만 / 錢盡但空囊
           갓 지은 들밥은 참 부드럽고   / 野飯新炊軟
           밤잔치 막걸리는 더 향기로와 / 村료夜酌香
           바람 서리 차츰차츰 다가오니 / 風霜行漸逼
           중로에서 지첼랑 부디 마시오 / 中路莫彷徨

   양촌선생문집 제2권 : 詩
   대제(待制) 염 민망(廉民望)에게 부치다. (출처 : http://kcri.minchu.or.kr/M/jsp/index_m.htm)

       웅제하던 그 시절 그대와 함께   / 當時應製與君俱
       날마다 먼 길을 나란히 갔네      / 每日長途並轡驅 
       뜻밖에
황종이 버림을 받아       / 豈意黃鐘遭廢棄
       졸한 솜씨
호로를 그리다니 원   / 獨將拙手盖葫蘆

       황종 : 십이율(十二律)의 하나인데, 곧 십이율의 기본음(基本音)이 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중동(仲冬)의 달은 율이 황종에 해당한다." 하였다.

       호로 : 의양호로(依樣葫蘆)의 약칭으로, 모방(模倣)을 비유한 말이다.
                 도곡(陶穀)의 시에 "우습도다 한림 도 학사는 해마다 똑같이 호로를 그린다오.
                 [堪笑翰林陶學士 年年依樣畫葫蘆]" 하였다.

    양촌선생문집 제3권 : 시(詩)
    제목 : 민망의 시에 차운하여 박생을 보내다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지는 잎 우수수 뜨락에 가득한데               /蕭蕭落葉滿中庭
      오랜 장마에 사립문 두드리는 사람 없네     /久雨來人絶叩扃
      적막한 시 회포를 어디다 펴보리               /寂寞詩懷何處展
      탑 위에 높이 앉아 술병이나 기울이세        /擬從高榻倒長甁
      한가한 날이라서
독우도 마심직해             /閑日惟堪喚督郵
      벗님네 아니 오니 뉘랑 함께 수작할꼬        /賓朋不至與誰酬
      
공문거(孔文擧)의 동이엔 좋은 술 가득하리 /尙知文擧尊盈酒
      좌상에선 행여 나를 용납해 주려는지          /座上還能許我不

  독우 : 평원 독우(平原督郵)의 준말로 나쁜 술을 가리킨다. 진(晉) 나라때 환온(桓溫)의 속관(屬官)에 술맛을 잘 아는 주부(主簿)가 있었는데, 맛이 좋은 술은 청주 종사(靑州從事), 나쁜 술은 평원 독우라 하였다. 이는 청주 땅에는 제군(齊郡)이 있었고 평원 땅에는 격현(鬲縣)이 있었는데 제(齊)자에서는 배꼽[臍]의 뜻을, 격(鬲)자에서는 명치[膈]의 뜻을 따, 좋은 술은 곧장 배꼽 밑으로 내려가고 나쁜 술은 명치 위에 있어 내려가지 않는다는 은어(隱語)로 쓴 것이다.

  공문거(孔文擧)의 동이엔 좋은 술 가득하리 : 문거는 후한(後漢) 때의 명사 공융(孔融)의 자(字). 그는 요동(遼東)으로 피난하여 북해(北海)에 살면서 시주(詩酒)로 세상을 보냈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좌상에는 언제나 손이 가득하고 술동이엔 언제나 술이 가득하면 나는 아무런 근심이 없다." 하였다. 《三國志 魏志 孔融傳》
 

   염문 족보 발간과 청강공파보
   1834년 청강공파보 제1판 : 중시조 염제신의 2남 청강공 염정수 어른의 후손들에 관한 [1834년판 청강공파보]가 출판된 것은 [1704년판 국파공파보]보다도 1백 30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는 청강공 후손들을 위해서 전라도 나주의 15세손 염종걸(廉宗傑)이 머나 먼 관북지역의 함경도 지방을 드나들면서 노력한 결과였다(대동보, 1986).  

   1849년판 곡성염씨세고(曲城廉氏世稿) : 세고는 1849년(헌종 15)에 간행한 곡성염씨 여러 사람의 시문을 모은 책. 구분 : 시문집, 활자본 시대 : 1849년. 관련 표제어 : 염정수, 염흥방. 활자본. 4권 2책. 책머리에 이휘령의 서(序)가 있고 책끝에는 이기수의 〈곡성세고후지(曲城世稿後識)>와 금시술(琴詩述)의 발문이 있다. (중략) 권3에는 3남 정수(廷秀)의 청강일고(淸江逸稿)와 치용(致庸)의 참의공일고(參議公逸稿) 및 말경(末卿)의 참판공일고(參判公逸稿) 등이 수록되었다(문헌록 223-226쪽, 1986;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1857년판 정사보 서문(丁巳譜 序文) : 1753년(영조 계유년)에 2권의 족보를 만들었고, 1802년(정조 임술년)에 5권의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국파공파의 후손들은 가까이 호남 영남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종손과 지손이 다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정공파의 후손들은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간혹 소수가 와서 참여했을 뿐이다. 청강공파(淸江公派)의 후손들은 멀리 북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족보에 누락됨으로써 모두가 한 쪽으로 치우치게 편찬되는 흠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곡성백 17세손 염재안/廉在安. 대동보 문헌록 109-111쪽, 1986).

   15세손 염종걸 : 아, 팔도에 흩어져사는 우리 염씨는 모두 매헌(梅軒, 염제신) 할아버지의 후손인데, 국파(菊坡), 동정(東亭), 청강(淸江) 3형제에서 비로소 파가 나뉘어졌다. 무진년(1388년)에 화를 당했을 때 다행히 태조(太祖) 이성계가 죄없는 사람들을 사실대로 밝혀주어 구원한 것으로 인하여 겨우 살아 남은 가족들 몇사람이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후 태종(太宗),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서는 연달아 우리 후손들을 찾아서 등용하는 은혜를 입어 가문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는데, 문과(文科)와 음직(蔭職, 부모의 덕택으로 하는 벼슬) 또는 생원 진사(生員 進士) 등이 대대로 끊이지 않아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요원한 맥을 아직까지 보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조(宣祖) 임금께서 승지공(承旨公)에게 유시한 글에, “너는 바로 삼한구족(三韓舊族)이다”라고 하였다. 정조대왕께서는 현령공(縣令公)에게 “가상하다. 두문동의 후손(杜門洞 後孫)이구나”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기 그지없다. 비록 근세(近世)에는 크게 현달한 자손은 없지만, 오늘날 한미한 것을 한할 것이 있겠는가. 대체로 이 보첩을 앞뒤로 해서 세 차례나 하였는데, 북도(北道)에 사는 청강공파(淸江公派)는 거리가 너무 먼 때문에 보첩에서 빠진 경우가 있고, 서도(西道)에 사는 동정공파(東亭公派)도 간혹 곤궁하여 족보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족보가 한 쪽으로 치우치게 편찬되는 흠을 면치 못하였다.....(곡성백 15세손 염종걸/廉宗杰. 문헌록 99-109쪽).

   1910년 청강공파보의 제2판 : 1910년판 경술보(庚戌譜)가 청강공파보다. 이에 대한 청강공파 18세손 염민우(廉民隅)의 글에서 청강공파의 단면이 나타난다.
   서문(序文) : (앞 생략) 우리 청강공파는 마천령(摩天嶺)의 남북으로 흩어져 살고 있어서 후손들을 낱낱이 들자면 셀 수 없을 정도다. 손계(孫系)를 고증할 수 없고, 항렬(行列)은 기준을 세운 것이 없어서 애경사(哀慶事)를 함께 나누지 아니하고 서로 보기를 길가는 사람처럼 하고 있다. 바로 이때 손을 쓰지 아니한다면 몇 년 더 가지 않아서 길가는 사람의 또 길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함경남도(咸南)에서 계획을 세워 맨 먼저 제창하였더니 각지방에서 호응하여 힘을 함께 한 이들이 오히려 우리 함남보다 많았다. 생각같아서는 널리 13도를 통합했으면 하였으나 때마침 시국이 어수선한 때를 만나 이 일을 오래 끄는 것이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문정공(文正公)을 시조(始祖)로 삼고, 청강공(淸江公)을 파조(派祖)로 삼아서 따로 파보를 만들었다. 아, 양파(兩派, 국파공파와 동정공파)를 누락한 것은 그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알고 있다. 허나 우선 아쉬운대로 이 보첩을 편수하였으며, 또 삼파통록(三派通錄)과 삼강(三綱) 한 편을 첨부 간행하여 나중에 세상이 조용해져서 널리 통고할 날을 간절히 기다린다( 뒤 생략).  1910년(경술국치) 청강공 18세손 염민우(民隅) 삼가쓰다(인쇄소 함흥)

   1922년판 임술보 서문 : 우리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천지를 다스리고 고금을 널리 통달한 문학(文學)으로서 일찍이 전교(傳敎)하기를 “염씨(廉氏) 성을 가진 사람들은 예로부터 반역한 일이 없었고, 모두가 두문동 현인(杜門洞 賢人)의 자손들이다”라고 하였다(1922년 11월 하순 곡성백 15세손 종흡/宗潝 : 출처, 대동보 문헌록 131-132쪽, 1986).

    청강공의 관계(官階)와 관직(官職)에 대한 고찰
    충경공신도비에 청강공의 정순대부(正順大夫)는 정3품상(正三品上) 품계다. 관명과 관직에서 밀직사(密直司)는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 및 군기를 맡은 곳이다. 지신사(知申事)는 조선의 도승지에 해당되는 직위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이라고 보여지는 정3품 품계다. 판전의사(判典儀事)에서 전의사(典儀事)는 나라의 제사(祭祀)와 증시(贈諡)를 관장하던 곳이다. 판사(判事)는 판전의사의 장(長)으로 정3품이다.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에서 우문관은 학자들로 구성된 왕의 시종관(侍從官)들의 관청으로 제학(提學)은 이의 장(長)인 듯하며, 공민왕 11년과 21년에 설치되었었다. 춘추관(春秋館)은 시정(時政)을 기술하던 곳으로 수찬관(修撰官)은 정3품 벼슬이다. 지전리내시다방사(知典理內侍茶房事)에서 내시부(內侍府)는 환관(宦官)을 관장하고 왕명의 전달과 왕의 일용품을 관리하는 곳으로 장(長)은 정3품 위인 듯 하다. 청강공은 충경공 염제신이 돌아가실 때인 우왕 8년부터 11년까지 지신사(知申事) 직을 역임한 것이니까 오랫동안 우왕 옆에서 시종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청강이 우왕 14년에 돌아가실 때 대사헌(大司憲) 벼슬에 있었다고 고려사에 기술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청강공의 최종 벼슬에서 대사헌은 종2품의 관계(官階)이고, 사헌부의 장(長)이니 종2품상의 영록대부(榮祿大夫)로 하고,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은 문형(文衡)이니 “영록대부(榮祿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으로 벼슬명으로 함이 가하다고 생각된다(선조분의 관계와 관직. 파주염씨종보 14호 4면. 2001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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