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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인물

임진왜란시대 활악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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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별

역사속의 염문 선조님들

참고 자료

임진왜란
인 물 들

廉末卿

廉世慶

廉   喜

廉龍成

廉興世

선무원종공신녹권,삼강록,호남절의록, 창의록등

廉悌立

廉   衡

廉   傑

廉   瑞

廉   慶

廉彦祥

廉弘立

 

 

 

 

  ◇ 임진왜란때 염문 선조의 의병 참전 인물들

 

   고려말엽 염씨 일문에게 뒤집어 씌어진 1388년 무진참화때의 역당(逆黨)  누명(陋名)은 300여년이 지난 후인 임진왜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벗겨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의 자초지종과 염씨들의  의병활동(義兵活動)을 알아본다.

  ※.임진왜란
조선조 제14대 선조때, 일본이 조선을 1592-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6년 7개월간 침략한 임진왜란에 대해서 일본에서는 분로쿠케이초역,  중국에서는 만력지역이라고 칭한다.
당시에 일본은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장기간의 전국시대를  종결하고 나라를 통일한 시점이고, 15세기 후반에 상인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점차  밀려와서 신흥 상업도시가 발전됨으로써 그 세력이 커졌다.  이런 신흥세력의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도요도미가 신흥세력을 축출하고  국민을 뭉치려는 방책이 외부와의 전쟁이었다.  

한자
: (文祿慶長之役), (萬曆之逆), (豊臣秀吉)

즉, 전국시대를 통해 얻은 전쟁수행능력을 활용하고 신흥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는 일거양득 전략이다. 당시 조선은 오래된 평화로 전쟁대비가 전무했다.
반면 일본은 오랜 전쟁으로 연마한 병법, 무술, 축성술, 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서양식 신무기 조총을 대량 생산 하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던 일본이 20만  병력을   9개 부대로 편성하여  1592년 4월 13일 조선에 침략, 5월 2일 한양과   6월에 평양을 빼앗아서 선조는 의주로 피난했다.

  조선은 전라도와 평안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일본군에게 내어 주었지만  전라도 수군은 결코 일본에 밀리지 않았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활약으로 일본은 해전에서 연패함에 따라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차단되었고, 6월부터 전국각지에  의병활약과 명나라의 원군때문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1593년 2월에 평양성 회복, 행주대첩 승리, 4월에 한양을 탈환했으며, 밀리던 일본군은 한양, 강원도 및 충청도 주둔 전병력을 남하시켜 접전하는   한편 화의를 진행했지만, 양국의 화의는 몇 년 후 결렬되고, 일본은 1597년 1월15일 15만 병력으로 조선을 재침략한 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1598년 8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병사로 철군을 시작, 11월에 완전히 패퇴, 6년7개월만에 전쟁이 끝났다(조선왕조실록 : 박영규, 1996).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워 공을 세우신 분들을 소개하면 염흥세, 염말경, 염희, 염걸, 염서, 염경, 염세경, 염제립, 염언상, 염홍립, 염득수 등이 있다(문헌록, 1986)

   9世 참판공 염말경 (參判公 廉末卿, 1553-1593)
   의병 창의와 활동 : 公의 휘는 말경인데, 참판공 휘 억년의 아들이다.  공은 젊어서 굳은 지조와 절개가 있었고 겸하여 슬기와 용맹이 뛰어났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삼남(충청,전라,경상도) 지방이 크게 패배하여 국사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공이 분발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천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왜병들은 들판에 가득하고 각 고을은 모두 수비를 잃어버린 형편이었다. 공은 드디어 군대를 결성하여 출전, 혹은 요충지에 웅거해 있다가 적을 교격하여 죽이기도 하고 혹은 밤을 이용하여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싸우기만 하면 공훈을 세워 왜병들을 베 죽이고 군기등을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리하여 왜병들이 다시는 감히 가까이 접근해오지 못함으로써 옥천 등 여러 군이 이를 힘업어 온전할 수가 있었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공을 매우 장하게 여겨 훈련원 첨정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그후 공은 복수장군 고종후가 진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격분을 보내 같이 싸울 것을 약속하고 곧 뒤따라 당도하였으나, 제군이 왜병에게 대패 당함으로써 공도 역시 복수장군 고공(고종후)과 함께 1593년 같은 날 진주에서 순국하셨다. 선조때에 공의 충령을 장하게 여겨 선무원종곤시에 녹훈하고, 공의 아버지 휘 억년께는 왕의 전지에 의해 형조참판을 추증하여 포상하였다.

  선무원종공신 : 선조때에 염말경의 충절을 장하게 여겨서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하고, 통정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경북 청도의 구연서원에서 충경공 염제신과 국파공 염국보와 함께 제향 되었다.(문헌록, 1986).  한자 : (復讐將軍 高從厚), (龜淵書院)

   10세 양산공 염세경 (梁山公 廉世慶, 1566-1646)
    
의병 참모장 : 公의 휘는 세경이고, 자는 유선이며, 호는 양산인데, 휘 寅의 아들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매우 영민하였다.
임진왜란때 공의 장인인 창의대장 임계영이 격서로써 부르니 공은 부친을 모시고 의병에 입대하였다. 공은 장인의 참모로 있으면서 영특한 기운이 분발하고 작전계획이 뛰어나므로, 임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매사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얼마후 적기가 마구 쳐들어 오자 온 군대가 두려워서 어쩔줄 모르므로 공이 혼자서 몸을 날려 적에게로 다가가서 고함을 지르며 분격하니, 적들이 모두 도망쳐 버리고 감히 다시는 가까이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공은 항상 선봉에 있으면서 크고작은 10차례의 싸움에서 적을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대장 임공이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 함으로써 훈정의 품계를 제수받고 1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이에 대한 사실이 산양지에 실려있다.

  뒤에 선비들의 논의에 의해 보성의 양산아래 서원을 건립하여 향사하였으며, 효성 또한 뛰어나 충효가 겸전하여 조정에서 첨정 벼슬을 제수받았고, 그후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추증 되었다. 전라도 보성의 청계영당에 충경공, 국파공, 송은공, 죽림공과 함께 제향 되었다.(문헌록, 1986).
한자: (竹林公 廉悌立),(倡義大將 任啓英),(淸溪影堂)

  10世 금포공 염 (錦圃公 廉喜, 1542-1636)
   
의병활동과 충경공 초상화 : 염희는 역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할 뜻을 품고 창의하여 영남과 호남지역에 격문을 띄우고 병졸과 군량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게 하였다. 공은 숭조사상과 효행이 뛰어나 왜란 중에도 목숨 걸고 "충경공의 초상화"를 지극 정성으로 모셔서 후세까지 전하도록 하였다

  제향지:  염 희는 임진왜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증직되고, 나주 금강서원에 충경공(염제신), 국파공(염국보), 송은공(염치중), 폐와공(염이), 미곡공(염순공)과 함께 제향되었다.

  10세 군수공(郡守公) 염용성(龍成)
  
군수공(龍成)의 자는 경문인데, 현령공(순)의 현손이다. 공은 사람됨이 장대하고 말타고 활쏘는데 뛰어났다. 선조때 무과에 급제하고 서울에서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수 권율의 막하에 종하사면서 왜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태천의 군수를 지냈는데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공이 별세한후, 아들 좌부장 장변이 장연에 장사지냈고,  그 후손들이 그대로 황해도에 살고 있다.

   11세 염흥세 의병(廉興世)
   동암공  염흥세는 염진손의 1남,  호는 동암, 생졸은 미상, 기골이 장대하고 영특하며 학문에 열중하고 독실하고 의(義)를 내세웠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별세후 묘곁에 살았다.
행장예원 판결사 사복시정인  염흥세는 임진왜란(1592-98)때 의병으로 왜병들에게 호통치다가 순절했고, 추증관직이 가선대부다. 아내는 정부인 광주이씨, 묘는 시흥 현내면, 슬하에 염득수
를 두셨다(대동보,1986)
아들이신 12세 염득수(1564-1645)로 추정하면, 염흥세의 생존기간은 대략 11대 중종(1506-44)때부터 선조(1567-1608)까지다.
한자와 해설 :  (東巖公 廉興世), (東巖), (行掌隸院=장예원은 노예문서와 재판을 하는 관청), (司僕寺正/가마와 말의 행정기관 직책), (贈嘉善大夫=종2품), (貞夫人廣州李氏), (廉得水)

   11세 죽림공(竹林公) 염제립 행적
  
죽림공(悌立)의 자는 여의(汝誼)이며, 양산공(세경)의 큰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효도로 어버이를 섬겼고 지성이 매우 뛰어났다. 정묘년 여름철에 밖에 나갔다가 새로 나온 오이를 얻어 가지고는 차마 자신이 먹지 못하고, 어버이를 갖다 드리기 위해 품안에 싸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강물이 잔뜩 넘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쯤이나 건너와서 익사하니 그 말을 들은 사람마다 모두 슬퍼하고 탄식하였다.
  그후에 그 고을 원이 백일장에서, '산양의 옛 나루터에서 오이를 품에 안고 익사한 넔을 조문하다'라는 글귀로 제목을 쓰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은 산양지에 실려 있으며, 임진왜란때 많은 공을 세웠다.

   11세 찰방공(察訪公) 염 행적
  
 찰방공(衡)은, 휘 언호의 아들이요, 청강공 후손이다. 임진왜란때 군수 강찬이 북청에 피란가 있었으므로 공이 김국준과 함께 군대를 分定한 다음 단천군 파도면의 문암과 이상면의 가응주.마천령 등지에서 대전하여 왜적을 많이 참획해서 공을 세웠다. 공의 군공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주을온만호를 제수하였는데, 공이 신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고의적으로 부임하지 않았다는 죄과를 씌워 경성에 유배하였다.
  그후로 누차 소명 기회가 있었으나 나가지 않았는데, 뒤에 황산도 찰방에 제수되었다. 이 사실은 단천읍지에 실려있다.

  12世 퇴은당 염 (退隱堂 廉 傑, 1545-1598) 장군 부자와 형제들
   의병창의 : 염 걸은 동생 정헌공 염 서절제공 염 경과 아들 강제공 염홍립 등 형제 및 부자가 합심해서 창의하여 전라남도 강진 구진포에서 왜적을 격퇴했고, 정수사 싸움에서 절제공이 순국하셨다.
한자 : (貞軒公 廉 書), (節齊公 廉 慶), (剛齊公 廉弘立), (淨水寺)

  의병장 : 그후 염 걸은 의병장으로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아 전라남도 장흥 회령진에서 있는 적을 무찌르고 몰운대 왜교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수문장에 제수되고, 노량해전에서 왜적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거제도까지 추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다가 부자형제가 모두 순절하여 일문이세사충을 낳았다.  
한자
 : (沒雲臺 倭橋城), (一門二世四忠)
  전승비 : 고금도에 염 걸의 전승비가 세워지고, 선무원정 2등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명정하여 포충되니, 전라도 능주의 오류리 사충각 유천사에 제향되었다.사충부자형제묘 : 전남 강진군 칠량면 단월리에 있는 이들의 묘소 사충부자형제묘는 1978년 지방기념물 36호로 지정되었다(문헌록,1986).  <자세한 내용 보기>
한자 : (命旌), (褒忠), (四忠閣 柳川祠), (四忠父子兄弟墓)

   12世 참의공 염언상 (參議公 廉彦祥, 1568-1697?)
   
이순신 장군 휘하의 참모장 : 염언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옥포 한산도 추풍령 전투 : 특히 옥포 한산도 싸움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훈련원 첨정에 제수된 후, 추풍령 전투에서 순절함으로써,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경상남도 통영시 정양동에 공의 사적비가 있다(문헌록, 1986).   
<자세한 내용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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