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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재신 충경공 염제신

파주염씨 중시조 충경공 염제신

  • 파주염씨 1世 諱  제신(悌臣 ; 1304. 10. 30 ~ 1382. 3. 18)
     
  • 관작
    高麗國 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曲城府院君
    고려국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곡성부원군
     
  • 관명 : 門下侍中(문하시중) 
     
  • 시호 : 忠敬公(충경공).      (號) : 梅軒(매헌)
      
 
 

백과사전의 염제신 편
 
염제신
廉悌臣 (1304-1382)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 아명은 불노. 자는 개숙. 할아버지는 충정공 승익이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고모부인 원나라 평장사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라다가, 원나라 태정황제의 눈에 들어 궁중으로 들어갔다. 수년간 황제를 시종하다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고려에 다녀간 뒤 상의사가 되었다.

다시 어머니 봉양을 청하여 고려로 와서 정동성낭중이 되었는데, 정동성에 있는 동료들의 횡포를 극력 제지함으로써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다. 원나라에 다시 소환되어 익정사승이 되었으며, 절강성에 사신으로 갔다. 그곳의 중정원에서 전화를 회계했는데, 뇌물을 써가며 아첨하는 관리들을 모두 물리쳤다. 이 소식이 퍼져 원나라 순제가 등용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고려로 돌아왔다.

충목왕 때 이사우사로 임명되고 수성익대공신에 봉해졌으며, 이어 도첨의평리로 전임되었다가, 1349년(충정왕 1) 찬성사로 승진했다. 1354년(공민왕 3) 좌정승이 되었으며, 1354년 대호군이 되었는데, 그해 원(元)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자, 유탁·염제신 등 40여 명의 장수 및 군사 2,000여 명이 함께 파견되어 원나라의 고우·사주 등지에서 장사성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호를 받았다. 이때 원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곡성부원군에 봉해진 뒤 유탁 등과 함께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가 그해 10월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1356년 친원파를 처단한 뒤 원나라로부터 책망당할 것을 염려한 공민왕이 그를 서북면도원수로 임명하여 원나라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해 수문하시중이 되어 국경지대를 수비하는 군사들을 반년 만에 교대시킬 것과 부모상을 당하면 넉넉한 휴가를 줄 것을 청했다. 1361년 사직했다가 다시 우정승이 되었는데,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갔다는 이유로 고신대간들의 서명을 받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다음해에 도첨의사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권력자인 신돈에게 굽히지 않았다. 1371년 오로산성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로서 전쟁에 참가한 뒤 곡성백에 봉해지고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1374년에 우왕이 즉위한 뒤 영삼사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영문하부사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 호를 첨가하여 받았다. 시호는 충경이다.

한자 : (瑞原). (佛奴). (愷叔). (忠靖公), (承益), (泰定皇帝), (尙衣使), (征東省郎中), (翊正司丞), (浙江省), (中政院), (錢貨), (順帝), (二司右使), (輸誠翊戴功臣), (都僉議評理), (贊成事), (大護軍), (南征軍), (柳濯)· (廉悌臣), (高郵)·(四州), (張士誠), (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 (曲城府院君), (柳濯), (守門下侍中), (告身), (臺諫), (都僉議司事), (辛旽), [兀剌山城], (曲城伯), (領三司事), (領門下府事), (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忠敬)

  참고문헌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연구논문

 1. 역사자료 : 충경공 염제신에 관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역사서 기록 내용을 발췌하여 연대 순으로 게재하였으니 참고하세요.(이곳을 누르세요)

 2. 중시조 염제신에 대한 연구 논문 등 
    ①. 이희덕(李熙德, 1973) : 고려률(高麗律)과 효행사상(孝行思想)에 대하여. 역사학보 제58집 77-1-4쪽. 1973년 6월 서울 역사학회.
    ②. 홍영의(洪榮義, 1991) :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군사활동(국방개혁을 중심으로)  군사 23, 91-122쪽. 1991년 12월. 서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자료게시 : '(여기를 누르세요)',   종보 제6호, 제7호 6~7면. 
    ③. 권태원(權兌遠, 1994) : 염제신(廉悌臣). 대전문화 3.    133-138쪽.    1994년 12월 대전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자료게시 : '(여기를 누르세요)',

  1. 중시조님의 일생 요약(1304-82) -고려의 문신과 무신-

  충경공 염제신의 년보(1304.10.30-1382.03.18)

1304년(충열왕 30) : 10월 戊申일 출생, 도첨의중찬을 지내신 충정공 승익의 손자이며, 부친 세충과  
                              모친 가순택주조씨의 2남, 아명은 불노(佛奴), 자는 개숙(凱淑)임

1309년(충선왕  1 ) : 6세때인 乙酉 11월 28일에 부친 대호군 염세충께서 별세하심

1314년(충숙왕  1 ) : 11세때부터 10년간 원의 고모부 말길(중서평장사)의 집에서 공부

1324년(충숙왕 11) : 21세때 원의 태정황제를 모시는 금중의 숙위로 임명됨

1326년(충숙왕 13) : 23세때 모친 방문을 원제께 고하니 금강산에 강향케하고, 금자원패를 내림

1329년(충숙왕 16) : 귀국후 원으로 다시 돌아가 상의사를 제수받음

1333년(충숙 복 1) : 30세때 순제께 귀국을 청하자 정동성낭중으로 임명 귀국, 왕의 신임받음

1340년(충혜 복 1) : 왕의 승하로 9년만에 원으로 돌아가 익정사승(품계; 봉훈대부)에 제수됨

1343년(충혜 복 4) : 40세때에 원나라의 절강성 봉명사, 중정원 회계감사, 영구 귀국

1346년(충목왕 2 ) : 43세때에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에 제수

1347년(충목왕 3 ) : 44세때 중대광 수성익대공신호를 받고, 곧 도첨의평리, 12월에 찬성사에 제수

1348년(충목왕 4 ) : 45세때에 판판도사사에 승진되고 원에 다녀옴

1349년(충정왕 1 ) : 46세때 충정왕(1349-51),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가 됨.

1350년(충정왕 2 ) : 47세때에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 옴

1353년(공민왕 2 ) : 조일신의 사감으로 등용치 못함, 공민왕(1351-74)의 즉위로 찬성사에 복직

1354년(공민왕 3 ) :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중대광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상호군 영경령전사제수,
                             우정승판전리 영효사관사 곡성백에 봉해짐. 원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여 구원군
                             지휘관으로 참전, 그간의 한국관료로서는 프랑크제국(독일) 사신을 최초로 접견함,

1355년(공민왕 4 ) : 52세때에 1남 염국보 과거시험 급제

1356년(공민왕 5 ) :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친원파 처단. 원의 공격 대비 서북면 도원수가 되었고,
                             곧 개부 의동삼사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를 제수받음.

1357년(공민왕 6 ) : 54세때에 2남 염흥방 과거시험 장원급제

1357년(공민왕 6 ) : 판리부사 영효사관사로 승진

1361년(공민왕 10) : 58세때 홍건적 침입으로 어가호종하며, 모친을 피란 못해서 파직.

1362년(공민왕 11) : 59세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가 됨.

1363년(공민왕 12) : 60세때에 시중에 기용되었으나, 공의 모친 상으로 사직

1364년(공민왕 13) : 1월 영도첨의사사가 되고, 9월에 서북면 도통사가 됨.

1369년(공민왕 18) : 66세때 서북도통사에 보국이 더해졌고, 공민왕이 친필 염제신상을 하사,
                             그후 삼중대광에 특진, 곡성백에 봉함.딸이 공민왕의 부인 신비로 책봉 됨.

1371년 : 68세때 3남 염정수 과거 급제, 세아들의 급제로 부인권씨가 진한국대부인에 봉해짐.

1374년(우왕즉위) : 71세때 영문하사 영서연사 제수 문하시중 중임.
                             공민왕 사망후 32대 우왕 즉위(1374-88), 광주유배.

1375년(우왕 1 ) : 72세때에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사가 되고 나머지도 전과 같이 유지

1376년(우왕 2 ) : 73세때에 원나라에서 공에게 자덕대부 장작원사 벼슬을 내림

1377년(우왕 3 ) : 74세때에 도총도감을 설치하고 5부의 병마를 훈련.

1379년(우왕 5 ) : 76세때 판문하사, 부원군으로 다섯 임금을 섬긴 원로가 되심

1380년(우왕 6 ) : 영삼사사가 되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짐.

1382년(우왕 8 ) : 3월 18일 79세로 별세,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으로 내려짐

1384년(우왕 10) : 목은 이색이 왕명에 의한 봉교찬 비문을 새긴 충경공신도비 건립

     이상과 같은 중시조이신 충경공의 일생을 아래에서 자세하게 소개할 것입니다.

  2. 성장과정

  출생 : 염제신은 원(元)의 고려 간섭기(1273-1352)였던 충렬왕때(1274-1308), 충정공 승익의 손자로서 부친 염세충과 모친 가순택주조씨의 2남으로 1304년 10월 30일 태어났는데, 출생시 부터 기모가 청수하고 체격이 장대하여 대인의 기상을 보였다(대동보, 1986).

조부는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역임한 염승익,   외조부는 조인규이시다. 조인규는 충선왕의 장인이고, 뒷날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을 사전에 주도했던 조준의 증조부이시다.
한자 : (廉世忠),(嘉順宅主趙氏=평양부원군 조인규의 딸), (氣貌),(廉承益),(趙仁圭),(趙浚)

3살때 : 제신은 3세때 무릎꿇고 앉아 젖을 먹었는데, 어느때는 어머니가 젖에 조그만 종기가 난 것을 '여기가 아프다'고 말씀하니까, 그 때부터 젖을 않먹고 죽만 먹었다고 한다.
부친은 본인이 병환이 들자 부인에게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일이 있었고, 또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우니 보통 아이가 아니오.

옛날에 태사공께서 효성이 지극하기로 알려져 특별히 정려하도록 명하였는데, 지금 이 아이가 또한 그러하니,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을 것이오.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사람이 이 아이이니, 부인은 이 아이를 잘 기르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문헌록, 1986).한자 : 태사공(廉信若), (旌閭)

6세때 부친 별세 : 제신은 부친의 말씀에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씀을 올렸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었음을 아시면서 왜 의원에게 물어 약을 쓰지 않으시고 가만히 누워서 천명만을 기다리십니까 ?'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지자 제신이 '아버지께서는 오랫동안 누워 계셔서 입맛이 없으실터이니 반드시 잡수시고 싶은 것을 말씀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후 제신은 때 아닌 오이와 흰새의 알을 구해 올 정도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제신이 6세때인 기유년 11월 28일에 부친이 돌아가셨어도 몸을 바르게하여 보통사람에 비할 바 아니었다(충경공매헌선생충효록, 문헌록, 1986).

10세때 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함 : 제신은 어머니가 보기에 글을 배우지 않는 것이 민망하게 여겨 원에 계신 고모부 말길의 집에서 공부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런데, 말길 역시 제신의 재주와 사람됨을 듣고 있던 터라, 사람을 보내 제신을 데려 오게 하였다.

그랬더니 제신은 '내가 떠나 버리면, 어머니는 누구와 의지해 사시겠습니까 ? 길은 멀고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서 소식을 듣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제신에게 '어려서 배우는 것은 뒤에 커서 그것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또 사람이 출세하여 명예를 드날리는 것이 지극한 효도라고 하였는데, 네가 왜 가지 않으려고 하느냐 ?'라고 말씀하니, 제신은 마지 못해 원에 공부하러 가기로 결정했다(충경공매헌선생충효록 : 문헌록, 1986).

 

 3. 원에서의 성장 및 관료생활

원에서 공부 : 제신은 11살때(1314년)에 모친의 말씀에 따라 원의 고모부 말길의 집에서 북학을 공부했다. 이 때 말길은 조카 염제신에게 덕행이 높은 선비들을 가려서 가르쳤으며, 제신은 덕행과 기국이 어엿하게 성취되어서 이미 어른스러웠다(문헌록, 1986).

황실 금중숙위 : 제신은 21살때(1324년) 태정황제(泰政黃帝) 즉위식에 고모부 말길과 화림에서 어가를 맞이했다. 황제는 제신을 만나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서 총애를 받아 금중숙위가 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제신에게 자덕(資德)의 직함으로 지위와 명망이 높도록 지극히 돌봐주었다.
한자와 해설 : (嘉順宅主趙氏), (末吉, 中書平章事=부수상급), (北學), (御駕), (禁中宿衛=황실근위대)

황제는 대신 말길을 가장 신임하여 혹시 말길이 몸이 아파서 조정에 못 나오면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제신에게 명하여 말길의 집에 가 자문받아 오던가, 말길이 황제에게 전할 내용은 반드시 제신을 통해 전달하도록 제신은 황제의 아낌을 받았다(문헌록, 1986, 276-296).

정동행중서성 : 고려 25대 충렬왕은 원의 지나친 내정간섭을 받게 만들었다. 충렬왕은 원종의 장남, 연경에서 1274년 원 세조(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계리미실과 결혼한 원의 부마로서,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귀국한 39세 즉위 무렵 고려는 급속히 식민지로 전락했다.

원은 일본 정벌 목적으로 1280년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여 일본정벌 포기 이후에도 존속시켰다. 정동행성 책임자 '좌승상'에는 자동적으로 '고려왕'이 임명되도록 만들었고, 왕은 오직 관리들만 임명할 뿐이었다. 원은 정동행성을 통해서 고려와 원과의 연락기관 또는 고려의 정치를 간섭하고 있었다(이기백, 1984).   한자와 해설 : (忠烈王: 1274-1308), (征東行中書省 약칭)

 

  4. 3차례 귀국 및 원에서의 행적

1차 귀국 :  염제신(23세)은 고국을 떠난 지 12년만인 1326년 27대 충숙왕때 원의 태정황제에게 모친의 안부를 살피고자 귀국을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제신의 효성에 감복하여 다녀오되, 반드시 금강산 관광을 명하면서 금자원패를 내렸다. 이것은 제신의 행차를 훌륭하게 꾸며줌으로써, 제신으로 하여금 원나라에 빨리 돌아오도록 한 배려였다. 제신이 고려 조정에서 일할 때에 원의 사신들이 고려재상들을 함부로 모욕하고 수령보기를 짐승처럼 취급했었다.
그러나 제신은 원황제의 봉명사신으로서 오직 재상들과 관장들에게 예로써 대하여 칭송을 받고 있었다. 제신이 원에 되돌아오자 황제는 제신에게 상의사를 제수했다(문헌록, 1986).
한자와 해설 : (金剛山), (金字圓牌), (奉命使臣), (尙衣使=왕의 옷과 궁내옷감을 관장)

2차 귀국 : 1331년 제신(28세)은 2차 귀국때(28대 충혜왕, 1330-32, 39-44)도 언행을 더 삼가고 조심했다.  이를 본 고향의 노인들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어른 못지 않다. 이 사람이야 말로 조부 문하시중(염승익)의 손자요. 외조부 문하시중(조인규)의 손자임이 분명하도다"라고 감탄했다(대동보, 1986).

3차 귀국 : 제신의 나이 30세이던 1333년, 3차 귀국때(충숙왕때)는 황제로부터 정동성낭중에 임명되었다(대동보, 1986).

정동성낭중 염제신은 고려 조정에서 원의 벼슬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동료들의 심한 농간을 극력 저지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 농민들의 송사일체를 관계당국의 유사에게 돌려서 처리함으로써, 충숙왕이 "염낭중(廉郎中)은 참으로 청백하고도 검소하도다"라는 칭찬과 신임을 했다(문헌록, 1986, 754-770).
충숙왕은 충선왕(1275-1325)의 2남, 줄곳 원에 있다가 충선왕의 양위로 20세에 즉위했다(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원에서의 행적 : 제신 나이 37세(1340년)인, 고려 체류 9년만에 충숙왕이 죽자, 원에 불러들여 익정사승을 제수했다. 제신이 40세(1343년)때는 강소성과 절강성 봉명사중정원의 회계감사를 할 때 관리들이 많은 뇌물로의 아첨을 하였는데 일체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승상 별가불화황제에게 말씀드리니, 황제는 제신의 청백함을 알고 장차 크게 쓰려고 점찍을 즈음 고국의 모친이 중병을 앓고 계셨다. 원에서의  염제신의 품계는 자덕대부, 장작원사였다(문헌록, 1986).  
한자와 해설
 : (翊正司丞=품계 봉훈대부). (奉命使=특명전권대사), (中政院), (別哥不花), 황제(順帝, 1333-38; 고려여인 기황후 남편), (資德大夫), (將作院使)

 

  5. 염제신의 행적(공민왕과 우왕 때)

  좌정승, 우정승, 곡성부원군 : 염제신은 공민왕때인 1354년(51세) 좌정승, 우정승,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의 호가 내려졌다. 당시 정승은 채하중, 제신은 관직을 물러나서 곡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대동보, 1986). (고려사 : 곡성부원군 염제신 : 통권 38권 世 38권-22쪽 뒤7, 통권 89권 傳 2권 33쪽 앞1, 통권 111권 전 24권-2쪽 뒤1, 통권 126권 전 39권-27쪽 앞5, 열전 39권 27쪽 앞5).
한자 : (左政丞),(右政丞),(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蔡河中),(高麗史),(曲城府院君 廉悌臣)

원나라의 내란에 원병 지휘관으로 출정 : 염제신이 고려에서 서정쇄신하던 때 원의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인접 국가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박영규, 1996).
염제신이 곡성부원군으로 봉해진 1354년 6월 원에서 고려에게 원병을 요청해 왔다. 이에 염제신은 최영, 유탁등 장수 40여명과 군사 2천여명을 이끌고 원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염제신이 지휘관으로 원나라에 체류하던 1354년에 공민왕이 원에 사신을 보내 제신의 귀국을 요청하니 원황제는 10월에 제신은 고려대신이라면서 휘정원에서 극진한 예우로 잔치를 베풀고 귀국을 허락했다고 한다.
(대동보, 1986).  한자 : 崔瑩), 유탁(柳濯), (高麗大臣), (徽政院)

1354년 염제신의 프랑크제국 대사 최초 접견 : 염제신은 원에 지휘관으로 출정중이던 1354년 한국관료로서는 최초로 프랑크제국(독일)의 사신을 만났다는 기록이 나타났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역사상 고려와 독일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 접촉이었다. 그후 한국과 독일과의 교류는 문헌상 이수광지봉유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뒤에는 19세기까지는 별로 접촉이 없었다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세력이 조선에 개항을 요구할 무렵 접촉이 재개되었다.

즉, 조선의 문호개방정책에 따라서 1882년에 한독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수교하여 1883년 무렵 묄렌도르프 등 독일인이 조선에서 활동했다가 일제시대에 중단되었다가 1955년 12월 1일 한국과 서독이 서로간에 국가를 인정하고 양국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http://www.nobelmann.com/history/deutsch/gerhistory11.htm)
한자 : (李粹光), (芝峰類說), (韓獨修好條約)

서북면도원수 : 공민왕은 1356년 반원정책에 따라 원의 세력을 업고 권세와 횡포를 부린 친원파를 제거 후 원의 견책을 두려워하던 중 염제신(53세)을 서북면도원수, 유연김지순을 부원수로 보좌케하고 제신에게 "염공은 나에게 만리장성이니 경이 떠난 후 내가 북쪽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대동보, 1986).

서북면 도원수  염제신은 만약을 대비하여 성을 구축, 군비를 강화, 군사들을 지휘할 때, 군량과 말먹이를 첫째로, 성곽 수리를 둘째로, 병기 정비를 셋째로 삼았다.(문헌록, 1986).
염제신은 마음에 모든 책략이 정해 있었지만, 부하의 뜻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사 최영과 의논한 후에야 결정내렸다.  (문헌록, 276-296)
한자 : (西北面都元帥), (柳淵), (金之順), (廉公), (副使= 종4품)

수문하시중 : 공민왕은 1356년 11월 염제신에게 수문하시중을 제수하여 제신이 재삼 사양해 허락받지 못했다. 이 때에 요승 신돈과 간신 김흥경 등이 여러번 모함했지만 공민왕은 끝까지 염제신을 신임했다.  당시 익제 이재현은 문하시중, 염제신은 수문하시중, 이색이부시랑이었다(문헌록, 1986).
한자 : (守門下侍中=종1품/부총리), (辛頓), (金興慶), (李齋賢), (李穡), (吏部侍郞=정4품/부이사관)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후 : 공민왕은 1361년 홍건적 침략으로 경기 광주와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1362년 봄 왕은 염제신(58세)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을 제수했고, 곡성후로 봉한지 얼마 안 되 홍건적이 개성을 함락하여 공민왕이 충청도와 경상도로 몽진(임금님의 피란)할 때 염제신이 어가를 모셨다.

1363년 1월 홍건적 평정후 공민왕이 청주에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염제신이 여러 재상과 '흥왕사'에서 축수의 잔을 올리자 공민왕은 "뜻밖에도 오늘에야 송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경들의 공이로다"라고 말씀했다(대동보, 1986).    한자 : (璧上三韓三重大匡=정1품), (曲城候)
흥왕사=(1067년 개성 덕적산에 건축, 문종의 원찰, 초대주지는 대각국사 의천/義天)

우정승, 영도첨의사사, 삼중대광, 곡성백 : 공민왕은 1363년 3월 제신(59세)에게 우정승을 제수, 최 영은 판밀직사, 그후 영도첨의사사, 삼중대광으로 특진, 곡성백으로 봉해졌다
(대동보,1986);  고려사 : 곡성백 염제신(曲城伯 廉悌臣)-통권 39권 세39권-10쪽 앞9, 통권 43권 世43권-9쪽 앞1, 통권 64권 志18권-36쪽 뒤7, 통권 111권 傳24권-4쪽 앞3.
한자 : (右政丞=정1품), (判密直事), (領都僉議司事), (三重大匡=정1품), (曲城伯)

노국공주 사망 : 공민왕이 왜구의 침입과 정국의 혼란으로 백성들이 불안해 할 때에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슬픔이 생긴 것은 1365년 2월 만삭의 노국공주가 산고로 죽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의 생애는 노국공주의 생존시기와 사망시기로 구분될 정도로 노국공주가 절대적 존재였다.
즉, 공민왕에게 있어서 14년간 다정불심이던 노국공주의 죽음은 계속되던 전란과 맞물려 더욱 인간적인 실의와 예술가적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고려왕조실록. 박영규, 1996).

서북도통사, 문하시중 : 염제신(66세)은 1369년 서북도통사로서 요녕성 환인(만주) 서북쪽에 원의 세력이 남아있던 올라성을 정벌할 때, 지휘관이 적들을 많이 죽이지 못하게 했다. 염제신은 전쟁을 끝내고 개선한 후 문하시중이 되었고, 품계에 보국이 더해졌다(대동보, 1986).
한자 : (西北都統使), (兀羅城), (門下侍中), (輔國)

고려때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제도적으로 양자는 동일한 지위를 누렸지만, 실제로 문반이 무반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전쟁이나 내란이 있어났을 때도 군대통수권은 문반이 가졌고, 무반은 전투에 참가하는 기술적인 실무자에 불과했다(박종기, 1999).

당시 상서성의 복야나 6부의 상서가 참지정사를 겸하면서 재상이 되었고, 중서시랑평장사나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여 상위 재상이 되었으며, 문하시중이 되면서 최고관직에 올라섰다(고려시대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한국역사연구회, 청년사, 1997).

신돈의 득세 및 개혁 : 신돈은 1359년(공민왕 8) 무렵 김원명의 천거로 중앙에 등장했다.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공민왕(14년)이 그의 신임을 받던 신돈에게 6년 동안(1366-71년) 정권을 내맡기고 조신들을 견제케 한 후 노국공주의 명복을 비는 불사에만 전념할 동안 신돈의 힘이 막강해졌고, 6년 동안 권세를 부렸다(박영규, 1996).
신돈은 집권 초기에 우선 최영을 비롯한 무장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기존 권문세족 모두를 대상으로 한 인사개편을 대대적으로 착수했다. 이로써,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신돈 정권 참여를 계기로 차츰 성장했고, 일반민을 위해 개혁을 추진한 그는 당시 '성인'이라고도 불렸다.

신돈의 개혁작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소유주를 밝히고 사람의 신분을 바로 잡기 위한 전민변정도감의 설치였다. 이로 인해 개혁의 일정 부분이 성공하던 중 공민왕은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됨으로써, 1371년 왕권에 버금가는 신돈과 그의 추종세력을 제거해 버렸다(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청년사, 1997).  
한자
 : (辛旽, 승명/편조, ?-1371), (李穡), (鄭夢周), (鄭道傳)

신돈의 모함, 동북면도통사, 신비염씨 : 신돈은 집권기에 염제신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밉게 보고 공민왕에게 참소하고 모함했어도 제신은 끝끝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당시로서는 신돈이라는 인물을 더 많이 신임을 해서 결국 제신의 아들들과 사위들에게 명하여 신돈과 관계를 끊지 말도록 타일르기도 했다.

제신(68세)이 신돈의 모함으로 6년 동안이나 집에서 쉬던 중 1371년 동북면도통사로 임명된 것은 공민왕이 요승 신돈을 처형 후 과거 중신들 모두의 소환에 따라서 재기용되었다. 그리고 1371년 제신의 4녀가 공민왕 5번째 왕비 신비염씨로 책봉되었다.(대동보, 1986).한자 : (東北面都統使), (愼妃廉氏)

문하시중, 광주 유배 : 공민왕은 1374년(공민왕 23)에 문하시중 이인임 파면 후, 염제신(71세)을 문하시중으로 5년후 또다시 중임하여 품계도 전과 똑 같이 해주었다. 1374년 6월 제신이 광주로 유배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명 사신 채빈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채빈은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을 때리고 욕하기를 좋아하여 시중과 여러 재상들이 수모를 당했었다(대동보, 1986).한자 : (李仁任), (廣州), (蔡斌),

영삼사사, 도총도감, 판문하사 : 공민왕은 1374년 9월 갑신일 최만생, 홍륜 등에게 살해당했다(박영규, 1996). 염제신(71세)은 우왕때(1374-88) 계속 영삼사사, 판개성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 영삼사영경연사, 도총도감, 판문하사를 역임했다. 이는 염제신이 30여년간 중신으로서 다섯 임금(충숙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을 섬긴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대동보, 1986). 한자: (領三司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領三司領經筵事)

고려명신(高麗名臣) 염제신 : 염제신은 1800년대의 고려명신전에 의하면, 고려명신들 중에서 제1인으로 기록되어 있다(고려명신전 9권 : 남공철, 1822년/순조22년 발간, 서울대학교 규장각)

중시조님의 시(詩) : 1379년(우왕 5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문(普濟尊者 石鐘碑文-국보357호)에 명기되어 있고, 왕사 나옹(王師 懶翁, 공민왕의 스승)스님이 중시조님께 주신 시구(詩句)가 나옹록(懶翁錄)에 전해진다.(종보 12호 6면 '나의 생각 타인의 생각'. 벽강).

이를 근거로 나옹록에서 다음과 같은 두편의 시구를 찾을 수 있었다(염태호).

염시중(廉侍中)에게 주는 글
지극히 존귀하고 높으신 분
숲속으로 이 가난한 도인을 찾아오셨네
오늘에 존귀한 몸 무엇하러 오셨던가
세세생생에 나와 함께 참됨(진)을 닦기 위함이리라

본래 완전히 이루어져 말에 있지 않거니
어찌 수고로이 입을 열어 그대 위해 말하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화두를 들어
위음왕불을 번뜻 밟으면 벌써 저쪽이리라.   (출처 : 나옹록)

또 東文選에 있는 중시조 염제신에 관한 시 1수를 소개합니다(염 태 호)
동문선 제2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염시중제신제분매(廉侍中悌臣第盆梅)
한 번 보자 처음으로 눈이 깨끗해짐을 놀랐나니 / 一見初驚眼不塵
푸른 바지 흰 소매로 사람을 비춰 새로워라 / 靑裙縞袂照人新
창 밖의 바람과 눈은 헛 발악이라 / 隔窓風雪徒爲惡
분매ㆍ화당을 향해 이미 봄을 알려 주네 / 好向華堂已報春

 다음은 '신증동국여지승람 16권 충청도 보은현 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대동보 문헌록 884쪽)

염제신(廉悌臣)의 시 :

筆落珠璣字字香
遏雲歌裏引盃長
半酣更覺君恩重
坐到深更冷欲霜

필락주기자자향
알운가리인배장
반감경각군은중
좌도심경냉욕상

붓에서 구슬이 떨어져 글자마다 향기로우니,
맑은 노래소리에 술잔 길게 드네.
반쯤 취하자 다시 임금의 은혜 중대함을 깨달으며,
밤 늦도록 앉았으니 서리 내릴 듯 밤도 차네.

 

※. 중시조님의 친필 서한문

  筆史大觀(國民意識正立 思想 敎養本)

謹拜 審此來
靜體萬寧 仰慰 且領 弟-依 昨狀 幸私就  政事每日 付送云  意吉依敎分付爲計矣 餘留不備 謹謝禮  生 悌臣再拜

(삼가 절하고 살피옵건대 이즈음
靜體(상대방에 대한 존칭)가 만번 안녕하시다니 위안이 되며 또 칭송합니다.
弟는 한결같이 지난날의 모양과 다름없으니 다행인가 합니다.
政事(인사관계의 일)에 있어서는 매일 부쳐 보낸다 하니 意吉(사람 이름인 듯)의 가르킴에 따라 분부할 계획입니다.
나머지는 남겨두고 갖추어 쓰지 못합니다. 삼가인사 드립니다. 生 제신재배)   
-성대 임형택교수 역-
 

 

 

 

  6. 염제신의 슬하 3남 5녀(충경공신도비 비문에 나타난 3남 5녀)

  중시조님 슬하 세 아들의 과거 급제 : 공의 아들 3형제는 공민왕 제위기간(1351-74)에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경사가 있었다. 즉, 1남 국보는 1355년(공민왕 4)에 급제, 2남 흥방은 1357년(공민왕 6)에 장원 급제, 3남 정수는 1370년(공민왕 20)에 급제했다.
이에 대해서 공민왕이 친히 염씨문중에 축복을 내리셨고, 그리고 3형제의 모친에게 진한국대부인으로 봉했다(대동보, 1986). 

1녀 : 홍징   과 혼인.    홍 징(洪徵, 봉익대부 밀직부사).
2녀 : 임 헌   과 혼인.    임 헌(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제학)
3녀 : 정희계 와 혼인.    정희계(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밀직사사 상호군),
                                   무진참화 때 우리 염문과 관련된 사람 중 생존자의
                                   한 사람이다.
4녀 : 공민왕의 5번째 왕비가 되심. 신비염씨(愼妃廉氏)라 함.
5녀 : 이송과 혼인.        이송(숭정대부 판중추 군부판서,  예안이씨 득관조)
         숭정대부 판중추 전법 군부판서 이송께서는 사전개혁에 반대하다가
         이 화에 연루 적몰 되었으니 이로 인하여 이송의 할아버지 되시는
         제학공(提學公)께서 부득이 본관을 禮安으로 예안이씨(禮安李氏)로
         이적(移籍)하였으리라 추측이 된다(예안이씨 홈)
서자와 서녀: 그밖에 김씨와 이씨되시는 분으로부터 서자와 서녀를 두셨는데, 혜주는 통제원의 주지로 김씨 소생이고, 또 광원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 이씨 소생이고, 신도비문의 기록으로는 중랑장 홍문필에게 시집간 김씨 소생의 서녀가 있고,   한성부판윤 초계변씨 변남용에게 시집간 서녀가 있는 것으로 본다.

염제신의 맏사위인 홍징은 처가집이 1388년 무진참화를 당했을 때 함께 참형되었다.

염제신의 맏사위, 홍징 : 삼한갑족 남양홍씨 11세 홍규는 두 딸이 충선왕비와 명덕왕비였다. 홍징은 고려말 명재상과 청백리로서 여러 대에 걸쳐 왕을 보필했던 염제신(1304-82)의 맏사위였다.
한자
: (三韓甲族 南陽洪氏), (洪圭), (공민왕 모친, 즉 명덕태후 홍씨)

홍징은 그의 둘째 처남인 흥방이 저지른 "토지탈점사건"과 "조반옥사사건"에 연루되어서 1388년 무진참화때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 참극을 모면한 파주염씨와 홍 징의 4남 홍상직은 세도가 집안인 외가집(염제신 가문)의 도움으로 어렵게 목숨을 구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현 장성현에 자리잡았다. 이 무렵 외가집 파주염씨는 나주에 자리잡고 숨어 살았다.
한자 : (洪尙直), (高敞縣), (長城縣), (羅州: 중시조 5세손 염순공)

  7. 염제신초상, 유언, 묘소와 제향지, 시호

  염제신초상(廉悌臣像-보물 1097호 : 공민왕이 직접 그려 하사한 초상화)

   - 보물명칭 : '염제신초상'

  66세의 염제신 초상화 : 공민왕은 역사가들이 입증하는 명화가로서 노국대장공주, 염제신, 이강, 윤택 등, 여러 군신들의 초상화와 자신의 자화상까지도 그렸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염제신초상"은 공민왕 18년(1369년)에 왕이 친히 염제신의 66세 상을 그린 것이다.(출처 : 목은문고)

이 초상화는 나주시 삼영동 충경서원에서 모셨다가 1991년 9월30일자로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문화재청 홈에서 찾기에 염제신초상 으로 검색하며 볼수 있음. (http://www.ocp.go.kr/) 한자 : (李岡), (尹澤), (牧隱文藁), (忠敬書院)

초상화 하사에 대한 공민왕의 말씀 : 공민왕께서는 친필 초상화를 公에게 하사하시면서 "시중(문하시중)은 원나라에서 배웠고 성품이 고결하니, 조정의 다른 신하들과 견줄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였다고 한다.
(신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 파주목 인물 고려)

  원나라에서 일어난 나성의 난(亂)에 모든 장군들이 매헌 '충경공'의 지휘를 받아서 감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적을 물리치니 공민왕이 더욱 충경공을 막중히 여겨 공에게 '보국' 두 글자를 보태 주었고, 봉읍은 옛것과 동일하게 했으며, 친히 그린 초상화를 하사하셨다 함.

초상화의 작품 수준과 평가 :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인데, 친필 염제신의 초상화 역시 그런 그림들 중 하나였다. 공민왕의 미술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가 남아있다(http://www.chiwoo.net/special/people/leader/006.html)

염제신초상의 복장은 몽고식으로 넓은 이마에 건을 썼고, 옅은 회색선으로 묘사된 안면과 이마와 눈가의 주름, 긴 흰수염 등에서 60대 노인의 우아한 풍모가 잘 나타나 있다. 눈과 코, 입 주변에 가해진 음영은 이 풍모를 더욱 단아하고 귀족적인 느낌을 들게 하면서, 인물화에서 더 할 수 없이 정묘하다고 했던 공민왕의 기량과 함께 고려때 초상화의 높은 수준을 엿보여 준다(http://myhome.shinbiro.com/~jmjh/lecture-060.htm)

염제신초상은 고려말의 제작기법과 함께 당대 복장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중시조의 유언 : 염제신은 임술년 정월에 조정 원로 재상들과 함께 현릉(공민왕능)을 참배 후 자녀들에게 유언하셨다.
"나는 재주도 없는 사람으로 지나치게 공민왕께서 발탁해 주신 은혜를 입어, 시중 지위에 오른지가 29년이나 되었다. 질병이 자주 발작하니 내가 반드시 더 오래 살지를 못한다. 내가 죽으면 장례를 검소하게 치를 것이다".

1382년 3월 6일 제신이 병을 얻자 공경대부들이 매일 안부를 살폈다. 우왕은 신하를 보내 병환의 차도를 물었고, 약과 어주를 내렸다. 자제들에 대한 훈계는 "내가 죽은 후 3일만에 하관하고 관리들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였다(문헌록, 1986).

별세 : 제신은 1382년 3월 18일에 별세, 향년 79세셨다. 자손들은 유언대로 3일후 공이 정해 둔 임강현 대곡원에 장사치렀다(대동보 문헌록, 1986)

묘소 :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 대곡원 해좌로 휴전선 안에 위치한다.
    1927년 정묘보 : 江南面亢洞(강남면 항동) 대곡원. 여지승람 乾亥龍壬坐丙向(건해룡임좌병향)

사단 설치 및 향사 : 중시조의 묘소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어, 매년 향사를 모실 수가 없게 되어 전남 나주시 삼영동에 파주염씨양세사단기실비(坡州廉氏兩世祀壇記實碑)를 세우고 충경서원에 위패를 모셨으며,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에도 신도비와 사단을 세우고, 충경공과 그 아드님 3형제 국파공(국보), 동정공(흥방), 청강공(정수)의 향사를 모시고 있다.

나주의 충경서원과 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에 있는 사당 수현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는 매년 유림 주관으로 제를 올리며, 그밖에 전국에 많은 제향지가 있는데 보성 청계영당, 구연사, 재령 청수사, 옥천 용강서원, 단천 송산사, 함양 반계영당, 대덕 호평영당, 영월 추원사단 등에서 매년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올린다.(문헌록, 1986).

시호 : 염제신의 장사를 치른 후에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논의하여 우왕이 고인이 되신 염제신에게 충경공(忠敬公) 시호를 내렸다(대동보, 1986).

시호(諡號)는 왕이나 종친,  정2품  이상의  문무관, 후에는 정2품 이하의 문무관까지 확대해서 국가에 특별히 공이 많은 신하들, 또는 학문이  뛰어나 존경을 받은   유학자들에게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 생전의 행적을 칭송하여 국가에서 추증하는 이름이다.(염태호, 2000)

  8. 충경공신도비

  충경공신도비는 우왕 9년(1384년)에 한산백 목은 이색봉교찬청성군 한수전병서로 경기도 장단  묘소 앞에 건립하였는데, 오랜 풍상으로 훼손되어 1899년(기해) 10월에 다시 세웠으며, 해방전까지는 후손들이 참배 관리하였으나 남북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쳤고, 휴전선 이북에 있어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훼손이나 멸실이 예상되고 있어 후손들은 조상숭배 정신을 일깨우고자, 1987년 문중 발의로 강화군 서원면 냉정리에,  충경공(제신), 국파공(국보), 동정공(흥방), 청강공(정수)의 사단을 설치함과 동시에 충경공신도비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새로이 신도비를 건립하고 매년 세제를 올리고 있다.
 한자 : (忠敬公神道碑), (韓山伯 穆隱 李穡), (奉敎撰), (淸城君 韓修), (篆幷書), (祀壇)

  위의 사단은 철종임금의 외조부인 의정공 염성화의 생가와 묘소가 있는 봉안사 바로 옆에 건립하였고, 신도비는 이곳으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로 전등사가는 길가에 있다.
 한자 : (哲宗), (議政公 廉星華), (奉安祠 : 지방문화재 32호)

목은 이색이 왕명에 의해 작성한 충경공 신도비문 : 목은문집과 동문선 제119권에 실려 있음.
"우왕 9년 3월 태평재상인 곡성부원군 79세로 병환이 들자, 공경대부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문안했고, 자손들은 조석으로 탕약을 올리면서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는 일을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했으며, 상(우왕)께서 중관을 보내 문병하고 약과 술을 하사하였다"."신도비문 및 번역문 보기"

"대체로 공은 평소에 간강하고 강단이 있고, 오랫동안 앓은 적도 없어 늙어서도 풍채가 더욱 수려하였으며, 큰 수(壽)를 누릴 것으로 여겼는데, 돌아가셨으니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공의 부음이 전하여지자 상께서 매우 애도하며 봉교찬(왕의 하교에 의하여 글을 짓는 것)을 내리어 목은 이색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신도비가 '삼절'(세가지의 절색)이라하여 귀하게 여기는데,  첫째는 '충경공 염제신'의 공로가 대단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왕명에 의하여 '목은 이색'이 문장을 지었으며, 셋째로는 당시 글씨의 대가인 '청성군 한수'가 글씨를 썻기 때문인데, 이 비문은 '목은문집'에도 있다.

 공(염제신)의 부음에 대해서 "재상이 '3일장으로 치르라는 유언을 감히 어길 수는 없으나 유사가 장례를 주관하는 것은 국법이니 이 일을 폐지한다면 그 허물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그리고 공에게 국장을 치르지 않는다면 국장치르는 예는 어떤 사람에게 쓰겠는가'하고 대신들을 소집했고, 유사가 감독하면서 특히 조금도 결례될 것이 없게 하였다". 한자 : (中官), (有司), (國法), (國葬)

충경공은 어린 나이에 천자의 조정에 이름 날렸네. 정동성에 있을 때는 고요하고 편안하게 백성을 다스렸네. 다섯 조정 내리 섬기면서 국가의 위엄을 드날렸다오. 산악으로써 진정하고 뇌정같은 위엄으로 움직였네. 그 어려운 시기를 공이 알맞게 처리하니 삼군이 목숨을 돌보지 않았고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어 백성은 잘 다스려지고 종사는 매우 든든해졌네.

바르고 곧음으로써 백성은 기르고 어루만져 병든 사람들은 낫게 해주고 술취한 사람들은 깨게 해주었네. 태평재상이란 지옥은 신명이 들어 아는 바라 훌륭하신 공민왕이 친히 초상화를 그려주니 위대한 공적이 단청에 빛나도다.

참으로 이 원로는 일국의 모범이로세. 어찌하여 백세를 못다살고 천지가 깜깜하여졌단 말인가 저 끊어진 언덕에 맑은 시냇물만 흐르누나. 산기운이 한군데로 뭉쳐 좋은 명당자리 이루었네. 우뚝솟은 큰 비석이 하늘에 치솟아 있으니 천재에 어김없이 우리 동녘 비추리라(문헌록, 1986, 754-770).
 

  충경공 신도비 탁본(일부분)

고려 충성수의 동덕론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 곡성부원군

충경 염공제신 지묘

 이 탁본은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의 휴전선 안에있는 신도비문의 일부분으로 탁본의 실제 크기는 101X48㎝인 것으로 보아 신도비의 실제 크기는 이보다 클것으로 짐작하며, 휴전선안에 있으므로 현존하는지 의문되며, 사진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다.

형태서지 : 101X48㎝

소 장 처 : 한국정신문화원

MF no.   : MF 35-004671

 

 

  9. 신비염씨(愼妃廉氏, 공민왕비)

 
 

  1371년에 공민왕은 그의 왕권을 능가했던 신돈 처형 후 염제신의 딸을 신비염씨로 맞아들여 왕비는 6명이었다(1. 노국대장공주, 2. 인덕황후, 3. 혜비 이씨, 4. 정비 안씨, 5. 신비 염씨, 6. 반야). 반야가 우왕의 생모임이 분명하지만, 공민왕은 노국공주 사망과 자기소생이 없어서 개인적으로는 왕비들을 임신시키려고 신하들에게 왕비들을 강간하도록 만든 불행한 인물이었다(박영규, 1996).

고려왕조실록 : 신비염씨는 서원현의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이다.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 사망후 왕비로 간택되서 신비로 봉해졌다. 신비염씨 역시 홍륜, 함안 등이 공민왕 명령으로 왕비들을 능욕할 때 거절했고, 공민왕 피살후 혜비 이씨(이제현의 딸)처럼 스스로 머리깎고 여승 된 후 그녀의 행적은 기록이 없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박영규, 1996).

신비염씨 : 고려사(통권 43권 세가 43권-9쪽 앞2, 22쪽 뒤8. 통권 89권 열전 2권-31쪽 앞4, 33쪽 앞1. 통권 137권 열전 50권-34쪽 앞3).   한자 : (辛旽), 世家, 列傳

  10. 충경공 부인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 : 안동권씨 권한공의 딸로 생.졸년대는 모르고, 아들 삼형제를 과거에 급제시킨 공로로 1371년 공민왕은 염제신의 부인 안동권씨에게 진한국대부인에 봉했다. 목은 이색에게는 처고모가 된다.

  충경공부인만 : 시중집에 태어나서 시중 아내됐건만 종신토록 검소하여 풍속을 바꾸었네. 재상 많은 가문이라 과명도 높거니와 삼한국대부인이라 녹양도 풍부하네. 좋은 땅에 쌓인 복은 응당 튼튼할 것이요. 냇물에 흐르는 경사 진정 끝이 없으리. 상여 소리 또다시 마천갈 향하노니 두 무덤 오래오래 해동을 비추리라(목은 이색의 시)

  목은 시고 32권 - 안동권씨 장례식을 마치고 지은 시
  8월 10일에 곡성(曲城)의 부인 권씨(權氏)의 장례식에 비를 무릅쓰고 참석하다 보니 매우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 돌아오는 중에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먹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해가 벌써 서산에 지고 있었다

비를 무릅쓰고 도성 동쪽으로 가서 / 冒雨城東行
영구를 전송하니 아직도 남은 비애 / 送殯有餘悲
하얀 모래밭 위에 언치 깔고 앉아 / 坐韉白沙地
푸른 솔 가지에 두건 벗어 걸었소 / 掛巾靑松枝
밥상을 마주해도 배부를 수가 없고 / 對食不能飽
술이 있어도 나는야 또 사양했다오 / 有酒吾復辭
백골을 보고 술잔을 입에 대었다는 / 含杯見白骨
옛사람을 어떻게 따를 수 있으리오 / 古人如可追
도성에 들어오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 入城已晚矣
슬픔 속에 애오라지 시 한 수 짓노매라 / 惻愴聊題詩

 

 11. 독일 사신 최초접촉과 사방광개책

  염제신의 프랑크 제국 사신과의 최초 접촉 : 우리나라와 독일 사이에 역사적으로 최초로 이루어진 접촉은 고려때 염제신이 1354년 원의 내란을 도와주기 위해 원병으로 출정 중 당시 프랑크제국(독일) 사신(使臣)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http://www.nobelmann.com/hisroty/deutsch/gerhistory11.htm)>

염제신의 사방광개 : 염제신은 고려의 재상 및 장군으로서 그가 당시에 제시한 비변책 중 특별히 사방광개라는 파격적 아이디어는 6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통찰력과 안목, 그 내용이 놀라운 것이라고 평가된다(국가전략 2; Frontierism for Future,VISION21).

사방광개는 어느 지역이든지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넓힌다는 것, 즉, 교통과 정보통신의 힘을 빌려서 대륙과 태평양을 넘어 5대양 6대주에 걸쳐 전 지구촌을 망라하여 추진함을 의미한다. 그 동안 우리의 영토 전략에 관해 한반도에 집중하여 발전을 도모하고 강건한 기상과 의지로 외세를 막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로서는 운신의 한계가 너무나 좁아서 그런 논의대로는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가 어렵다. 이에 염제신의 사방광개 아이디어처럼, 민족과 국가의 오늘과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느 지역으로던 더 멀리 더 넓게 더 높이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려는 중국, 일본, 중동은 물론 유럽 국가들과도 직접 및 간접적으로 해상무역과 학문여행 등을 통해 교류를 왕성히 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백제 사람, 개성 상인과 보부상이 한 푼 벌려고 온 천하를 누볏듯이 대륙전력과 해양전략을 축으로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찾아가서 하나라도 더 얻어 나와야 하며, 우리의 터전을 넓혀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http://www.hahngoon/vision/shin014.html).

염제신의 600여년전 사방광개는 11살부터 비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원의 관료로서 중국과 한국 자주 내왕했음은 물론이고, 또한 한국인 최초의 독일 사신 접견자로서의 국제적인 안목과 성공적인 고려의 문신 겸 무신을 겸한 관료였기 때문에 창출된 아이디어일 것 같다. 이는 600년전에 한국인들에게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교훈을 남겨준 것이다.(염태호, 2000)
 

 

1986년판 대동보 경력란 전재

경력-선천적으로 영특하시고 뛰어난 재주를 타고 나심으로 夙成(숙성)하시다. 6세때 아버지를 여의시고 11세때 고모부인 원나라 중서평장사 末吉의 집에서 儒生들과 수업하신지 10년에 덕망과 기량이 세상에 뛰어나시었다. 21세때 奉定元帝가 晋邸로부터 대통을 이어받을 때 고모부말길이 충경공을 거느리고 車駕(거가)를 和林에서 맞이할 때 元帝가 한번보고 기특히 여겨 명하여 禁中에 宿衛케 하였는데 賊臣인 帖失의 女弟를 賜하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신이 비록 무지하나 逆黨에 접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하니 원제가 더욱 중히 여기시다. 원에 머물러있어 오래도록 어머니를 돌보시지 못함을 원제에 고하니 명하여 金剛山에 降香케하였고 金字圓牌를 내리다. 다시 원으로 돌아가시니 尙衣使를 제수하시고 또 어머니 공양을 청하니 征東省郎中에 除授되어 還國하시다. 충숙왕때 낭중으로 계실 때 좌우사가 왕에게 공문서의 재가를 청하면 반드시 우리 염낭중이 서명하였느냐하고 물어 서명하였다하면 행하게하고 안하였다하면 그만두라하다. 37세때 왕이 승하함에 공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셨는데 때마침 원나라에서는 翊正司丞(익정사승-위계는 봉정대부)으로 제수되시었고 40세때 강절성봉명사로 나가서 중정원의 회계감사를 하시게되자 관리들이 뇌물을 보내 아첨하는자 많았으나 일체 물리치니 원의 승상이 특별한 예로써 대우하시다. 원의 승상이 매헌공의 청백함과 뛰어난 재질을 원제에 고하여 공을 등용하려 하였는데 그때 마침 대부인의 병환으로 본국으로 돌아오시므로 등용되지 못하시었다. 환국하신후 43세때 충목왕2년 丙戌(1346) 6월17일 匡靖大夫삼사우사상호군이 되시고 44세때 중대광을 加資(가자)하고 수성익대공신의 호를 내리었으며, 곧 이어 도첨의평리에 오르시고 同 12월에 찬성사에 오르셨다. 44세때 충목왕4년 戊子(1348) 판판도사사로 45세때 충정왕원년 己丑(1349)에 중대광도첨의찬성사판판도로 51세때 공민왕3년 甲午(1354) 정월11일에 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軍部司事上護軍領景靈殿事를 제배하시다. 동년 2월16일에 우정승판전리영효사관으로 승진 곡성을 봉하였고 53세 丙申(1356)겨울에 개부의동삼사상주국수문하시중상장군판병부사령경영전사를 제배하시고 54세때 판리부사영효사관사로 승진하시다. 58세때 벽상삼한삼중대광곡성후로 다음해 다시 시중으로 66세때 곡성백을 봉하고 70세가 되시든해 다시 문하시중으로 位階와 겸직은 전과 같았다. 동년에 판개성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으로 加資하다. 72세때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영삼사사를 제배하시고 겸직은 모두 전과 같았으며 73세때는 元帝가 자덕대부장작원사를 拜命하셨다. 매헌공은 시중으로 계신지 29년동안 친원파와 辛돈의件 등등 국가적인 대소사의 혁혁한 사적은 별도 문헌록 및 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1371년 7월 : 보국(輔國), 공민왕 친필 염제신초상화
   신도비 : 1371년 공민왕은 염제신을 더욱 존중하여 ‘보국(輔國)’ 두 글자를 더 해 주고, 봉읍(封邑)은 그전대로 하였으며, “시중(侍中, 염제신)은 중국에서 공부하였고 성격이 고결하여 다른 제상들과 대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말씀하면서 어필 염제신초상화(御筆 廉悌臣肖像畵)를 하사하였다(목은문고 제15권-충경공염공신도비 : 旽敗上愈重公加公輔國二宇封邑依舊親圖形賜之).염제신초상화 자료는 홈의 '중흥시조-초상화'에서, 신도비 자료는 홈의 '중흥시조-신도비'에 있음.

   고찰 : 염제신은 신돈의 배척으로 조정에서 수년가 물러났다가 복귀한 이후 공민왕에게 있어서 많은 신료들 중에서도 극진한 존경의 대상인물이었던 같다. 바로 그것이 염제신의 여러 가지 관작 위에 “보국(輔國)” 두 글자를 더해 주는 영광과 공민왕이 염제신의 고귀한 인품에 감복하여 왕의 친필 염제신초상화를 하사했다는 것은 개인의 영예는 물론 가문의 축복이 아닐 수 없고, 또한 오늘날에도 국가보물급 작품인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1371년 9월 : 서북면도통사 염제신
   고려사절요 : 염제신은 신돈의 모함으로 6년 동안 집에서 쉬던 중 신돈을 처형한 다음 1371년 9월에 동녕부 정벌과 관련하여 염제신에게 서북면도통사로 임명되었다(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 신해 20년 서기 1371년).

   동사강목 : 공민왕 20년(1371) 9월에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삼았다. 신돈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구신(舊臣)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을 모두 소환하였는데, 염제신(廉悌臣)도 폐출(廢黜)된 자 가운데서 기용(起用)되었다(동사강목 제15 하 :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고찰 : 염제신이 서북면도통사로 임명된 것은 신돈에 의해 물러났던 과거 중신들을 모두 소환하여 재기용했기 때문이다. 즉, 고려왕조가 원명교체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여서 염제신과 같은 노성한 인재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서북면도통사 염제신은 만주 요녕성 환인 올라성(兀羅城) 전투에 출정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염제신의 절제를 받아서 감히 많은 사람들을 많이 죽이지 못했다(목은문고 15권-비명 : 충경염공신도비 : 兀羅城之役 諸將受公節制不敢多殺人).

   1371년 11월 : 공민왕의 신비염씨(愼妃廉氏) 책봉
   고려사 : 1371년 11월 경술 삭 정축에 공민왕은 그의 왕권을 능가했던 신돈을 처형한 후에 서원현 사람 염씨(廉氏)를 5번째 왕비 신비(愼妃)로 봉하였다. 신비는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넷째 딸이다(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 신해 20년 1371년 ; 고려사 89권 열전 2 후비 2 공민왕 ; 고려사 43권-세가 43-공민왕 6-20-69-1371 ; 89권 열전 2권, 137권 열전 50권 ; 충경염공신도비 : 丁丑納曲城伯廉悌臣女愼妃).

  동사강목 : 1371년 11월에 염씨(廉氏)를 맞아들여 비(妃)로 삼았다. 곡성백 염제신(曲城伯 廉悌臣)의 딸인데, 바로 이 분이 신비(愼妃)이다(민족문화추진위원회 > 고전국역총서 > 동사강목 제15 하) http://kcri.minchu.or.kr/M/jsp/index_k.htm

  동사략 : 염씨를 책봉하여 신비로 삼았다. 신비는 염제신의 따님이다(冊廉氏爲愼妃, 悌臣女. 동사략 8권 01_0351-1 : http://210.125.185.193/K/jsp/index_sa.htm).

   고찰 : 공민왕 기간(1352-1374)에 염제신의 넷째 따님이 왕의 5번째 왕비로 책봉된 사실은 염문과 고려왕실과 사돈관계임을 의미한다. 이는 염제신 부부 두 분이 왕가의 장인과 장모, 즉 왕을 사위로 둔 집안이고, 또한 형제들은 공민왕과는 처남매부간과 따님들은 공민왕의 처제들이라는 인척관계가 됨으로써 염문의 위상이 그 만큼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신비는 1374년 9월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시해 당한 이후 스님이 되었다. 즉, 신비염씨는 홍륜(洪倫) 한안(韓安)이 여러 비들을 강제로 욕보일 때 신비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공민왕이 이미 1374년 9월에 살해 당한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된 후 신비의 행적 기록이 없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고려사 89권 열전 2-후비 2-023-신비염씨 : 愼妃廉氏瑞原縣人曲城府院君悌臣之女以選入封愼妃洪倫韓安之强辱諸妃也妃拒不從恭愍旣見弑剃髮爲尼).

    1371년 11월 : 삼형제 과거급제, 공민왕 축하와 진한국대부인

   신도비 : 공민왕은 염제신의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에게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했다. 이는 세 아들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1355년 국보/國寶, 1357년 흥방/興邦, 1371년 정수/廷秀)함으로써, 모친 권씨부인에게 일정한 봉름(奉凜, 늠료/凜料-특별농봉)이 내려진 것은 고사(故事)에 따른 것이다. 둘째 아들 평리 흥방(評理 興邦)은 지공거(知貢擧)를 두 번씩이나 맡아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부러워했다(매헌선생행적. 임흥원, 1788 ; 염민섭, 1985 ; 대동보 1권 6-11쪽 ; 충경염공신도비 : 封夫人權氏曰辰韓國大夫人其後仲子評理再知貢擧當世歆之)

  고찰 : 염문 3형제의 과거 급제는 한 집안의 경사만이 아니라 공민왕이 3형제를 길러 낸 모친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서 모친에게는 진한국대부인의 칭호를 부여함은 물론 국가에서 베푸는 늠료를 내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국가적 경사로서 축복받는 영광이었고, 이에 더해서 둘째 아들 장원급제자 염흥방은 그간에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시험관(지공거)을 두 번씩이나 역임함으로써 공민왕대에 염문의 위상을 더욱 드높인 인물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대해서 고려 사회의 모든 가문과 백성들의 부러움을 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372-1375년 염문 인물의 행적
   1372년 염흥방(廉興邦)은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73년에 부친 염제신(廉悌臣)은 1358년 이후에 또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재임명과 더불어 판개성겸감춘추관사(判開城兼監春秋館事) 및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374년 염제신(廉悌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재임중, 4월에 염흥방(廉興邦)은 밀직부사(密直副使), 6월에 염제신(廉悌臣)이 광주 유배(廣州 流配), 7월에는 목호의 난 평정을 위해 염흥방(廉興邦)이 양광 전라 경상도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출전, 9월에는 공민왕이 살해를 당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1375년 염제신(廉悌臣)은 우왕이 다섯 임금을 섬긴 충신이므로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의 칭호를 내렸고, 문하시중에 해당하는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자료 참고 홈의 '중흥시조편-염제신'에 있음.

   1375년 7월 : 문하시중 이인임 탄핵 사건
   1375년(우왕 1년) 당시 1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자였던 문하시중 이인임(李仁任)을 죽이려고 모해했다는 의심을 받게 됨으로써, 정몽주, 이숭인, 박형, 염정수, 이성림 등이 유배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홈의 '염문내력-염문역사' 참조

   우왕 대의 권력자 이인임(李仁任, ?-1388) :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성주(星州). 시호 황무(荒繆). 음보(蔭補)로 전객시승이 되고 후에 전법총랑을 거쳐 공민왕 초에 좌부승선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서경존무사 때 침입한 홍건적을 격퇴하여 2등공신에 책록되고, 2차 침입 때는 개경을 탈환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62년 개성부판사에서 서북면도지휘사를 거쳐 첨의평리가 되고, 1364년 서북면순문사 겸 평양윤 때 최유(崔濡) 등이 덕흥군(德興君)을 내세워 고려에 쳐들어오자 격퇴하였다. 이듬해 삼사우사  도첨의찬성사가 되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1368년 좌시중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이 되고, 그 해 서북면도통사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를 정벌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後嗣)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太后)  경복흥(慶復興)의 주장을 꺾고 우왕(禑王)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취하여 친명파(親明派)를 추방, 지윤(池奫)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매관매직을 하며 경복흥을 무고하여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그 횡포에 격노한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1388년 경산부(星州)에 안치, 그 일당과 함께 사형되었다. 태종 때 명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그의 아들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어 오랫동안 교섭한 끝에 선조 때에 개정되었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이첨과 전백영의 이인임 탄핵 상소문
   우왕과 태후가 재삼 권유한 후에야 이인임(李仁任)과 경복흥(慶復興)이 출근하여 일을 보았는데, 우헌납 이첨(右獻納 李詹)과 좌정언 전백영(左正言 全伯英)이 상소를 올렸다. “수시중 이인임은 김의(金義)와 음모하여 천자의 사신을 암살하고 요행 처단을 모면하였다. 이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가슴 아파하는 바이다. 그리고 오계남은 정료위(定遼衛) 사람을 함부로 살해했으며, 장자의는 김의의 사신 살해에 관하여 정료위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추궁하여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인임은 이것을 불문에 부쳤으니 이것이 그 죄의 첫째이다. 찬성사 지윤이 서북에 나가서 진수하고 있으면서 김의의 글을 압수하여 임금에게 올리지 않고 비밀히 이인임에게 주었다가 전하가 여러 차례 찾은 후에 겨우 보고하면서 민간의 이목을 현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핑계하였다. 이것이 그 죄의 둘째이다. 오랑캐에게서 글이 왔을 때 지윤이 그 글의 요점은 삭제하고 사본하여 전하에게 제출하고 그 원본은 이인임에게 주었는데 이인임은 즉시로 전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죄의 셋째이다. 이인임은 백관과 같이 맹세하여 오로지 전하만 섬길 뜻을 과시해 놓고서 일변으로 오랑캐와 통하여 심왕에게 공을 세워 놓음으로써 후일에 화를 면하여 하였다. 이 반복 무상한 간사한 행위가 그 죄의 넷째이다. 이인임과 지윤은 서로 결탁하여 타오르는 불에 부채질하여 닥쳐 올 화가 추측키 어려우니 바라건대 이인임과 지윤을 사형에 처하고 또 오계남과 장자온의 죄도 처벌하고 사신을 보내여 명나라 천자에게 보고하시기 바랍니다”(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을묘 신우 원년 서기 1375년).

  우인렬과 한리의 이인임을 옹호하는 반론
   이 글이 제출되니 이첨을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전백영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강직시켰다. 이 때에 응양군상호군 우인렬(禹仁烈)과 친종호군 한리(韓理)가 이인임의 환심을 사고자 글을 올려 이렇게 이르고 있었다. “간관으로서 재상을 논죄하는 것은 사소한 사고가 아닙니다. 간관이 옳다면 재상에게 죄가 있고, 재상이 무죄하다면 간관에게 잘못이 있다. 그러므로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드디어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과 지윤에게 문초를 담당시켰는데, 사건이 박상충(朴相衷)과 전록생(田祿生)에게 연루되어 최영(崔瑩)은 박상충과 전록생을 매우 참혹하게 곤장을 치며 문초하였다. 이 때 이인임이 “이 자들을 죽일 것은 없다”라고 말하였으며, 이어 그들을 귀양보냈던 바 모두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이첨, 전백영, 방순(方旬), 민중행(閔中行), 박상진(朴尙眞)은 곤장치고 귀양보냈다. 김구용,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임효선(林孝先), 염정수(廉廷秀), 염흥방(廉興邦), 박형(朴形), 정사도(鄭思道), 이성림(李成林), 윤호(尹虎), 최을의(崔乙義), 조문신(趙文信) 등도 이인임을 모해한 혐의로 모두 귀양가게 되었다(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을묘 신우 원년 서기 1375년 대명 홍무 8년).

  고찰 : 우왕 원년(1375년)부터 권세를 휘어잡은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에 대해서 반대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1375년 7월에 응양군 상호군 우인열(禹仁烈), 친종호군 한이(韓理)가 이인임의 뜻에 아부하여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명백히 판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우헌납 이첨과 좌정언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최영(崔瑩)과 지윤(池奫)을 시켜 국문하자 진술하는 말이 정당문학 전녹생(田祿生)과 박상충(朴尙衷)에게 관련되었다. 최영(崔瑩)이 매우 참혹하게 전녹생과 박상충을 국문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이 무리들을 죽일 것은 없다”하고, 귀양보냈는데, 전녹생과 박상충은 모두 길에서 죽었다.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방순 민중행 박상진은 곤장을 때려 귀양보내고, 또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이숭인(李崇仁), 임효선, 염정수(廉廷秀), 염흥방(廉興邦), 박형, 정사도, 이성림, 윤호, 최을의, 조문신 등이 자기(李仁任)를 해하려고 모의하였다 하여 모두 귀양보냈다. 박상충(朴相衷)은 강개하고 큰 뜻이 있고, 널리 배워서 글을 잘 지었으며, 겸하여 성명학(星命學)에 통달하였고, 그 행실과 벼슬에 있어서 반드시 도리대로 하여 의롭지 못한 부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고려사 111권-열전 24-최영 ; 고려사 126권-열전 39-이인임 ;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을묘 신우 원년, 1375 ; 고려사 112권 열전 25권 전녹생).  

   박상충(朴尙衷, 1332-1375) : 고려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 반남.. 시호 문정(文正).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정랑에 올라 향사의 법식을 정리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성균관의 초기에 전교령이 되자 신진 유생으로서 친명파(親明派)에 가담하여, 이인임(李仁任) 등 친원파에 대항하였다. 전교시판사 재임시에는 북원(北元)의 사신이 오자, 간관 이첨(諫官 李詹) 등 친명파와 함께 북원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이인임 등의 사형을 주장하다가 도리어 친원파에 의하여 귀양갔으며, 그 도중에 죽었다. 경사(經史) 역학(易學)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다.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은 《사전(祀典)》을 썼다(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박상충(朴相衷)은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정책(親元政策)에 대하여 임박(林樸)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1375년에 박상충은 간관 이첨(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親明派)인 전녹생(田祿生) 정몽주(鄭夢周) 김구용(金九容) 이숭인(李崇仁) 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반남박씨 홈페이지: http://www.bannampark.org/urizip03_02.htm). 

   1375-76년 : 염문 삼형제의 귀양살이

   귀양간 사람들 가운데는 염정수의 큰 형님 염국보(廉國寶)도 그 중 1명이었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염국보는 귀양을 갔는데, 그의 귀양지는 순창(淳昌)이었다. 그리고 염흥방은 경기도 천령현(여주)이라고도 하며, 염정수(廉廷秀)는 함경도 북청(北靑)이었다고 한다.

  고려사 : 우왕 2년 도당에서 왕의 명령이라 하여 귀양살이 중인 정몽주, 염흥방, 강순룡, 정사도, 성대용, 정우, 윤호 등을 석방하고자 이미 결정하였는데, 이 때에 최영은 사냥나가고 없었으므로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최영이 돌아오자 녹사(錄事)가 그 문건에 서명을 요구하였더니 최영은 노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중대한 문제는 반드시 대신이 합의한 연후 시행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미리 알리지 않고 갑자기 서명을 받는가”하고 마침내 서명하지 않았다(고려사 111권-열전 24-최영).

   문헌록 : 1375년 7월에 두 분 아우님과 함께 염국보(廉國寶)는 우왕의 신임으로 한 시대를 주름잡던 이인임(李仁任)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전녹생(田綠生), 박상충(朴尙衷) 등과 함께 귀양가게 되었다(대동보 문헌록, 1986).

   1376-1381년 염문 인물의 행적

   1376년에 염제신(廉悌臣)은 원나라로부터 선명자덕대부, 장작원사라는 벼슬을 받았다. 1377년에 염제신은 도총도감(都摠都監)에 임명, 염국보(廉國寶)는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왜구 침략 저지에 참여하였다. 1379년에 염제신(廉悌臣)은 판문하사(判門下事)에 임명되었다. 1380년에 염흥방(廉興邦)은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고, 지공거(知貢擧)로서 맹사성 등을 포함한 인재를 선발하였다. 1381년에 염제신(廉悌臣)은 국가의 원로로서 국정자문(國政 諮問)을 당당하였다.

   1382년 : 신진사류(新進士流) 염흥방 형제들

   우왕대에는 정치적인 운영에 있어서 우왕 옹립을 주도한 이인임 세력과 그것을 방조한 신진사류, 그리고 묵인한 무장세력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왕을 매개로 권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들과 우왕의 왕권 강화 노력을 같은 맥락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탄압한 연립정권은 우왕 8년, 즉, 1382년을 전후하여 자체적인 재정비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한편, 무장세력의 일원이었던 임견미(林堅味)와 신진사류로 활약하였던 염흥방(廉興邦) 형제(국보/國寶와 정수/廷秀) 등이 의기투합하여 연립정권내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초기에는 무장세력, 특히 최영(崔瑩)과 원만한 관계를 지속하였고, 우왕과도 연결을 가졌지만 그것은 서로의 안전 보장정책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즉 이전의 지윤(池奫)이나 양백연(楊伯淵) 처럼 연립정권을 무시한다거나 지나치게 우왕과 밀착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원 간섭기 이후 고려의 정치정세, 이형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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