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軒비고 자료
시 조 : 염 형 명 중시조 : 염 제 신
파주염씨(坡州廉氏)는 파주(舊 峰城 ·曲城 ·瑞原) 땅에 터를 잡은 후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공을 세워 삼한공신(三韓功臣)이 되고, 벼슬이 대사도(大司徒)에 오른 염형명(廉邢明)을 시조로 하고 공민왕 때 좌우정승을 지내고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巨)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璧上三韓三重大匡) 을
맡으셨고, 관명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시며,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에 봉해진 충경공(忠敬公) 염제신(廉悌臣)을 중흥1세조로 하고 있다.
그간 시조 대사도공과 중흥1세조 충경공 사이의 계대를 다 밝히지 못하여 전 족인이 울민초조(鬱悶焦燥)하던 중 1986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여러 문헌을 고증하여 두 분 선조 사이의 소목(昭穆)을 옳게 밝혀 바르게 이었으니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마땅히 세대(世代)를 셈하여 내려오는 것이 옳다 하겠으나 그동안 모든 족인들이 충경공을 1세조로 모셔와 이것이 관습화 되었고, 또 그간에 제작된 많은 묘비와 서책에도 그리 기재되어 있어서 갑자기 사도공으로부터 계대하면 많은 혼란이 일어 나겠기에 이를 막기 위해 예전대로 충경공을 1세조로 하고 충경공 윗대부터 사도공 까지를 상계로 하기로 한 것이다.
본관은 처음에는 시조가 세거의 터를 잡은 곳의 당시 지명이 봉성이었기 때문에 봉성으로 하였다가 중흥1세조가 곡성부원군에 봉해지자
곡성으로 개관하였다. 그 후 곡성이 서원으로 개칭됨에 따라 서원을 본관으로 쓰다가 1504년(연산군10)에 서원이 다시 파주로 바뀌자 종중의 합의를 거쳐 파주로 일원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헌에는 염씨의 본관이 담양 ·개성 ·순창 ·용담 등 7O여 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이는 모두 분파 세거지에 불과할 뿐 실은 파주 단본이다.
중흥1세조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에 있으나 남북 분단으로 내왕이 막혀 향화(香火)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사손(關孫)의 세거지인 전남 나주시 삼영동에 파주염씨 양세사단기실비(坡州廉氏兩世祀壇記實碑)를 세워
1세조인 충경공 제신(悌臣)과 아들 국파공 국보(國寶) ·동정공 흥방(興邦) ·청강공 정수(廷秀)
3형제분의 위패를 모시고 세제를 올리고 있다. 아울러 송은공(松隱公) 치중(致中) ·폐와공(閉窩公) 이(怡) ·미곡공(微谷公) 순공(順恭)의 단을 세우고 향사하고 있으며, 전국의 유림과 후손들이 합심하여 그곳에 충경서원(忠敬書院:忠敬公 제신·국파공 국보 동정공 흥방 ·청강공 정수·송은공 치중 제향)을 세워 매년 유림의 주관으로 향사하고 있다.
충경공 신도비(忠敬公神道碑)는 원래 고려 우왕 9년에 한산백(韓山伯) 이색(목은) 선생의 봉교찬(왕명에
의하여 글을 씀)과 청성군(淸城君) 한수(韓修) 선생의 전병서로 경기도 장단에 건립되었었으나 6 ·25동란의 포화속에 훼손또는 멸실되었을 것이
상정(想定) 되므로 후예세대(后裔世代)에게 추원봉선(追遠奉先)할 기희가 주어지지 못할 것이
우려되어 1987년 문중의 발의로 경기도 강화읍 선원면 냉정리에 사단(忠敬公 제신.국파공
국보.동정공 흥방.청강공 정수)을 설치함과 동시에 충경공 신도비의 본비명서(本碑銘序)를 그대로옮겨 전석 건립(鐫石建立)하고
매년 세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1851년 철종(哲宗)이 이곳에
외조부 의정공(議政公) 성화(星華)와 배위를 모시는 봉안사(奉安祠
: 地方文化財 32호)를 건립하여 제향하고 있다.
그리고 경북 영천군 남면 칠백동 채악산아래
절도사공 가칭의 아들 재상공 현(顯)과 국파공 국보(國寶) 경은공 치용(致庸) 3위의
묘소라는 전언에 따라 이곳 일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년 세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염성(廉姓)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서기 24년경 낙랑군
함자현(樂浪都含資縣)에 기반을 구축한 득성조(得姓祖) 염사치를 비롯하여 신라 선덕여왕 때 국정에 참여한 염종(廉宗)과 진덕여왕때 육공(六公) 중의 한사람으로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대신의 반열에 올랐던 염장(廉長)
및 염거(廉居), 그리고 고려 개국 2등공신인 염상(廉相)과 염경(廉卿) 등 혁혁한 공훈과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역사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 시대부터 이 땅에 정착한
뿌리 깊은 토성(土姓)으로 보지만, 시조 이상의 세계는 상고할 수 없어
더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시조이신 대사도공 형명(邢明)이 지금의 파주땅인 봉성현에 세습 전사(世襲田舍)를 마련하여 세거하면서
부터 소목(昭穆)이 확실한 염씨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관 대작을 지내면서 고려의 국력 신장과 함께 크게 번성했다. 대사도공의 아들 위(位)는 군자감승을 지냈고, 위의 아들 가칭은 병마절도사로 서북면을 지켰다. 1010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서북이 함락되고 군자감승공과 절도사공 부자가 함께 거란의 포로가 되어 갖은 협박과 회유를 받았으나 한사코
지절을 굽히지 않으니 적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고 하며, 그 후 46년이 지난 문종 10년에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전장(田匠)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절도사공의 손자 한(漢)은 문종 때의 이름난 무신이다. 당시 경주 지방에
침입해 온 동여진올 토벌하고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상서공 한(漢)의 손자인 효문공(孝文公) 신약(信若)은. 인종 때 문과에 급제,
광주 장서기(廣州掌書記)가 되고 부친상 때 3년간 여막에서 시묘(侍墓)하여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명종 8년에는 서북면 병마사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했으며 학문이 깊어 정당문학 ·이부상서 등을 지내면서 동방문학의 부흥에도 힘썼다. 충정공(忠靖公) 승익(承益)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도첨의중찬에 이르렀는데 이 분이 중흥1세조 충경공 제신의
조부이다.
충경공 제신은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한 살 때 원나라에 들어가 평장사로 있던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후에 원나라 태정황제의 총애를 받아 측근에서 시종하다가 충숙왕 때 원의 정동성 낭중이 되어 본국에 돌아왔다. 당시 원나라의 벼슬을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자들이 많아지자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억제하여 왕의 신임올 얻었고, 충목 ·충정왕 때 여러 벼슬을 거쳐 공민왕초에
좌정승이 되었다. 그무렵 공민왕은 원의 세력을업고 횡포를 부리는 친원파 일당을 숙청한후 원나라의 보복을 두려워 한 나머지 충경공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으니 공은 만약올 대비하여 성을 수축하는 등 군비 강화에 힘썼다. 그 후
벼슬이 일인지하(一人之下)요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까지 오르자 요승
신돈(辛旽)과 간신 김흥경(金興慶) 등이 여러 차례 모함하였으나 왕은 끝까지 공을 신임했다.
공은 3O여년간 5조(忠惠王·忠穆王·忠定王·공민왕·禑王)를 섬기면서 출장 입상한 공으로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으로 추대되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특히 공민왕은 친히 영상을 그려 하사하기까지 했다. 공에게 아들 3형제가 있었으니 큰 아들 국파공 국보는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 선생의 문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포은(團隱)
정몽주(鄭夢周), 목은 이색과 더불어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를 거쳐 우정승을 지냈고, 추충보절공신으로 삼중대광에
이르러 서성군(瑞城君)에 봉(封)해졌다.
둘째아들 동정공 홍방은 목은
이색 선생의 문우로 공민왕 6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좌대언을 지내고,
공민왕11년 지신사(知申事)로서 홍건적올 대파하여 수도인 개성을 탈환하는 데 공이 있어 2등공신으로 밀직부사를 거쳐 제학(提學)이 되었다. 1374년 탐라(濟州島) 목호(牧胡)의 난에
양광 ·전라 ·경상도 도병마사로 최영등과 이를 진압하여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지고, 삼사좌사가 되었다. 한편 학문이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맹사성(孟思誠) 등 많은 명사(名士)를 선발하였고,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으로 광정대부 문하평리 겸
성균관 대사성 상호군이 되었으며,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셋째아들 청강공(淸江公)
정수(廷秀)는 목은 이색선생의 문우로 공민왕 2O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우왕 9년에는 지신사(知申事)로서 한때 전주(錢注)를 맡았다.
정몽주(鄭夢周) ·하윤(河崙) ·이숭인(李崇仁) ·강회백(姜淮伯) 등과 더불어 문무관의 관복 ·품대(品帶) 제정에 주동이 되어 1품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 사모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도록 하여 품대(品帶)에 차등을 표시토록 하였다.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 ·동지밀직(同知密直) ·우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국파공의 큰아들 송은공(松隱公) 치중(致中)은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인으로 우왕 원년에 문과에 급제, 봉익대부 동직밀직사사 상의회도감사 상호군 판종부시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경은공(耕隱公) 치용(致庸)은 포은(團隱) 선생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을 지내고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처럼 화려하고 번성했던 염씨 문벌이 고려의 운명과 함께 빛을 잃기 시작하여 1388년(우왕14) 무진지란(戊辰之亂)을 겪으면서 멸문의 참화를 입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고려를
지키려는 훈구파와 새 왕조를 세우려는 신진 세력간의 대립이 첨예화했다. 훈구파인 이인임(李仁任)이 그의 심복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정권을 장악하여 독단 전횡하여 많은 문신을 몰아내고 자신의 심복만을 요직에 배치하는 등
전횡을 부리자 우왕이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게 은밀히 명을 내려 임견미 등 5O여명을 죽이고 이인임을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때
훈구파에 속했던 동정공 흥방 3형제도 화를 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조금 다르다.
시조 대사도공이 고려 건국에 참여한 이후 대대로 고려에 충절을 바쳤고 아버지가 3O년을
한결같이 출장입상하여 풍찬노숙하면서 지켜온 고려의 운명이 낙조처럼 기우는 것을 아들들이
좌시할 수가 없어 이성계 일파와 정면대결하다가 날조된 죄상으로 희생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국파공의 아들인 경은공 치용(致庸)이 조선조 태종에게 소명되어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참소를 당해 빛을 보지 못하고 끝내 가세를 다시 일으킬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게 아닐까 한다.
9세 현감공 주(宙
: ?~1531 단성.경성현감)가 충경공의 유상(공민왕 친필 영상)을 찾기까지에는 하늘의 도움이 있었다. 현감공이 경차관(敬差官) 시절 어느날 경기도 광주땅을 지나던
중 갑자기 소낙비를 만나 비를 피하려고 근처에 있는 암자에 들어갔다가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다. 수인사 끝에 현감공이 염(廉)가 성을 쓴다고 하자 스님은 부처님의 도움으로 충경공의 유상을 모실 자손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하며 공민왕이 친히 그린 초상화를 내주었다.
공은 백금으로 보은하고 나주에 금강서원을 건립, 유상을 봉안하고 매년 봄, 가을에 예를
갖추어 행사(行祀)하였다. 충경공의 유상은, 원래 원찰(願刹)에 모셔져 있었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에 다른
사찰로 옮겨가던 중 그 암자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이 유상은 보물
제1097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염씨 일문에 씌워진 역당(逆堂)의 누명은 3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에야 비로소 벗겨지게
되었다. 난이 일어나자 8세 참판공 말경(末卿 : 1553~1593)은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공을 세우고
왜군을 물리쳐 적이 감히 지경을 넘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근 지방을 온전히 보전케 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훈련원 첨정에 제수하였다. 그는 복수장군(復讐將軍) 고종후(高從厚)와 같이 진주로 들어가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선조 때 공의 충렬을 장하게 여겨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하고 통정대부 병조참판에 추증하였으며 경북 청도의 구연서원에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국파공 국보와 함께 제향되었다.
10세 금포공(錦圃公) 희(喜 : 1542~1636) 역시
난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할 뜻을 품고 창의하여 영호남에 격문을 띄우고 병즐과 군량을 모아
왜적을 물리치게 하였다. 공은 또 숭조 사상과 효행이 뛰어나 왜란 중에도 목숨을 걸고 충경공의 유상을 지극 정성으로 모셔 후세에까지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중직되고 나주의 금강서원(錦江書院)에 충경공을 봉안하고 국파공 ·송은공 ·폐와공 ·미곡공 ·현감공이 함께 제향되었다.
10세 양산공(梁山公) 세경(世慶 : 1566~1646)도 죽림공(竹林公) 제립(悌立)과 함께 창의하여
부옹(빙장)인 창의대장(倡義大將) 임계영을 도와 참모장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크게
공을 세웠고 효성 또한 뛰어나 충효가 겸전하다 하여 조정에서 첨정의 벼슬을 제수받고 후에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보성의 청계영당(淸溪影堂)에 충경공을 봉안하고 국파공 ·송은공 ·죽림공이 함께 제향되었다.
12세 퇴은탕(退隱堂) 걸(傑 : 1545~1698) ·정헌공(貞軒公) 서(瑞) ·절재공(節齋公) 경(慶) ·
강재공(剛齋公) 홍립(弘立) 등은 부자 형제가 함께 창의하여 강진 ·구진포에서 왜적을 격퇴하였고 정수사(淨水寺) 싸움에서 절재공이 전사했다. 그 후 의병장으로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아 장홍 ·회령진에 있는 적을 무찌르고 몰운대(沒雲臺) 왜교성(倭橋城)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수문장에 제수되고 노량 해전에서 왜적을 세 번이나 물리치고 거제도까지
추격하여 백병전을 벌이다가 부자 형제가 모두 순사하여 일문이세사충(一門二世四忠)을 낳았다. 고금도에 전승비가 세워지고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명정(命旌)하여 포충(褒忠)되니, 능주의
오류리 사충각(四忠閣) 유천사(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전남 강진군 칠량면 단월리에 있는 이들의 묘소인 사충부자형제묘(四忠父子兄弟墓)는
1978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36호로 지정되었다. 12세 참의공 언상(彦祥: 1568~1697)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특히 옥포 ·한산 싸움을 승리로 이끈 공으로 훈련원 첨정에 제수된 후
추풍령 싸움에서 순절하여 선무원종 2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경남 충무시 정양동에 공의 사적비가 세워져있다. 임진왜란 때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많은 염문(廉門)의 인물들이 충절을 다하여 싸웠다. 11세 만산공(晩山公) 우혁(友赫)은 1627년(인조5)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을 거쳐 병자호란때 어가를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충성을
다하여 적을 막았다. 그 공으로 독전어사(督戰御史)에 임명된 후 문천 ·희천 ·연안 ·장연 ·북청 ·철원 등 아홉 고을의 수령을 거치며 많은
치적을 남겼다. 후에 조정에 들어가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내고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함경남도 단천의 송산사(松山祠)에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조암공(肇巖公) 덕우(德遇)와 함께 제향되었다.
첨정공 산국(山國)도 병자호란 때에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힘껏싸워 성을 지킨 공으로 〈산국(山國)〉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훈련원 첨정에 제수되었으며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렇게 우리 염문(廉門)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호국 열사들을 모신 서원 ·사우가 도처에 있으니,충북 옥천군 군북면 용호리 용강사(龍江祠)에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국파공 국보(國寶) ·동정공 흥방(興邦) ·청강공 정수(廷秀) ·권무공 순(恂) ·판서공 증(憎)을 제향하고 있고,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
수현사(水弦祠)에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충남 대덕군 동면 효평리 효평사(孝坪祠)에도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국파공 국보 ·청강공 정수를 제향하고 있으며 경남 함안군 안의면 봉산리 반계영당(盤溪影堂)에는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있으며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청수리 청수사(淸水祠)에도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있다. 강원도 영월군 수위면의 추원사(追遠祠)에도 충경공 제신을 봉안하고 있다. 이 밖에 후진 인재 양성의 교육 강론장으로
나주의 금강서원(錦江書院) 청도의 구연서원(龜淵書院), 보성의 청계강당(淸溪講堂), 거창의
하산서당(霞山書堂) 함양의 경현당(景賢堂) 등이 있다.
입향조(入鄕祖) 묘소(墓所)의 재실로는
나주의 영모재(永幕齋 : 현감공 縡, 副正公 紀, 主簿公 淑)와 추원재(追遠齊), 보성의 웅산재(熊山齋 : 淑夫人 함양박씨)와 영사재(永思齊 : 副正公 愼孫, 參奉公 浩), 강진의 추모재(追慕齋 : 退隱堂 傑의 출생지), 보령의 경모재(景慕齋 : 水弦祠 齊室), 옥천의 항모재(龍江祠 齋室),
청도의 영소재(永昭齋 : 龜淵祠 講堂), 합천의 인산재(仁山齋)와 동명재(東明齋), 함양의 삼천재(森果齋), 거창의 학고재(學古齋), 임실의
경사재(敬思齋 : 主簿公 應東), 경기도 광주의 추소재(追昭齋) 등이 있다. 선조들이 풍류와 도(道)를
즐기던 정각(亭閣)으로는 철령의 침류정(枕流亭 : 동정공 흥방), 나주의 납상정(納爽亭),
함안의 관운정(冠雲亭), 합천의 유풍정(遊風亭) 등이 있었다.
근세 인물로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했던
추정(秋汀) 온동(溫東)이 빛난다. 공은 3 ·1운동 때 남만주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 차례나 투옥당했다. 1921년 상해로 건너가 전차 수표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격투 끝에 탈출하였고,
중일전쟁 때는 중경에서 임시정부 서무과장, 광복군 사령부 서무과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했다. 또한 1905년 충남 홍성에서 기의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동년 6월 4일에 체포되어 순사한 염석산, 영월 출신으로 1919년 3월 3일
장날을 기해 만여 매의 태극기를 만들어 논산 보통학교 학생들과 군민들에게 배포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국한 염승필(廉承弼), 강화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심한 옥고를 치른 염성오(廉成五), 광복군 대원으로서 1920년 11월 동지 17인과 함께 입국하여
갑산 대평리에서 왜적과 대치하다가 전사한 염흥미(廉興味), 광복군에서 활약한 공적으로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염재항(廉宰桓), 1907년 의병대장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호남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의병장 염동현(廉東鉉)과 황해도 연백인으로 염천태(廉天泰)와 경기도
파주인 염규호(廉圭浩)는 1919년 3 ·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심한 옥고 끝에 순사하였으며,
보성인 염동규(廉東圭)와 염용수(廉龍洙)도 의병활동에 참가, 순사하였다. 민비 살해 및 을사조약 등 일본의 침략 행위에 의분을 참지못하여 1906년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를
맹세하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구치 대첩을 비롯해서 2O여 회에 걸친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가
1909년 9월 2O일 안규홍(安圭洪)과 같이 체포되어 42세의 일기로 옥사한 의병장 염재보(廉在輔) 등이 염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법조인으로는 염세열(廉世烈)이 변호사로 이름을 떨쳤으며 4 ·19 때 특검 차장검사로 강직하고 공정하게 사건을 처리했던 염창렬(廉昌烈) 등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정계 인물로는
충남 공주 출신 염우량(廉友良)이 자유당 때 국회의원(원내부총무)으로 활약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 〈해방의 아들〉의 작가로 28편의 장편과 148편의 단편 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일생을 문학과 신문의 정론 직필에 바치며 살아온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은 문단의 큰 별이요 우리 염문의 자랑이다.
암울했던 시대의 고독을 술로 다스리며 살아온 산문 정신의 주도자인 염상섭은 술만 마시면
갈지〈之〉자로 걷는다 하여 스스로 호를 횡보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술을 사랑하다 갔다.
(이 외에도 문 ·무 ·효 ·열로 염문을 지켜온 많은 선조들이 계셨음을 부기해 둔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명신록 ·한국사 ·조선의
병사 ·조선독립운동사 ·삼일운동사 ·금석총람 ·파주염씨족보
外. (1991.1.1발행 梅軒備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