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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이전의 역사적 인물들 ☞인물편 - 신라시대 참고
염상(廉相) : 태사공(太師公) 염상은 고려 개국 2등공신. 궁예 때의 장수로서 궁예의 횡포가 심해져 민심이 이탈되자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태조가 마산성 통해진성 등 사방을 정복할 때 공이 커 고려 개국2등공신에 올랐다. 왕규.박수문과 함께 태조의 임종시 유언을 받들었고 태사에 이르렀다.
서기 918년 8월 태조가 조서를 내려 고려 개국(開國)에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표창할 때 개국공신이 되었다. 서기 930년 태조 12년 3월에 대상 염상(大相 廉相)으로 하여금 안정진, 통해진에 성을 쌓는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서기 943년 丁酉日에 태조는 재신 염상(宰臣 廉相), 왕규(王規) 박수문(朴守文) 등을 시좌(侍坐)케 하고 유언을 내렸다.
참고 : 이때의 고려사를 보면 염상의 한자가 相과 湘이 섞여 나오고, 또한 위와 같은 공로가 있는 분이 벽상공신 명단에는 없고, 아무 기록도 없는 시조 염형명이 벽상공신 명단에 있는 것을 보면 혹시 동일인은 아닌지? 이때는 태조가 이름과 성을 하사 하는 예가 많은데 혹 이름을 하사 받은 것은 아닌지? 하나 근거는 없음.
2세 : 염 위 (廉 位) 2세 염위
: 생졸미상, 관직은 군기승, 아내와 묘소 미상, 슬하에 '가칭'을 두셨다(대동보, 1986).
생존기간 은
미상이나 아들 3세 '가칭'이 거란군 침입때 포로가 된 1010년과 거란을 탈출한 1056년을 고려하면, 생존기간은 대략 900년대 중엽부터 현종(1009-31년)까지로
본다.(염태호, 2000)
염위와 염상의 교체문제 태사공 염상은 고려 개국공신 중에 1인인데, 구족보들과 1986년 신판 대동보 사이에는 크게 달라진 것 한 가지가 있다.
염씨의 제2족보인 [1753년판 계유보]에서 '마군대장군 염상'과 '군기승 염위'를 같은 항렬로 모신 바 있었다.
그런데, 3세 '가칭'의 군역시작년도(1010년)와 2세 '염상'의 관직취임년도(929년)는 비교하면 무려 81년이란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즉, 염 상은 918년(태조 1)에 건국 2등공신으로 보상된 사실과 929년(태조 12)에 대상이란 사실은 전혀 앞뒤가 맞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753년판 계유보]에서 염상을 빼는 대신에 염위를 2세로 모셨다고 한다(파주염씨대동보, 1986). 그 이유는 염현보다 더 오래된 '대사도 염형명'을 시조로 모시면서 2세 염위와, 3세 염가칭의
3인을 추가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염태호, 2000);[고려사 염상(高麗史 廉相) : 통권 2권 世2권 17쪽 뒤1, 통권 82권 志36권 05쪽 뒤1과 5]. 한자 : (軍資監丞), (太師公 廉相),
(馬軍大將軍 廉相), (軍器丞 廉位), (保償), (大相)
3세
: 염가칭(廉可偁)
3세 가칭
: 일명/가이, 관직은 병마사공이고, 생졸은 미상이며, 거란군의 제2차 침입때인 1010년(8대 현종, 1009-31)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된 후 거란군에게 포로된지 46년만에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왔고, 슬하에 염현을 두셨다(대동보, 1986).한자: (兵馬使公, (環衛公子), (軍役), (廉顯)
염가칭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 : 高麗史7卷-世家7-文宗1-10-03-1056
十年二月甲午, 有司奏, "沒蕃人廉可偁, 軍器丞 位之子 三韓功臣司徒 邢明之孫, 於庚戌年中 充環衛公子軍役 契丹兵 蘭入京城震騷 奉二親 避兵 于故鄕 峯城縣 道遇賊 被虜而去 淸寧元年正月 携一子 亡來 請可偁父祖永業田舍 竝令還給." 制曰: "可偁 功臣苗裔 丁年被浮 棄蕃土妻兒 惟携一子 皓首而歸 深可憐憫 可給舊業田廬
'고려제11대 문종 10년 병신(서기1056년)
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거란군에게 잡혀 갔던 염가칭은
군기승 '位'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형명'의 孫인데
경술 년중(서기1010년)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되었다가
계단병의 경성침입으로 이친(二親; 조부,부)을 모시고 고향인 봉성현(지금의
파주군)으로 피하려다 도중에서 피로되었다가 청녕원년
정월에 아들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왔으니 부조의
영업전사를 환급하소서' 했더니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피로되었다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백발이 되어 왔으니 가련함에 구업전려(세습되는 농토와
집)를 돌려 주라'고
문종이 명하였다.
고려사절요의 기록
: 고려사절요 제4권 문종 인효대왕 1(文宗仁孝大王一)
병신 10년(1056), 송 가우(嘉祐) 원년, 거란 청녕 2년
1056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오랑캐에게 붙잡혔던 사람인 염가칭은 삼한공신(三韓功臣) 형명(邢明)의 손자로서 경술년에 거란 군사가 경성에 밀어닥치자 가칭이 부모를 모시고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가 청녕 원년(1055) 정월에 그 자식을 데리고 도망해
왔으니, 그 아비와 할아비의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모두 돌려주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十年春二月有司奏 沒蕃人廉可偁 三韓功臣 邢明之孫 庚戌年 丹兵 蘭入京城 可偁 奉二親 避兵 遇賊被虜 淸寧元年正月 携子亡來 其父祖永業田舍 竝宜還給 從之
거란군의 제2차 침입 : 중국의 대분열
시대에 만주지역에 건국된 거란(907-1125년)이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고려 침입'을 시도하다가 서희 장군과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났다.
이러한 거란에 의한 강동
6주 반환요구를 고려가 거절할 무렵, 고려에서 강조(姜兆)는 7대 목종을 폐위하고 김치양 일당을 죽인 뒤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은 이를 구실로 1010년 7월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륜을 앞세워 개성으로 침략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병력 30만이 통주(선천)에 주둔하여 방어했을 때, 거란은 1010년 10월에 40만 대군이 고려로 진군한 전투에서,
강조는 적을 지나치게 경시해서 패배하고 포로된 후에 거란 성종에게 신하되기를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했다(이기백, 1984).
제3차 침입 :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소배압을 앞세워 10만 병력으로 3차로 침입을 했을 때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이 겨우 수
천명만 살아 돌아갈 정도로 대승리였고, 1019년 고려와 거란은 평화를 맺었다(이기백, 1984).
강감찬은 성종대에 과거급제한 문인으로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중추사, 거란의 3차 침입시에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로서 귀주대첩의 명장, 문하시중을 역임했다(박영규, 1996). 한자
: (姜邯贊; 949-1032), (龜城),
1056년의 염가칭과 1994년의 조창호 : 염가칭은 고려와 거란이 화평을 회복한후 46년만인 1056년(고려의 황금기였던 문종때)에 도망해 왔다고 한다(대동보, 1986). 이는 1950년 6.25때 납북된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40여년만에 탈북해서 대한민국의 품안으로 도망쳐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염태호, 2000)
4세 : 염 현(廉 顯)
高麗史 통권 5권 세5권-28쪽 뒤3, 74권 지28권-11쪽 앞8 56쪽
4세 재상공 염현은 [1704년판 갑신보]등에서 한때는 우리 염문의 시조로 되었었음. 생졸미상, 관(官)은 우습유(右拾遺)
우보궐(右輔闕) 국자감시관(國子監試官)을 거쳐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경력은 과거 문과(文科)에 급제, 덕종 원년 임신(1032년)에 우습유(종6품), 1033년에 우보궐(정6품/右輔闕)이 되어 왕에게 국자감시(國子監試)를 보도록 요청하여 시관으로서 여러 차례 많은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처음으로 설치된 국자감 제도에
의한 시관(試官)으로서 정공지(鄭功志) 등 60인의 명사를 선발했고, 문종때 성균관시관(成均館試官)으로 많은 선비들을 선발할 때 전형에 밝기로
세상에 이름났다. 동문선(東文選)을 보면 염현(廉顯)선조께서 선왕의 시호를 지어 바친 책문(冊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뛰어난 원로(元老)
학자(學者)였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관작은 알 수 없다. 슬하에 염한(廉漢)을 두셨다. 배위(配位)는 미상이며, 묘소(墓所)는 영천 금호읍약남리 산19-1염정승골에 모셔져 있다(파주염씨대동보 상계 1쪽과 문헌록 494쪽, 재상공사적. 1986).
생존기간 : 염현은 1032년 과거급제와 1080년 성균관시관으로 미루어 보면, 생존기간이 대략 8대 현종(1009-31)부터 덕종(1031-34), 정종(1034-46), 문종(1046-83), 순종(1083-83), 13대 선종(1083-94)까지로 짐작된다.(염태호,
2000)
과거제도 : 4대 광종은 서기 958년 후주사람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쌍기를 지공거로 역사상 최초로 관리등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시행한다는 폭탄적인 선언을 했다.
과거제도는 종래의 개국공신 계열의 옛 무신들에 대한 크나 큰 타격이 되었는 반면에 학문하는 새 문신들을 위한 관리등용의 길이 된 동시에 왕권강화를 위한 새로운 관료체제의 설정작업의 하나였다(이기백, 1984; 박영규, 1996). 한자: (光宗: 949-75),(後周人),(雙冀),(知貢擧: 시험관),(科擧制度)
국자감과 성균관
: 서기 992년(성종 11년) 고려시대에 창설된 국자감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유교기관 국립대학제도였다(이기백, 1984).
국자감은 1297년에 '성균감', 1307년에 '성균관'으로 개명했다. 염 현은 국자감 시관, 재상이셨다. 고려에서 신라 이래의 불교는 항상 다른 한쪽에서 유교와 공존했다.
즉,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해동유교의 첫 조상으로 보는 일도 그런 단초였다. 왕건의 불교와 유교 병행정책을 말하는 최승로의 유불내외설이나 대각국사의 유불일원론도 그러한 고려의 폭넓은 종교사상을 밝혀준다. 성균관시대 이전에 이미 해동공자 최충의 유교 사립학교를 통해 김인존, 정지상, 김부식 등이 배출되었다.
그런 맥락이 안유를 거쳐 고려말에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졌고, 조선시대는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다. 국자감이 개칭된 성균관에는 200여명의 젊은 유생들이 북적대었고,
첫번째 박사 정몽주는 주자학을 독학으로 익혀 해동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고, 조선개국 공신 정도전 역시 성균관 박사였다(시인 고은, 중앙일보 1998. 11.12자). 염문에서 국자감시관으로 처음 관여한 분이 염현 선조님이시다(파주염씨종보 11호, 1998. 염종환) 한자
: (國子監), (成均監), (成均館), (廉 顯), (儒佛內外說), (儒佛一元論)
국자감시관 우습유 염현(右拾遺 廉顯) : 고려사
74권-지 28권 1032년 : 국자감시에는 정원이 없었고, 덕종 초년에 왕명에 의해 우습유 염현에게 명령하여 정공지 등 60인을 뽑았다(高麗史 74권-志 28-選擧 2-科目 2-국자시지액-001 : 凡國子試之額無定制德宗初年命右拾遺廉顯取鄭功志等六十人).
우보궐 염현(右輔闕 廉顯) : 고려사 5권-세가 5권-덕종 1033년 : 덕종(德宗) 계유 2년 9월 계해 삭에 (중략), 유종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한빈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이자연으로 이부랑중어사잡단 우승선을 삼고, 염현(廉顯)으로 우보궐(右補闕)을 삼고, 이유도로 감찰어사를 삼았다(高麗史 5권-世家 5-德宗-02-33-1033 : 以柳琮爲兵部尙書 ; 韓彬卿爲工部尙書 ; 林維幹爲御史中丞 ; 李子淵爲吏部郞中御史雜端右承宣 ; 廉顯爲右輔闕 ; 李惟道爲監察御史).
재상공사적(宰相公事蹟) : 파주염씨대동보(1986) 공의 휘는 현(顯)인데, 고려 덕종 때 우습유(右拾遺)가 되어 정공지(鄭功志) 등 60명을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았다. 문종 35년 봄 정월에는 성균관에서 선비를 시취하여 전형(銓衡)에 밝기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다(坡州廉氏大同譜 文獻錄, 494쪽, 1986 : 公諱顯相麗德宗爲右拾遺取鄭功志等六十人文宗三十五年春正月取士成均以鑑衡名於世位至宰相).
고려사를 인용한 동사강목(東史綱目) 7권 신미(辛未) 국자감시가 처음 실시되었는데, 부와 육운십운시로 치러지고 이것을 진사시라고 했으며, 후에 성균시 혹은 남성시라고
칭하였다(高麗史74卷-志28-選擧2-科目2-國子監試-001 : 國子監試卽進士試德宗始置試以賦及六韻十韻詩厥後或稱成均試或稱南省試).
동문선(東文選) : 염현 유고(廉顯 遺稿) 동문선은 서거정(徐巨正, 1424-1492)이 성종 9년 왕명으로 우리나라 고대로부터의 문헌들을 찬집하여 1478년 2월에 완성했고, 이것을 중종 13년 7월에 신용개(申用漑) 등이 보완한 총 154권여의 책이다.
동문선(東文選)에 소개된 염현(廉顯)의 책문(冊文)은 10대 정종(靖宗, 1034-46)이 제위 12년만에 33세 나이로 별세하자 바로 선왕의 시를 묘호 능호를 왕명에 의해 지어 바치신 것이다.
이처럼, 염현 선조께서 선왕의 시호를 지어 바쳤다면 당시 원로(元老)이시고, 뛰어난 학자(學者)였음을 알 수 있다. 염현은 우보궐이 된지 15년후인 1046년에 선왕의 시호를 지어바쳤다면 그후의 벼슬은 아마도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파주염씨종보 제11호 3면. 1998년. 재상공의 책문. 염종환).
요약 : 염현 선조께서는 고려 9대
덕종(1031-1034)때 우습유때 국가감시관으로 인재를 선발했고, 우보궐을 역임했으며, 10대 정종(靖宗, 1034-1046)의 붕어에 즈음하여 "정왕시책문"을 1046년에 작성하셨다.
염현 선조님에 대해서는 9백여년만에 세상에 알려진 우리 홈(pajuyom.kr)의 [파주염씨종보 6호, 1993]의 "영천통문의 깊은 뜻(이해철 교수 번역)", "영천 채약산 염정동 산소의 정화작업(글 염재희)", "통문을 접한 우리의 각오(글 염종환)", [파주염씨종보 7호, 1994]의 "영천도선산 정화작업을 마치면서(글 염재희)", [파주염씨종보 11호, 1998]의 "재상공의 책문"(글 염종환)을 참고하십시오.
그런데,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1986)에서 염현(廉顯)의 "재상공사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高麗史 73卷-志 27-選擧 1-科目 1-028 文宗] 및 [高麗史 9권-世家 9권-文宗]의 한문원전과 한글번역본을 살펴 보았지만, 11대 문종 35년(1081년)의 선비 선발 기록과 벼슬이 재상에 이르셨다는 '재상공(宰相公)'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문헌적인 근거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염태호. 2002년 10월).
5세 :염 한(廉 漢) 고려의 무신
高麗史;통권9권 세9권-10쪽 앞5,30쪽 앞9 뒤3,33쪽 앞6
통권 95권 전8권-27쪽 뒤1
5세 상서공 염 한
: 생졸미상, 관직은 1069년(11대 문종 23년)에 '영군도부서장군'(정4품), 1080년 동경에 침범한 동번의 난에 병마사 최 석과 병마부사 이 개를 거느리고 각각 1만 장병을 지휘하여 해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움으로써
왕실에서 염한에게 은(銀) 50량과 정향을 하사했고, 1080년 10월 병부상서를 제수, 그후 병마사로 정주에 침범한 동번의 난을 토벌, 1081년 1월 병마상서,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 겸 서경유수주국(정2품), 병부상서, 슬하에 염덕방을 두셨다(파주염씨대동보, 1986). 염한은 생존기간이 미상이지만, 대략 서기 1030년 전후부터 1100년 이전이나 이후에 생존으로 짐작된다.(염태호, 2000) 한자
: (尙書公 廉 漢), (東京=경주), (東藩 亂), (崔 奭), (李 凱), (丁香), (兵部尙書=정3품), (兵馬使), (定州=정평), (兵馬尙書), (參知政事=중서문하성/종2품=장관급),
(兵部尙書=국방장관), (廉德方)
문종때 관제 : 고려의 관제는 3성체제로 구성되었다. 즉,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이고, 예하의 6부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였다. 그후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서 중서문하성이라고 하였다(고려의 관제). 한자
: (中書省), (門下省), (尙書省), (吏部), (兵部), (戶部), (刑部), (禮部), (工部), (中書門下省).
그러므로 염 한은 11대 문종때 오늘날의 장관급이셨다.(염태호, 2000)
고려왕조의 황금시절 : 염한이 관직에서 활동하던 11대 문종(생존기간=1019-83년, 제위 1046-83년)때는 이미 10대 정종(제위 1034-46년)때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정치, 사회, 문화, 외교,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이 이룩되었다. 문종은 제위 37년 동안 많은 법률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했고, 국가발전을 통해 고려의 황금기를 열어 놓음으로써, 고려는 문화와 대외적 위상이 한층 더 격상되었다(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인터넷=고려왕실연대표).
익제 이제현의 고려사 : 문종 시절에 대해 익제 이제현의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쓸모없는 관원이 줄어 사업은 간편하게 되었고,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으며, 창고에는 해마다 묵은 곡식이 쌓이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 때를 태평성세라고 일컬었다'(박영규, 1996). 한자
: (高麗史), (李齊賢: 조선왕조 이항복/李恒福의 선조)
염한(廉漢) 선조님에 관한 사료 모음(史料集) 염한(廉漢)에 대해서 [고려사 8권-세가 8권-문종 3-27-21-1073년]에 ‘소을포촌 번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소을포촌 번장이 대동보에서 빠져 있는가하면, 또한 ‘영군도부서장군’으로 임명된 것은 문종 23년(1069년)이 아니라 문종 27년이다. 그러므로 서기 1073년이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염한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 보려고 한다(염태호, 2002년 10월).
서기 1073년 : 소을포촌 번장 염한(所乙浦村 蕃長 廉漢) : 고려사 9권-세가 9권-문종 3 고려와 여진의 관계 : 문종 27(1073) 4월 병자일에 왕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동북 변강 15개주 바깥에 있는 번인들이 계속 귀순하여 와서 군현을 설치하여 달라는 요청이 지금까지 들어오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 조상들이 그들을 감화시켰던 덕택이다."
...5월에 정미일에 서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평로진 인접 지역에 있는 번인들의 우두머리 골어부와 멱해촌의 요결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종전에 이제촌에 살면서 거란의 대완(벼슬이름)으로 있었는데, 최근에
재차 귀국의 무마하는 혜택을 입었고, 기유년 11월에는 정부에 올라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게되어 감격함을 금치 못하겠으니 우리들이 사는 곳이 여기서 사백리나 되기 때문에 왕래가 매우 곤란하다. 청컨대 적야호 등 5호와 함께 거란의 영향 하에 있는 번인들을 멱해촌으로 인입하여 귀국 호적에 입적함으로써 영구히 번병이 되도록 하여 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
서기 1073년 6월 : 고려사 9권-세가 9권 문종 3
무인에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었다. “삼산 대란, 지즐 등 9개 촌락 및 소을포촌의 번장 염한(所乙浦村蕃長廉漢)과 소지즐의 전리 번장 아반이와 대지즐, 라기나, 오안, 무이주, 골아이 번장 소은두 등 1238호가 와서 나라의 호적에 들기를 청원합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 료응표 해변까지의 장성이 약 칠백리에 달하여 지금 번인들이 연락부절하게 귀순하여 오고 있사오니 관방을 설치하여 그들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해당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의 지시에 의하여 주의 명칭을 정하게 하는 동시에 주기(朱記, 빨간 글씨로 기록)를 주시기 바랍니다”하니 왕이 이에 좇았다.
高麗史 9卷 世家 9-文宗 3-27-21-1073 : 戊寅東北面兵馬使奏 : "三山大蘭支櫛等九村及所乙浦村蕃長廉漢小支櫛前里蕃長阿反伊大支櫛與羅其那烏安撫夷州骨阿伊蕃長所隱豆等一千二百三十八戶來請附藉自大支櫛至小支櫛應浦海邊長城凡七百里今諸蕃絡繹歸順不可遮設關防宜令有司奏定州號且賜朱記." 從之.
서기 1073년 : 영군도부서장군 염한(領軍都部署將軍 廉漢) : 고려사, 동국전란사, 동국통감 병신에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관할지역인 파잠부곡에 침범하여 민구(民口)를 빼앗아 감에 원흥진도부서의 군장(軍將)이 전함(戰艦) 수십척을 거느리고 초도(椒島)에 나아가 싸워서 12급을 참수하고 포로가 된 16명을 빼았아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문종)이 기뻐하여 지병마사 비서감 이성미와 영군도부서장군 염한(領軍都部署將軍 廉漢) 등에게 은약합(銀藥合) 한벌씩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장수와 관리에게는 직(職)과 상(賞)을 차등있게 주었다
(高麗史 9권 世家 9-文宗 3-27년-24-1073년 : 東國戰亂史 文宗 3 : 東國通鑑 17권 文宗편 ; 휘 漢의 고증. 대동보 문헌록. 1054쪽, 1986).
高麗史9卷-世家9-文宗3-27-24-1073 : 丙申兵馬使奏: “東蕃海賊寇東京轄下波潛部曲奪掠民口元興鎭都部署軍將率戰艦數十艘出椒島與戰斬十二級奪俘十六人.”
王喜賜知兵馬事秘書監李成美領軍都部署將軍廉漢等銀藥合各一事其餘有功將吏職賞有差.
서기 1080년 : 병부상서 염한 병마사(兵部尙書 廉漢 兵馬使) :고려사 세가 9권, 95권-열전-8
동번이 작란을 함에 중서시랑평장사 문정으로 판행영병마사를 삼고, 동지중추원사 최석과
병부상서 염한(兵部尙書廉漢)으로 병마사(兵馬使)를 삼고, 좌승선 이개로 병마부사를 삼아 보기 3만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가서 치게 하니 사로잡고 벤 것이 4백 31급이었다.
1) 高麗史-世家 9-文宗 3-34-17-1080 : 2) 高麗史 95권-列傳 8-文正 東蕃作亂以中書侍郞平章事文正判行營兵馬事同知中樞院事崔奭兵部尙書廉漢爲兵馬使左承宣李爲兵馬副使步騎三萬分道往擊之擒斬四百三十一級 : 휘 漢의 고증. 대동보 문헌록, 1055쪽, 1986).
서기 1081년 : 병부상서 염한(兵部尙書 廉漢) : 고려사와 동국통감 1) 신유 35년 봄 정월 을미일에 염한을 병부상서로 삼았다 [高麗史 9권-世家 9-文宗 3-35-01-1081 : 휘 한(漢)의
고증. 대동보 문헌록, 1055쪽, 1986].
2) 신유 35년 정미에 병부상서 염한이 상장하여 청노하니 사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高麗史 9권-世家 9-文宗 3-35-29-1081 : 丁未兵部尙書廉漢上章請老賜詔不允 : 휘 한(漢)의 고증. 문헌록 1055쪽, 1986].
3) 참지정사 판상서 겸 서경유수사주국 염한을 병부상서로 삼았다. 東國通監
17권 文宗 35년 : 參知政事判尙書兼西京留守使柱國廉漢爲兵部尙書 (휘 漢의 고증. 문헌록 1055쪽,1986).
병마사 염한(兵馬使 廉漢) : 고려사 95권-열전 8권-문정-001 동번이 난을 일으킴에 문정(文正)이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가 되어 병마사 최석 염한(兵馬使 崔奭 廉漢)과 병마부사 이개(李凱)로 더불어 보기(보병과 기마병)
3만명(步騎3萬)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에 출둔하였는데 밤에 길을 나누어 바로 적의 소혈로 나아갔다.
(중략) ... 최석 염한
이개(崔奭 廉漢 李凱)에게도 은합 각 일부를 하사하니 중량이 각 오십량(50兩)인데 모두 정향(丁香)을 가득히 담아 주었다.
高麗史95卷-列傳8-文正-001 : 東蕃作亂正爲判行營兵馬事與兵馬使崔奭廉漢兵馬副使李凱將步騎三萬出屯定 州夜分道直趣賊巢穴. ....(崔)奭(廉)漢顗銀合各一副重各五十兩並盛丁香)
*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연도(年度)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려사 9권-세가(世家) 9권-문종 3에 의하면 염한의 포상년도는 서기 1073년이다. 즉, 염한 선조님은 오늘날의 국방부장관을 지낸 고려의 무신(武臣)이시다
6세: 염덕방(廉德方)
6세 검교공 염덕방(檢校公 廉德方, ?-1147)의 관직은 검교우복야 태부소경(檢校右僕射 太府少卿)이시고, 아내는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志義, 1083-1162년)이며, 슬하 4남 2녀를 두었는데 자녀들이 대개 早卒 하였다. 4남 염신약과 큰딸 염경애가 후세까지 이름을 떨치었다.
해설 : , (檢校=문반 5품 이상과 무반 4품 이상의 명칭/5백년고려사; 박종기, 1999), (廉信若, 1118-1192, 7세 염신약편 참조), (수원최루백의 처, KBS에서 '접시꽃 당신'이란 제목으로 방영, 기타인물편 참조)
다음은 염덕방의 처 의령분대부인 심씨의 묘지석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처;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284
검교우복야 태부소경(檢校右僕射 太府少卿) 염공(廉公)의 처(妻)인 의령군대부인 심씨(宜寧郡大夫人 沈氏) 묘지
부인의 성은 심씨(沈氏)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지의(志義)로, 돌아가신 추밀원우승선 급사중(樞密院右承宣 給事中) 후(侯)의 딸이다. 17세에 염씨(廉氏,
廉德方)에게 시집와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순약(純若)은 순주(順州)의 수령이고, 차남 행약(行若)은 대학생(大學生)으로 선발되었는데, 모두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다음 아들 충약(忠若)과 그 다음 아들 신약(信若)은 모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충약은 평주(平州)의 수령이 되었다가 임기가 찼으나 아직 더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하고 있고, 신약은 현재 감찰어사(監察御史)이다. 큰딸 경애(瓊愛)는 예부시랑(禮部侍郞) 최루백(崔婁伯)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 정애(貞愛)는 주부(注簿) 이자득(李自得)에게 시집갔는데, 두 딸도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부인은 천성이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하여
가업(家業)을 잘 지켰다. 65세에 홀로 되었는데 시집와서 혼자되기까지 아내와 여자로서의 일에 일찍이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자녀들이 재주 있고 현숙하다는 칭찬을 듣게 한 것도 실로 어머니의 가르침의 결과였다. 하늘이 착한 이를 도우시니, 향년 80세로 금(大金) 태정(泰定) 2년
임오년(의종 16, 1162) 12월 보름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같은 달 23일을 정하여 서울 동쪽 인효원(因孝院) 동북쪽 산에 있는 복야(僕射) 염공(廉公)의 묘 옆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명(銘)하여 이른다. 지어미로서의 행실을 갖추어 닦았고 어머니로서의
도리도 다 하였다.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집안을 일으켰고 자애와 어짐으로 장수를 누렸네. 돌에 새겨 무덤에 넣었으니 향기로운 이름 사라지지 않으리라..
원문 檢校右僕射太府少卿廉公妻宜寧郡大夫人沈氏墓誌」
夫人姓沈氏少名志義故樞密院右承宣給事」 中諱侯之女也年十七適廉氏生四男二女長男」 曰純若行順州倅次行若補大學生俱先夫人」 而亡次忠若次信若皆中進士第忠若爲平州」 倅秩滿未階祿仕信若時爲監察御史一女瓊」 愛適禮部侍郞崔婁伯二女貞愛適注簿」 李自得兩女亦先夫人而亡夫人天性明惠勤」 儉克維家業年六十五而喪耦自嫁至于寡」 居其於婦事女工未甞少懈至使子女皆有才」 良賢淑之稱者實閨門之敎所致然也天祐聖」 善享年八十以大金泰定元年壬午十二月望」 卒於私第卜其月二十三日歸葬于京城東」 因孝院東北岡僕射廉公之墓傍禮也其銘曰」 歸行備修 母儀克茂 勤儉起家」 慈仁享壽 刻石幽扃 芳猷不朽
호족세력 : 왕건때부터 각지방 호족세력이 차츰 문신의 지위로 올라와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하는 숫자가 늘었다. 이들은 신라 "경주" 또는 원래 "호족시절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았다.
본관은 그들 세력의 상징이므로 문벌을 중요시했다. 호족출신 문신세력들은 세력확장을 위해 혼인정책을 사용했는데, 통혼대상의 가문이 유력할수록 명예스럽고, 가장 바라는 것이 왕실과의 통혼이었다.
이자겸은 딸을 예종의 비로 만들어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이기백, 1984). 이처럼, 염씨 가문에 있어서도 31대 공민왕의 5번째 왕비가 되신 분이 있는데 신비염씨였다.한자
: (豪族勢力), (文臣), (本貫), (門閥), (愼妃廉氏)
무신정권 : 염덕방이 검교우복야때 18대 의종(1146-70년)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이후 개경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즉위했다. 의종은 땅에 떨어진 왕권회복을 위한 친위세력 형성에 주력하여 환관과 내시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이들과 언관들 간에 치열한 힘겨루기를 했고, 그 사이에 멸시당했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를 계기로 발생한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반란은 관료사회의 무반 홀대에 반발한 반란이었다. 정중부는 이후 이의방,이고 등을 제거하고 최고집권자에 오른다. 거제도로 쫓겨난 의종은 1173년(명종 3) 김보당의 난에 연루되어 결국 천인출신 장군 이의민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정중부 역시 청년장군 경대승에 의해 살해된다(명종 9).
그리고 경대승, 이의민에 이어 1196년(명종 26)의 최충헌부터 1258년(고종 45)까지 60여년간 최씨집권기가 지속된다.(박영규, 1996). 高麗史 통권 17, 19, 20, 53, 54, 86, 87, 90, 94. 95. 96, 98, 99, 100, 101, 102, 123, 128.
7세:염신약(廉信若)
高麗史 : 통권 20권 世20권-02쪽 뒤8, 15쪽 뒤3, 31쪽 앞3 통권 73권 志27권-31쪽 뒤4, 통권 74권 지28권-13쪽 앞9
통권 99권 傳12권-28쪽 뒤9, 29쪽 앞4 뒤2, 30쪽 앞1 통권 123권 전 36권-08쪽 앞7.
7세 효문공 염신약, 본관 서원(파주), 염한의 손자, 염덕방의 4남이며, 1118년에 출생(예종 13년)하여 1192년 졸(명종 22년), 자는 공가, 고려의 문신, 슬하
1남 염극권, 2남이 염극모이시다. 염신약은 17대 인종(1122-46년)때 과거시험 문과 급제한후,
정당문학 예부상서 봉봉성태사에 이르셨으며, 75세에 별세후, 시호가 효문공으로 내려졌다.'86년 문헌록에는 태사공(太師公)이라 하였음. 한자
: (孝文公 廉信若), (公可), (政堂文學 禮部尙書 封峯城太師)
사망은 명종 22년
임자(1192년) 10월, 향년 75세. 묘는 경기도 풍덕군 남면 상귀리 백마산 남중록 동막동장유원간룡간좌 일찍부터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백호쪽에는 제실이 세워져 있다. 이는 고려조의 사패비다. 신약의 배위와 묘소는 실전. 숭정후 5년 경자 광무 4년(1900년)에 전남 보성에 계신 후손 주홍(周洪)이 재력을 모아 산하에 세장비를 세웠고, 재업(在業)씨께서는 수정성귀록 신유리지기는 나주에 계신 재균(在均)의
찬기로 되었다.
구보에 습유공(拾遺公, 4세 염현) 및 효문공(孝文公, 7세 염신약)의 소목(昭穆)에 관한 기록이 있으나 남대도호부부사병마간할겸근농사조산대부상서호부시랑사금어대극모(南大都護府副使兵馬幹轄兼勤農使朝散大夫尙書戶部侍郞賜金魚袋극모)의 묘지명(墓誌銘, 국립박물관 소장)에 의하며 소목이 밝혀졌음으로 생략한다(대동보 1986년판 1권 상계편 2-3쪽).
묘청 및 이자겸의 난 : 16대 예종(1105-22년)이 죽고, 인종이 14살로 즉위하면서 고려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에 인종은 장인 겸 외조부인 이자겸의 난으로 왕위를 빼앗길 뻔한 위기도 겪었고, 묘청의 서경세력과 김부식 중심의 개경세력 사이에 끼여 수동적 정치로 일관했지만, 인종은 선정을 베풀었고,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케 하였다.(박영규, 1996).(李資謙),(妙靑), (三國史記)
염신약과 명종 : 무신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한 19대 명종(제위 1170-97년 : 인종의 3남)은 세자때 염신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에 명종이 즉위하자 염신약의 은혜를 생각하여 '국자제주' 및 '한림시학강학사'를 제수했다.
염신약이 국정에 참여하던 명종때는 18대 의종때 일어난 [정중부의 난]을 계기로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일가까지 1백여년간의 본격적인 무신정권이 들어섰고(박영규, 1966), 문신 염신약은 무신 정중부를 극력 배척했다(대동보, 1986). 한자
: (世子), (武臣政權)
명종은 왕이면서도 힘이 없었고, 권력은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치열한 정권다툼으로 곳곳에서 잇따른 반란사건으로 국가기강은 무너졌고, 민심은 흉흉하며, 경제는 파탄지경이었다(박영규, 1996). 명종은 무신정권의 최충헌에 의해서 쫓겨났다(인터넷-고려왕실연대표).
관직
이력 : 염신약은 명종이 1170년 즉위하자 잠저때에 입힌 은혜로 1171년 국자제주, 한림시학강학사가 되었다. 56세때(1173년)
장작감, 시부로 선발했던 100여명 중 명사들이 많았다.
신약은 60세(1177년=명종 7)때 판대부사, 동지공거로 진사 35인과 명경 4인을 뽑았다. 그해 신약의 종이 정중부의 종과 다투다가 정중부에게 잡혀 죽었고, 신약은 파면되었다. 신약은 1178년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앞서 조위총이 허위사실을 풀어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하여, 사람을 보내 그것이 허위임을 밝히고 조위총의 사자로 금나라에 갔던 자를 영청현에서 잡아 죽였다.
신약은 62세때(1179년) 이부상서, 66세(1183년)에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 75세(1192년)에 정당문학, 예부상서였다(대동보, 1986). 한자
: (國子祭酒=종3품), (翰林侍學講學士=정4품), (將作監/궁중건축토목관청의 장),
(詩賦), (判大府事), (同知貢擧), (明經), (鄭仲夫), (西北面兵馬使),
(趙位寵), (永淸縣 : 龍川), (吏部尙書=총무처와 내무부장관),
(樞密院副使=정3품, 翰林學士 承旨=정3품), (政堂文學=중서문하성/종2품),
(禮部尙書=외무부 겸 문교부장관)
성품 : 염신약은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있으며 총명하여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광주장서기를 지낸 후 부친상때는 3년간 여막에서 시묘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염신약은 경서와 사기 중에도 특히 범엽의 한사, 특히 후한사에 능했고, 왕명에 의해 저술하는 고문대책은 한 때 그에게서 나왔다.
염신약은 지방관리로서 명예와 공적을 쌓아서 사람됨됨이가 몸이 크지 않으면서 담력이 커서 세상사람들이 제(齊)나라 명신 안평중과 비유할만한 인물이었다(대동보, 1986). 한자: (孝文公),(廣州掌書記),(侍墓),(孝子旌門),(漢史),(後漢史),(高文大策),(晏平仲)
문신 염신약과 무신 정중부 : 염신약의 봉성(파주) 논밭을 정권을 주무르던 정중부가 빼앗은 후에 돌려 주어서, 염신약이 종을 보내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수확했다. 이때 정중부의 종이 수확물을 다시 뺐으려 해서 염신약의 종과 싸움이 붙었다.
정중부가 염신약의 종을 죽여 버리고, 염신약을 탄핵하여 왕도 할 수 없어서 염신약을 파면했다. 그러나 곧 염신약은 이부상서, 서북병마사로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문헌록, 1986). 한자
: (田土), (吏部尙書=정3품), (西北兵馬使=정3품)
역사서로
본 염신약(信若)
고려사(高麗史
세가 20권, 73권-지 27, 74권-지 28, 123권-열전 36-염승익) 및 효문공열전(孝文公列傳, 고려사 99권-열전 12-염신약)의 기록(참고문헌 제시, 염태호), 또 여지(輿地) 및 파주인물지(坡州人物誌)의 내용.
자는 공가(公可),
시호는 효문(孝文). 출생은 예종 13년 무술(1118년). 관(官)은 정당문학 예부상서 봉봉성태사(政堂文學 禮部尙書 封峯城太師).
명종이 1170년 즉위하자 명종 원년 신묘(1171년) 임금이 세자(世子)때의 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은혜를 생각하시어
국자좨주(종3품), 한림시학강학사(정4품)를 제수하시었다. 명종 3년 계사(1173년) 3월 56세때 장작감(궁중건축토목관청장)이 되시어 시부(詩賦)로 김징위 등 28인과 10운시(十韻詩)로 이자우 등 78인의 명사를 취하시다.
명종 7년 정유(1177년) 4월 추밀원부사 문극겸 지공거와 판대부사 염신약 동지공거가 되어서 최기정 등을 포함한 진사(進士) 35인과 명경(明經) 4인을 뽑아 명사들이 많았으므로 왕이 더욱 중히 여기셨다. 명종 9년 기해(1179년) 7월에 이부상서가 되시다. 명종 13년 계묘(1183년) 12월에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로 발탁되시어 정당문학 예부상서 봉봉성태사에 이르러 사임하셨다.
신약의 사람됨이 몸은 작아도 담은 크셨다. 세상
사람이 춘추전국시대의 안영(晏孀)에 비유하였다. 인부(印符, 임금이 쓰는 도장)를 나누었고, 부월( 鉞, 옛날 중국에서 출정하는 대장에게 주는 형구/刑具)을 잡으매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총명박학하시어 범엽의 후한서(後漢書)에 능통하시었으니 한 때의 고문대책(高文大策)이 효문공(孝文公)의 집에서 많이 나왔다 한다. 아버지(德方)의 초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하셨으므로 충훈부 유사(忠勳府 有司)에게 명하여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효문공의 전토(田土)가 봉성(파주)에 있었는데, 정중부(鄭仲夫)가 이를 빼앗았다가 후에 돌려 보내는지라 효문공이 종을
보내서 가을에 수확하는데 정중부의 종이 다시 빼앗아 서로 격투하니 정중부가 효문공의 종을 죽였고, 효문공을 탄핵하였다. 왕이 부득이 효문공을 파면하였으나 이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였다가 뒤에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어 공을 세우셨다.
고려사(高麗史)와 염신약(廉信若)
1173년 장작감 염신약 : 고려사 74권-지 28 - 선거2 - 과목2 - 국자시지액-007 명종 3년 3월 장작감 염신약이 시부로 김징위 등 28명과 십운시로 이자우 등 78명을 뽑았다. 明宗三年三月將作監廉信若取詩賦金徵魏等二十八人十韻詩李滋祐等七十八人.
1177년 판대부사 염신약 동지공거 : 고려사 73권-지 27, 74권-지 28 명종 7년 4월에 추밀원부사 문극겸이 지공거가 되고, 판대부사 염신약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았고, 최기정 등 35명과 명경 4명에게 급제를 시켰다.
七年四月樞密院副使文克謙知貢擧判大府事廉信若同知貢擧取進士賜崔基靜等三十五人明經四人及第
1179년 이부상서 : 고려사 20권-세가
20-명종 2 경진에 염신약으로 이부상서를 임명하다. :
庚辰以廉信若爲吏部尙書.
1183년 추밀원부사 : 고려사 20권-세가 20-명종 2 12월 경인에 이광정을 수태보판이부사로, 한문준을 판병부사로, 문극겸을 중서시랑평장사 판호부사로, 문장필을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로, 두경승 염신약 조정원을 함께
추밀원부사로, 이의민을 공부상서로 삼았다.
十二月庚寅以李光挺守太保判吏部事;韓文俊判兵部事;文克謙爲中書侍郞平章事判戶部事; 文章弼同知樞密院事御史大夫; 杜景升廉信若曹元正 爲樞密院副使; 李義旼爲工部尙書.
1192년 염신약 별세 :
고려사 20권-세가 20-명종 2 기사에 정당문학 염신약이 별세하셨다. : 己巳政堂文學致仕廉信若卒.
염신약(廉信若)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 봉성 사람이다. 인종조 과거에 올라 광주장서기(廣州掌書記)로 조용되었고, 여러 번 관직이 옮겨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사람이 키는 작아도 담은
크다. 부(符)를 나누고 월(鉞)을 맡아서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있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제11권 京畿 坡州牧 人物考 高麗≫
1177년 판대부사 염신약
高麗史節要 제12권-明宗 1 : 정유 7년(1177년) 송(宋) 순희 4년, 금(金) 대정
17년
○ 판대부사 염신약(判大府事 廉信若)을 파면하였다. 먼저, 염신약의 구업전(口業田)이 봉성현(峯城縣, 현재 경기도 파주시)에
있었는데, 정중부(鄭仲夫)가 빼앗았다가 조금 뒤에 돌려 주었다. 가을에 이르러 염신약이 종을 보내어 수확했는데, 정중부의 집 종이 마중나와 빼앗으므로 서로 싸웠다. 정중부가 사람을 보내어 염신약의 종을 체포해서 가구(街衢)의 옥에 넣어 죽이고, 드디어 중방에 고하여 신약을 탄핵하니,
왕이 부득이하여 염신약을 파면하였다.
1183년 추밀원부사 염신약
高麗史節要 제12권-明宗 1 : 계묘
13년(1183년) 송(宋) 순희 10년 금(金) 대정 23년
○ 12월에 이광정(李光挺)을 수태보판리부사(守太保判吏部事)로 삼고, 한문준(韓文俊)을 판병부사로 삼고, 문극겸을 중서시랑 평장사로 삼고, 문장필(文章弼)을 동지추밀원사로 삼고, 어사대부
두경승(杜景升)ㆍ염신약(廉信若)ㆍ조원정(曹元正)을 모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삼았다. 조원정은 옥(玉)을 다루는 공장(工匠)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의종 때에 7품을 한도로 하는 벼슬에 있다가, 경인년에 의방을 도와 공(功)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통현(通顯)의 지위에 올랐다.
고려부인 염경애
KBS 역사스페샬(1999년 6월 19일, 8-9시
방영)
염경애(1100-46)는 6세
염덕방의 따님이며, 7세 염신약(1118-92)의 누님이 되시는 분으로서, 850여년전 고려시대에 사시던 선조 할머니이시다.
바로 이 할머니께서 [KBS 역사스페샬 : 고려부인 염경애(高麗夫人 廉瓊愛)]의
장본인으로 1시간 동안 방영된 바 있었다[1999년 6월 19일(토) 오후 8시].
묘지명(墓誌名)
: 고려시대는 죽은 이를 화장이던 매장이던 그 무덤에 가족관계나 평생의 일대기를 적는, 주로 돌로 만든 묘지명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이 중에서 현재 확인된 308개 중 생년월일과 자녀수가 확인된 것은 220여개이고, 묘지명을 남긴 이들은 주로 왕족, 관료와 승려들이었다.
(5백년 고려사, 박종기, 1999)
방송 원본 : 염태호는 KBS 홈페이지에서 1999년 6월 19일의 [고려부인, 염경애]의 방송원본 19쪽을 복사했다(1999.12.22). 이것은 남편(최루백)이 먼저 죽은 아내(염경애)의 무덤 석관벽에 적어 놓은 애절한 [염경애묘지명]을 기초로 [1986년판 파주염씨대동보]를 참고하여 방영된 것이었다.
출처 :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357쪽, 염경애묘지명=국립박물관 소장.
이를테면, 850여년전 고려시대 중상류사회에 속하는 한 가정의 부부관계, 가족관계와 같은 당대의 가족사, 염씨 문중의 존재와 위상, 당시 백성들 삶의 모습을 풍부하게 밝혀줌으로써, 대단히 소중한 역사적인 자료로 인정됨으로써 재조명을 받은 것이다.(염태호, 2000)
방송원고
있는곳
: '이곳으로 가시면 더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염씨 문중 : 염경애는 서기 1100년대의 고려시대에 선대 조상계보 중에서 그녀의 남동생이 되는 7세 염신약(廉信若)께서 재상을 지낸 상류사회 가문 출신이다.
우리 문중은 그후 공민왕 시절 충경공 염제신(忠敬公 廉悌臣)이 1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門下侍中=국무총리)을 두번이나 역임하셨다. 그리고 중시조 슬하의 삼형제(國寶, 興邦, 廷秀) 모두가 과거급제후 고위관직을 지낼때가 최고전성기였다 그러나 우왕(1374-88)때 최영에 의해 1388년 권력형 부정부패자로 몰린 다섯 가문의 50여명에 동정 염흥방과 연루된 우리 문중의 3형제와 일부 친족이 목을 베인 무진참화라는 불행한 가족사도 있다.(염태호, 2000)
염경애와 최루백의 결혼 : 850여년전 "고려부인 염경애"는 송도의 지체높은 집안의 딸인데, 그녀가 수원의 지체가 낮은 최루백과 결혼한 것은 남편이 당시 일등신랑감인 과거합격자라는 점과 최씨 집안의 현모양처로서 집안을 융성하게 만든 삶에 관한 소중한 역사자료라는 점이다.
이에 우리 문중의 가족적인 역사와 고려사회에 있어서의 가문의 위상 그리고 800여년전의 사회문화적인 생활상을 잘 알려주는 [고려부인 염경애]의 방송원본 중에서 우리 가문과 관련된 부분들을 '우리문화재
- 고려염경애'편에서 읽어 볼 것을 권장하는 바이다.(염태호, 2000)
8세 : 염극모(廉克髦)
시랑공 염극모(1156-1217), 본관은 봉성(파주의 옛이름), 고려 중기의 무신, 아내는 병부원외랑 김황백의 딸이다.(대동보, 1986). 1156년(22대 의종, 1146-70)에
태어나시어 1217년(고종4년) 9월 1일 졸하셨는데, 돌아가신후에 제작된 "염극모
묘지명"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한자
: 侍郞公, (峰城), (武臣),
(兵部員外郎), (金黃白), 墓地銘,
관직 : 염극모는 문음으로 관도에 올라 명종때인 1174년 삼척과 송림 현위, 성불도감판관, 1180년 강화도마장별감, 앞서 삼척현과 송림현의 우수한 공적으로 녹전을 받았다(이부우등록).
1181년 장생령 예빈주부, 1186년 연해도 추감세, 합문지후(정7품), 1198년(신종 1) 호부원외랑, 도관랑중, 1205년 예빈소경(종4품)으로 나주에서 근무하다 파직되었다.
1207년 좌사랑중으로 다시 발탁, 태부소경, 계양부, 1214년 위위소경, 공부시랑, 1215년 상서호부시랑 조산대부에
오르시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으셨다.
(대동보, 1986) 한자
: (門蔭 : 국가에 공을 세운 조상의 음덕으로 후손이 관료로 진출함),
(三陟), (松林) (縣尉), (成佛都監判官), (江華島馬場別監), 吏部優等錄,
(掌牲令禮賓主簿), (秋監稅), (戶部院外郞=정6품), (都官郞中=정5품),
(左司郞中), (太傅少卿=종4품), (桂陽府), (衛尉少卿=종4품), (工部侍郞=정4품),
(尙書戶部侍郞=정4품), (朝散大夫=종4품)
무신정권 : 염극모 생존시 실권자 최충헌의 지지로 22살에 즉위한 23대 고종(1213-59)은 최충헌 무신정권이 60년간 장기집권 기간 중에도 거의 안정기였다(박영규, 1996). 고려사회의 큰 변동은 무인상호간 정권 쟁탈, 천민 반란 등이 결과였고, 혼란수습자 최충헌은 무인으로 출세하여 조위총 토벌에 공을 세우고, 이의민 제거후 자기파에 속해도 명을 거역하는 자는 제거했고, 왕권을 무력화시켰다.
최충헌은 당대에 두분의 왕(19대 명종, 21대 희종)을 폐위시키고, 네분의 왕(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23대 고종)을 옹립할 정도로 무신정권을 뒷받침한 것이 사병 그리고 최씨 정권의 군사적 배경이 삼별초였다(이기백, 1984).
18대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 난으로 폐위되고, 명종은 정중부 추대로 즉위하여 최충헌에 의해 쫒겨났다. 희종은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쫒겨났고, 고종은 몽고침입으로 강화도 천도 28년간 항쟁하다 굴복하고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고자 8만대장경을 조판했다(고려왕실연대표). 한자
: (崔忠獻), (趙位寵), (李義旼),
(私兵), (三別抄)
염극모는 1174년(명종 제위
4년) 갑오에 벼슬길에 나서 삼척현(三陟縣)에서 2년만에 송림현(松林縣)에 다시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에 임명되셨다.
1180년(명종 10년) 경자에 강화도 마장별감(江華道 馬場別監)이 되시고, 앞서 2현의 정치적 치적(政績)이 우수하였으므로 이부(吏部)의 우등록(優等錄)에 기록이 남아있다.
1181년(명종 11년) 신축에는 장생령(掌牲令)이 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예빈주부(禮賓主簿)로 전직되어 상을 받으신 바 있다.
1186년(명종 16년) 병오 8월에 연해도 추감세(沿海道 秋監稅)가 되신 후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임명되셨다. 공은 벼슬 길에 몸을 담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외 출입 근무에 풍야로 일찍이 태만한 기색이 없었고 온갖 시설을 엄려간솔함을 근본으로 삼고 청렴불오를 주장한 바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1198년(신종 1년) 무오에 호부원외랑(戶部院外郞)으로부터 도관랑중(都官郞中)에 승진하고 재직중 복장을 하사받으셨다.
1205년(희종 1년) 을축 6월에
예빈소경(禮賓少卿)으로서 나주에 부임하신지 2년만에 면직이 되었는데 죄가 있어서 면직된 것은 아니다.
1207년(희종 3년) 정묘에
좌사랑중(左司郞中)에 발탁되어 태부소경(太府少卿)에 전임하여 계양부(桂陽府)에 부임하였으나 시류에 말려들지 아니할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죄로 인해 관직을 떠나 귀양간 것을 누차 경험하심으로 처연불락하여 술로 벗을 삼아 나날을 보내시었다.
1214년(고종 1년) 갑오에
위위소경(衛尉少卿)이 되어 공부시랑(工部侍郞)에 임명되셨다.
1215년 겨울에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전임되셨다. 공은 연로하시어 날로
수척하여지시더니 춘추 65세에 사망하셨다.
염극모공은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딸은
내시급제 소연주에게 시집가고, 두 아들은 불행하게도 공보다 앞서서 사망했다. 아들 후(珝, 상계 9세)는 일찍 문자로서 시험에 합격 급제하였다.
공은 화장 후에 습골하여 곽동종천의 양지에 장례를 모시려 할 때 다시 와서 묘비명을 청하므로 묘비명에 이르되 청백하고 또한 통록하였으나 예의에
벗어난 일은 없었다. 날짐승도 그 덕에 감동할만큼 착하였는데 오래오래 살지 못하고 땅속의 외로운 혼이 되었구나(파주염씨대동보 1권 상계.
1986. 3-4쪽).
9세 : 염 후(廉 珝)
高麗史 통권 22권 世 22권-01쪽 뒤9줄, 통권 73권 志 27권-35쪽 앞6줄
9세 염 후 :
생졸미상, 시문에 능숙했고, 제23대 고종때 최충헌 무신정권이 강력해지던 1215년 과거에 급제했고,슬하에 수장을 두셨다(대동보, 1986).
염 후의 출생은 부친 염극모(1156-1217)를 고려하면 19대 명종때인 1170년대쯤인 것 같고, 사망년대는 추정하기가 곤란하나, 부친보다 먼제 돌아가시어 높은 벼슬을 못하신 것으로 안다. 한자 : (廉 珝), (詩文), (科擧), (守藏)
염후(廉珝) 등 31명 급제 : 高麗史 73卷- 志 27-選擧 1-科目 1-039 고종 2년(1215년) 5월에 평장사 최홍윤이 지공거가 되고 좌간의대부 박현규가 동지공거가 되어서 염후(廉珝) 등 31명에게 급제를, 명경에서 7명에게 급제를, 은사 5명에게 급제를 시켜서 진사로 뽑았다(高宗二年五月平章事崔洪胤知貢擧左諫議大夫朴玄圭同知貢擧取進士賜廉珝等三十一人明經七人恩賜五人及第).
우리 염문의 과거시험
장원급제자 명단 고종 1년(1215년) : 염후(廉珝), 본관 및 관직 미상. 충렬왕 (1284년) : 염수정(廉守貞, 염승익의 형님)
공민왕 6년(1357년) : 염흥방(廉興邦), 본관 파주(坡州), 정3품 삼사좌사(三司左使)
해설 : <고려사>에는 각 왕대에 과거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개 외 몇 명이라고 한 명만 이름을 밝혀 놓았다. 여기서 이름이 밝혀져 있는 아무개는 장원급제자라고 여겨진다. 고려 초만 해도 이들 장원급제자의 본관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후기로 갈수록 본관을 달아 놓은 경우가 많다. 고려 24대 원종 때에 들어 과거 응시자들로 하여금 답안지 첫머리에 본관을 표기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급제자들은 모두 성이 있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관리는 물론 공신들도 모두 성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본관 제도는 정착되지 않았지만, 혈족을 나타내는 성씨는 많이 등장했다고 한다(출처 : "흥하는 성씨 사라진 성씨", 김정현 지음, 조선일보사, 2001년 8월).
10세 : 염수장(廉守藏)
高麗史 통권 129권 전 42권-35쪽 뒤2줄
소부공 염수장 :
생졸미상, 관직은 태자소부 예빈경, 1228년(고종 15) 학록일 때 국학박사 김정립과 백량필이 항상 미워하였고, 시정을 비방한다는 참소를 당해 신초도로 귀양갔다(대동보, 1986).
염수장의 출생년도는 20대 신종(1197-1204), 희종(1204-11) 또는 22대 강종(1211-13)때로 짐작된다. 염수장이 학록이던 23대 고종때(1213-59)는 최씨 무신정권 시절이고, 몽고가 전성기에 들어섬에 따라서 고려와 아시아 국가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몽고의 무서운 팽창정책으로 고려는 수십년간 대몽항쟁을 전개했다(박영규, 1996).한자 :
(小傅公 廉守藏), (廉純彦),
(太子少傅禮賓卿=종3품/이사관), (學錄=국자감/정9품),(時政),
(神草島),(對蒙抗爭)
수장의 사위 :
수장은 1남(순언/純彦)과 2녀를 두었다. 큰 딸 원부(元傅)는 남편이 문순공 원주인(文純公 原州人)이며 3남(원관, 원후, 원경)과 1녀를 두었다. 둘째 딸의 남편이 안유(安裕, 일명 안향/安珦, 문성공 순흥인/文成公 順興人이며 1남 5녀를 두었다(파주염씨대동보 1권 상계. 1986. 4-6쪽).
근거는 순흥안씨 안유 문성공란에 아내는 후실 예빈경 서원염수장녀라고 기록되어 있다(종보12호 8면, '씨족원류의 내용'', 염종환). 이는 문성공 안향이 우리 집안과 혈연관계임을 밝혀 주는 것이다.
안향(1243-1306)은 1260년 문과 급제, 교서랑, 정동성의 원외랑을 거쳐 고려유학 제거(提擧)가 되고, 이 해에 충렬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연경에서 <주자전서>를 필사하여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여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한 분이시고, 그의 후손이 도산 안창호와 안중근 의사이시다. 한자 :
(安珦, 일명 안유/安裕),(安裕 文成公),(禮賓卿 瑞原廉守藏女)
염수장의 기록에
대한 고증 : 글 염종환
풍양 조종운(豊壤 趙從耘, 1607-1683)이 1657년경 발간한 [씨족원류(氏族源流)]라는 책을 근거로
'벽강 염종환'은 염수장의 가족관계를 아래와 같이 고증하였다.
"수장(守藏)"란에서 배위(配位) 지삼사사(知三司事) 의녕심문준녀(宜寧沈文濬女)의 기록은 있지만 씨족원류에 의녕심씨계보(宜寧沈氏系譜)가 없어서 확인을 못했다. 그러나 사위에 원주원씨
"전(傳)" 문순공(文純公)란에 배(配) 태자태전(太子太傳) 파주염수장녀(坡州廉守藏女) 봉봉성군부인(封峯城君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순흥안씨 "유(裕)" 문성공(文成公)란에 후실 예빈경서원염수장녀(禮賓卿瑞原廉守藏女)이었다.
또한 염문족보에는 기록이 없으나 양천허씨 "허숭(許嵩)" 양숙공(良肅公)란에 보면 실소전(室少傳) 서원염수장녀(瑞原廉守藏女)의 또 한 분의 사위가 있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수장"님에 대한 기록이 다른 문중의 계보에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양천허씨 허숭의 아들, 종(琮)의 기록에 충목왕 원년(1345) 1월 사망한 것을 참고로 하면, 수장의 생년(生年)은 1207년으로 추정되나 상(上), 하(下) 연계는 알 수 없다(파주염씨종보 1999년 제12호 8면, 씨족원류의 내용. 글 염종환).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 1243-1306)은 10세
염수장의 사위이시다(파주염씨종보 1999년 12호 6면, 가훈(유계,가규). 글 염상현/대종회 부회장).
11세 : 염순언(廉純彦)
11세 문정공 염순언은 10세 염수장의 아들, 관직은 소부승, 추증관직은 은청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 슬하에 1남은 염수정, 2남은 염승익이시다. 장남 염수정은 1247년 과거에 급제, 관직은 소부윤 지제고였다(대동보, 1986).
한자 :
(文正公), (小府丞=종6품/5급사무관), (銀靑光祿大夫), (門下侍郞平章事), (判吏部事), (廉守貞), (廉承益), ((少府尹=국가재산 보관 관청의 직책; 知製誥=왕의 조서, 교서 등을 지어 바치는 벼슬)
12세 : 염승익(廉承益)
충정공(忠靖公 : 출생미상~1302)은 파주염씨 상계(上系) 12세로 휘는 승익(承益)이며, 자(字)는 유직(惟直), 시호는 충정이다. 부친 염순언의 차남이며 슬하 염세충을 두셨다. 고려의 문신이며, 정당문학, 1260년대(24대 원종)부터 관직생활을 하셨는데, 벼슬은 흥법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천리감찰사사(與法佐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都僉議中贅 上將軍 判典理 監察司事)를 역임 하시었다. 첨의중찬(僉議左中贊)은 고려때 첨의부(僉議部)의 종1품 벼슬, 25대 충렬왕 1(서기 1275)년에 첨의부를 설치하고, 종래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고친 이름인데, 좌우에 각각 1인씩 첨의 좌중찬(僉議左中贊)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이 있었다가 26대 충선왕때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후에 다시 첨의중찬으로 고쳤다.
※. 충정공 염승익 선조의 자세한 추가 자료는 별도 페이지에 있음.☞
참고 : 종보 제13호 6면 '손 바닥으로 어찌 하늘을 가리는가'에 기술되어 있음.
파주염문과 불교 : 고려는 국교가 불교였고, 또 파주염문의 선조분들은 거의 불교의 독실한 신봉자라고 본다. 파주염문에서 불교를 신봉했다는 근거로서 충정공 휘 승익(忠靖公 諱 承益)께서 왕명에 의해 남계원 7층석탑(南溪院 七層石塔-국보 100호)을 세우셨다. 근년에 와서 이 석탑을 옮기게 될 때, 그 기단부에서 발견된 법화경(法華經) 7책의 말미에서 왕가(王家)와 염문일가(廉門一家)를 위한 축원문(祝願文)이 적혀있다. 이를 보아도 충정공께서는 불교를 신봉하셨고, 또 도첨의중찬의 재상직을 역임하시고 물러나 곧 삭발하시고 스님이 되신 기록이 고려사에 적혀있다.(종보 12호 6면 : "나의 생각 타인의 생각". 벽강).
고려사 자료 : 통권 29권 世29권-09쪽 뒤1, 13쪽 앞7, 45쪽 앞1, 46쪽 뒤6, 48쪽 뒤1, 30권 세30권-07쪽 앞7, 11쪽 앞8과 뒤4, 12쪽 앞2, 20쪽 앞6, 28쪽 뒤5, 39쪽 앞6, 31권 세31권-06쪽 뒤2, 32권 세 32권-10쪽 앞9, 33권 세33권-01쪽 뒤9, 통권 104권 傳17권-45쪽 앞9, 105권 전18권-25쪽 앞3, 106권 전19권-10쪽 앞6, 107권 전20권-05쪽 뒤6, 111권 전24권-01쪽 앞5, 123권 전36권-08쪽 앞6과 뒤4, 09쪽 앞1과 뒤1, 10쪽 앞3과 뒤1. 11쪽 앞1, 12쪽 앞5, 16쪽 뒤5, 24쪽 앞7, 130권 전43권-36쪽 뒤9, 37쪽 앞1, 131권 전44권-01쪽 앞9.
13세 : 염세충(廉世忠)
중현공 염세충은 12세 충정공 염승익의 아들, 생졸미상, 아내는 가순택주 조씨, 슬하에 1남은 염효신, 2남은 증흥1세조 염제신, 세충의 관직은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이셨다(대동보, 1986).
염세충은 그의 2남 염제신(1304-82)이 6세때에 별세하셨으므로 사망년도는 1309년일 것이다. 한자 :
(中顯公 廉世忠), (嘉順宅主 趙氏, 평양부원군 조인규의 딸),
(廉孝臣, 생졸미상, 삼사좌윤/三司左尹), (廉悌臣), (中顯大夫=종3품),
(監門衛大護軍=무관직,종3품)
평양부원군 조인규 : 세충의 장인 및 충선왕의 장인, 충정공 염승익과 함께 원에 다녀온 사신, 관직은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사였다.한자(平壤府院君 趙仁規), (忠靖公 廉承益), (使臣), (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 (都僉議事=중서문하성 문하시중=국무총리)
高麗史 : 조인규 통권 28권, 29권, 30권, 31권, 32권, 33권, 58권, 89권, 91권, 104권, 105권, 110권, 118권, 122권, 123권, 125권, 130권, 13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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