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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경공 염제신의 신도비문(목은 이색)
파주염씨 중시조님의 신도비문
  
   이 신도비문은 이색의 목은문고 제 15권, 동문선 제119권에 있다.
삼절(三絶)이란 세가지가 절정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인데. 절정이란 '사물이 치오른 극도'를 말하고, 절세란 '세상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을 만큼 훌륭하게 빼어났다'는 것으로, 최고의 미인을 '절세가인'이라 하듯이 절대적으로 어느것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임.
삼절이 된 이유는 충경공의 우뚝한 성업, 빛나는 이색(李穡)의 문장, 뛰어난 한수(韓脩)의 글씨이다.
   즉, 매헌 휘 제신 선조님은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돌아가시자, 신도비를 세우도록 왕명을 내리니,  당대의 최고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신도비명을 짓고(그래서 목은 문집에 수록된 것임),  글씨의 대가인 한수가 글씨를 써 전각한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충신이었기에 공민왕께서 초상화를 친히 그려 하사하시고,  우왕은 국장으로 장사 치루도록 했으며,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에게  신도비문을 짓도록 하명하고, 충경공이란 시호(죽어서 받는 이름)를 내리시었으니,
중시조 염제신 선조가 어떤 경지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曲成府院君
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幷序
고려국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 신도비 병서

  上之九年歲在壬戌春三月
太平宰相曲城府院君年七十又九 病
公卿大夫日造門起居 子孫滿堂
朝夕奉湯藥 禱于上下無不擧
上遣中官問疾 賜藥賜酒
  嗚呼人事可謂盡矣 而竟無效
  嗚呼其命也夫
公平生康强無久患  老而神彩益秀
人必其享年之彌高也
而至於斯 不曰命歟
 
 
   금상(고려 우왕을 말함)의 9년인 임술년 3월에 태평 재상인 곡성부원군이 79세로 병환이 들자, 공경 대부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문안하였고 당에 가득한 자손들은 아침 저녁으로 탕약을 받들어 올리면서 천지 신명께 기도하는 일을 조금도 소흘함이 없이 하였으며 상(임금)께서는 중관을 보내 문병하고 약과 술을 하사 하였다.
   아, 사람이 할 일은 참으로 다 했다고 할 만했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했으니,  아 ! 운명인가 보다. (금상 9년=고려 우왕 9년)
   대체로 공은 평소에 건강하고도 강단이 있었고 오랫동안 신병을 앓은 적도 없어 늙어서도 풍채가 더욱 수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이 큰 수를 누릴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公將病 訓子弟薄葬
曰吾死後三日下壙 毋煩有司 訃聞
上悼甚  宰相曰 曲城遺命葬用三日
不敢違也 至於有司供葬事 國典也
虧之 咎將誰執
且於公而不國葬 國葬之禮 施之何人
乎 特集都堂董攸司 一無所闕
禮之所由生也  禮也者 國家之所以爲美者歟
 
 
 
 공은 병환이 있을 때, 자손들에게 자신을 박장(간단한 장례)할 것을 훈계하면서, "내가 죽거든 죽은 지 3일 만에 장례를 치를 것이며 유사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상께서 매우 애도하였다. 이때 재상이 말하기를, "삼일장으로 치르라는 곡성의 유명은 감히 어길 수 없으나 유사가 장사를 주관하는 것은
국가의 법이니 이 일을 폐지한다면 그 허물을 누가 책임 지겠는가. 그리고 공에게 국장을 치르지 않는다면 국장 치르는 예는 어떤 사람에게 쓰겠는가" 하고는, 특별히 도당을소집, 유사를 감동하여 조금도 결례된 것이 없게 하였다.
   아, 공이 국장으로 하지 말라고 사양한 것과 재상이 국장을 거행한 것은 모두 예가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겠으니 예라는 것은 국가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臣職在紀纂 矧玆明諭刻銘新道 敢不奉敎
謹案曲城姓廉氏名悌臣字愷叔小字佛奴
瑞原大族也 
遠祖諱顯 相文廟取士成均  爲宰相
諱信若 相明廟再知貢擧  位至太師
曾祖諱純彦 卒官小府丞
贈銀靑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祖諱承益 興法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諡忠靖   相忠烈王 與許侍中趙侍中 相次秉政 一時名公卿 無敢抗禮者
 
 
 신은 기찬하는 직에 있는 데다가 더구나 '공의 신도에 명을 각하라'는 밝은 하유까지 받았으니 감히 상교를 받들어 시행하지 않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곡성의 성은 염씨요 이름은 제신이며, 자는 개숙이고 소자는 불노인데 서원의 대족이다.
   원조인 휘 현(顯)은 문종을 섬기면서 성균시로 선비들을 뽑았고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휘 신약(信若)은 명종을 섬기면서 두 번이나 지공거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다. 증조인 휘 순언(純彦)은 벼슬이 소부승에 이르렀는데, 은청광록대부로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에 증직되었다. 조(할아버지)인 휘 승익(承益)은 흥법좌리공신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이 되고 벼슬이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충렬왕을 섬기면서 허시중 ·조시중과 더불어 서로 교대해서 국정을 맡았는데 당시의 명공 거경이 누구도 감히 대등하게 맞설 자가 없었다.
 
 考諱世忠 卒官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
 妣嘉順宅主趙氏  推忠保節同德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判都僉議平壤府院君諡貞肅諱仁規之女   以大德甲辰十月戊申
  生公 六歲而孤  公內外侍中家蒙養 已非常人比 年十一 姑夫中書平章末吉  召置之左右
迎儒生授業者十年  故其德器冠一世
 
 
 고(아버지)의 휘 세충(世忠)인데,  벼슬이 중현대부 감문위 대호군에 이르렀다.
   비(어머니)는 가순택주 조씨로 추충보절동덕공신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이 되고 벼슬이 판도첨의에 이르고 평양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정숙인 휘 인규의 딸이다.
   대덕(大德 : 원나라 성종의 연호) 갑진년 10월 무신일에 공(公)을 낳았다.
   공은 6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본가나 외가가 모두 시중 집안이라서 가정 교훈이 벌써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11세 때 원(元)나라 중서평장사인 고부 말길이 공을 데려다 놓고 유생을 맞아 10년 동안 공을 가르쳤다. 그래서 공은 학덕과 기국이 한 세상의 으뜸이 되었다.

  泰定甲子 晋邸入繼大統 末吉公率公 
 迓駕于和林 帝一見奇之 命公宿衛禁中
眷顧異常  末吉 大臣也  帝又親信 然以病不能朝 帝有所疑 必命公咨于家 其有所奏 公悉達之
  大夫帖失旣誅  以女弟賜公
公曰臣雖無知 不願近逆黨  帝愈重之
  歲壬戌(丙寅) 請于帝 臣母久不見
願賜告 帝感其言 降香金剛山
授金宇圓牌 所以賁其行也
 所以遄其歸也
是時使者旁午 皆丈朝廷威靈
凌辱宰執  視守令如犬馬
  公於宰相恭 於守令加禮貌
且無一事干謁于上
 
 
   태정(泰定 : 원나라 진종의 연호) 갑자년(1324)에 진종이 제왕으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을 때, 말길이 공과 함께 화림에서 진종의 어가를 맞이하였는데, 이때 진종이 공을 한번 보고는 매우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공에게 금중을 숙위하라고 명하고 남달리 돌봐 주었다.
   말길은 그 당시 대신이었는데, 진종이 또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래서 말길이 혹 병환으로 조회하지 못했을 때 진종이 의심난 일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공을 명하여 말길의 집에 가서 자문해 오게 하였으므로 말길이 상주하는 것은 공이 모두 받아서 주달하였다.
   대부 첩실이라는 자가 복주된 후, 진종이 그의 누이동생을 공에게 배필로 정해주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신이 아무리 무지하지만 역당과 가까이 하기는 원치 않습니다" 하니 진종이 공을 더욱 존중하였다.
   임술년(병인년)에는 황제에게 청하기를 신이 어머니를 오랫동안 가 뵙지 못했으니 가 뵐 수 있도록 휴가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금강산에 강향하면서 공에게 금자원패를 주어 보냈으니 이는 첫째 공의 행차를 빛내기 위함이요,  둘째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때에 많은 사자들이 왕래하면서 모두 원나라 조정의 위령을 빙자하여 고려의 재신들을 업신여기고 수령들을 마치 견마처럼 천시하였다. 그러나 공은 고려의 재상들에게 공손히 대하고 수령들에게는 더욱 예모를 갖추었으며 또 한 가지 일도 사사로 부탁하기 위해 임금 뵙기를 간청하지 않았다.

 旣還 授尙衣使
 至順辛未
又降香愈益謹
父老曰年雖少 不愧老成人
是眞內外侍中孫矣
  至順癸酉 公以慈侍之故
請于朝出爲郞中征東
時同寮頗弄威福 公極力爭之
多所裁抑 田民詞訟 悉還攸司
忠肅王歎曰廉郎中淸簡矣
左右司請署文移
 
 
 고향을 찾아보고 다시 원나라에 돌아가자 상의사를 제수하였다.
   지순(至順 : 원나라 문종의 연호) 신미년(1331)에 또 강향 차 고려에 와서는 더욱 더 삼가고 조심하므로 고향의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젊지만 노성(老成)한사람에 못지 않다. 이 사람이야 말로 시중의 손자요, 시중의 외손자가 분명하도다" 하였다.
  지순 계유년(1333)에는 공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시양할 일로 조정에 청하여 정동낭중이 되어 고려로 나왔다. 이때 동료들이 자못 위복을 농간하자, 공이 극력 다투어 저지시킨 것이 많았다. 그리고 농민들의 송사는 일체 유사에게 돌려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충숙왕이 칭찬하기를,  "염낭중은 참으로 청백하고 검소하도다" 하였다. 그리고 좌 ·우사에서 공문서에 서명하기를 청하면

 上曰吾郞中署乎
有則行無則止 其曰吾郎中者
愛之故親之也 留公者九年 王薨
公曰吾不可久留矣 會朝命以翊正司丞召
階奉訓大夫也  至正癸未 奉使江浙省
會計中政院錢貨 官史多行賂求媚
公一切却之 丞相別哥不花公
待以殊禮 及其入相  薦公於帝曰
老臣在江浙  知廉佛奴淸白過人
具以其事白帝 將用公
 會大夫人病  力請歸覲 不果用
 
 
왕이 말하기를,  "우리 낭중이 서명 하였는가?" 하고는,  서명하였으면 자신도 하고, 서명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하지 않았다.
  왕이 〈우리 낭중〉이라고 한 것은 매우 공을 사랑하기 때문에 친히 여겨 한 말이다. 공이 고려에 머무른 지 9년 만에 왕이 승하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하였는데, 이윽고 조명이 내려 익정사승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품계는 봉훈대부였다.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의 연호) 계미년(1343)에는 공이 사명을 받들고 강절성에 파견되어 중정원의 전화를 회계하였는데 관리들이 공에게 아첨하느라 많은 뇌물을 가져오곤 하였으나 일체이를 물리쳐 버렸다. 그러자 승상 별가불화가 공을 융숭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후 조정에 들어가서 승상이 공을 황제에게 천거하면서 말하기를,  "노신이 강절성에 있으면서 염불노가 매우 청백함을 알았습니다" 하면서,  갖춰 그사실을 아뢰었다. 그래서 황제가 공을 장차 중용하려 하였는데, 마침 공의 대부인께서 병환이 있어 공이 고향에 가서 어머니 모실 것을 극력 청한 까닭으로 공을 등용하지 못하였다.
 
  歲丙戌六月十七日
明陵曰廉某事皇帝爲朝臣
佐我大父忠肅王爲幕官 共圖國政
在我今 日雖於本國未嘗仕
不可以常法論也 於是拜匡靖大夫三司右使上護軍
 明年秋 加重大匡賜輸誠翊戴功臣之號 俄轉都僉議評理
 冬十二月 進贊成事 征東宰屬
欲問臺臣短長  大夫李公遂也
 公以謂臺綱非所當撓 李大夫一時之傑 其可辱乎 吾而不言 吾負吾學矣 入告事得寢
 
 
   병술년(1346) 6월 17일에 충목왕이 말하기를,  "염모는 중국에서는 황제를 섬겨 조신이 되었고, 고려에서는우리 대부 충숙왕을 도와 막관이 되어서 함께 국정을 도모하였으니 오늘날 나의 대(代)에 이르러선 비록 본국에서 벼슬한 적이 없다 할지라도 평범한 법으로 논하여 그를 소홀히 대우해서는 안된다" 하고는, 공에게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을 제수 하였다.  
   그 다음 해 가을에는 대광을 더 제수하고 수성익대공신의 호를 하사받았다. 이윽고 도첨의평리에 전직 되었다. 이 해 12월에는 찬성사에 승진되었는데,  정동성의 재속이 우리나라 대신을 문책하려 했는데 대신은 바로 어사대부 이공수였다.
  공이 이르기를,   "어사대의 기강은 의당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대부는 한 시대의 호걸이거늘 그를 모욕해서 되겠는가. 내가 여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의 학문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서 그 사실을 고(告)하여 일이 잘 무마되었다. 
 
 
歲戊子 進判版圖司事 明年有國卹
政丞王煦朝于  天子 委公庶務
公裁決平允 中外安焉
 歲己丑 聰陵卽位
拜重大匡都僉議贊成事判版圖
 歲庚寅 奉國表賀聖節于京師
 歲辛卯 玄陵印位 欲用公 趙日新者
公外家也 以私憾沮之 日新敗之明年 上曰廉某之賢 吾所知也 日新惡之甚 吾懼其不相能也 故不能用 今其可緩乎 復贊成事
 
 
 무자년(1348)에 판판도사사에 승진되었다. 그 다음해에 국상이 나서 정승 왕후가 중국에 조회가면서 공에게 모든 국무를 위임하자, 공이 국무를 매우 공평하게 재결하니 중외가 다 편안하였다.
   기축년(1349)에 충정왕이 즉위하여서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에 제수되었다.
   경인년(1350)에는 표문을 받들고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신묘년(1351)에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을 등용하려 하자, 공의 외가 사람인 조일신이라는 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그를 저지하였다.
 조일신이 패망한 다음해에 상(上)이 말하기를,  "염모의 현능함은 내가 잘 아는 바이나 조일신이 염모를 매우 미워하므로 나는 둘이 서로 잘 지내지 못할까 두려워서 염모를 등용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이야 더 이상 늦출 수 있겠는가" 하고는. 찬성사에 복직시켰다.
 
甲午正月十一日
拜公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上護軍 領景靈殿事
  二月十六日 進右政丞判典理
領孝思觀餘竝如故
  公方銳意 用新庶政  其夏蔡政丞河中 以脫脫大師之勢  請兵于王 謀復職
  公知之乞退 上亦爲其所逼
用蔡而封公曲城
  大師所召皆宰相及驍勇人也
公亦在行中  至平壤  其驍勇輩謀曰
吾等離親族左墳墓 以就死地
  何日而旋歸乎 乃告於公欲不行
公曰非計也 吾君天也 天可逃乎
且忠臣義士 豈宜有反側之言乎
與柳政丞濯  間道疾行 旣至都
  上馳人請還公   帝曰廉某 高麗之大臣 且大族也 其禮以遣之 賜宴徽政院以寵之
 
 
  갑오년 정월 11일에 공에게 단성수의 동덕보리공신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를 제수하고 2월 16일에는 우정승에 승진, 판전리 ·영효사관사를 겸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그전과 같았다.
   공은 한창 마음을 가다듬고 서정을 쇄신해 나갔다. 그런데 그해 여름에 정승 채하중이 원나라 태사 탈탈의 권세를 빙자 왕에게 원나라에 군대 지원할 것을 요청하여 자신의 복직을 도모하였다.
   그러자 공이 그 기색을 알고 미리 사직을 요청하였는데 왕도 그에게 핍박을 받아 짐짓 채하중을 등용하고 공에게는 곡성백을 봉하였다.
   이때 원나라 태사가요청한사람은 모두 재상과 뛰어난 무용을 지닌 사람이었다. 공도 그 원병의 수뇌로 차출되어 가는 도중 평양에 이르렀을때 그 중 무용이 뛰어난 한 장수가 대중에게 선동하기를,  "우리들이 친척과 선영을 떠나서 이제 죽을 땅으로 나아가면 어느때 다시 고향에 돌아오겠는가"하고 그는 원나라에 가지말자는 뜻을 공에게 고(告)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인데 하늘의 명을 어찌 도피할 수 있겠는가. 또 충신 의사치고 어찌 그런 부도한 말을 해서 되겠는가" 하고는, 정승 유탁과 더불어 사잇길을 따라 째빨리 달려서 원나라 수도에 당도하였다.
   이때 고려왕은 사람을 급히 뒤따라 보내서 공을 다시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염모는 고려의 대신이요 또 대족이니 잘 예우해서 보내야 한다" 하고는 휘정원에서 잔치를 성대히 베풀어 공을 총애하였다.
 
 歲丙申 誅奇氏 命公屯師北鄙部
大將印璫擅殺其副姜仲卿  國家恐其奔也  不卽討  命公以計誅之  軍不得亂
朝廷遣使者至境  間亂之所由生
公具陳奇氏覆國  明徵先發後聞之義
果廻天怒 曲赦一方  皆公應對之力也
 其冬 以都元帥鎭北鄙 上授之節鉞
  且曰公行之後 吾不北顧矣
  公對曰臣亦不敢以米鹽干上聽
上喜曰廉公  吾之萬里長城也
其治軍政 芻糧爲先 城堡次之
器械次之 公雖素定於中
必咨於崔副使
  副使  今之領三司公也
公之知人如此
  其冬 拜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門下侍中上將軍 判兵部事  領景靈殿事  明年 進判吏部事  領孝思觀事
 
  
  병신년(1356)에 기씨 일족을 처형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북비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외침을 방어하도록 하였는데, 대장 인당이 그의 부장 강중경을 제 맘대로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그가 혹 원나라로, 달아날까 염려하여 즉시 토벌하지 못하고 공에게 명하여 그를 토벌해서 죽이니 군대가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왔는바, 사자가 국경에 이르러 고려국에 소란이 일어난 이유를 묻자, 공이 기씨들이 고려를 망치려고 도모한 확실한 증거를 갖춰 진술하고 아울러  "먼저 처치하고 나중에 보고" 하는 의의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과연 원나라의 노염을 그치게 하여 우리 고려를 용서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이 원나라 사신에게 응대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공이 도원수가 되어 북비를 진무하러 나가는데, 상이 공에게 절월을 주고 또 이르기를  "공이 그쪽으로 떠난 후에는 내가 북쪽을 영 잊어버릴 것이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 또한 감히 미염 따위 문제로 상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므로, 상이 기뻐하면서,  "염공은 나의 만리장성이로다" 하였다. 공이 군정을 다스리는 데는 군량과 말먹이를 가장 우선으로 삼았고 성보 수축하는 일을 그 다음으로 삼았으며 기계 수리하는 일을 또 그 다음으로 하였다. 공은 무슨 일을 마음속에 이미 정해 놓고도 반드시 최부사에게 자문하여 처리하였는데, 부사는 바로 지금의 영삼사공이다. 공이 사람을 잘 알아봄이 이러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에 제수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판이부사 ·영효사관사가 더 제수되었다.
 
  歲辛丑冬  公以滿盈辭位
士論皆曰 廉公掌銓選者五
未嘗以恩嫌私一人進退
是以宗族雖多  未有處華要之職者
蓋淡乎其寡欲者矣
公之封候就第月餘  紅賊犯北鄙焉
  歲壬寅 改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侯
扈駕移于尙  又移于淸
公與侍中尹公桓李公巖  實從之
明年三月 又起公侍中  未幾丁母憂辭
 
 
   신축년(1361) 겨울에 공이 작위가 높아질대로 다 높아졌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청하자, 사론이 모두  "염공이 인재를 뽑은 것이 모두 다섯 차례였지만 한번도 자신과 친하다고 해서 또는 자신과 소원하다고 해서 한 사람이라도 사적으로 등용하거나 밀어낸 적이 없었다" 하였다.  이러했기 때문에 자기 종족이 그렇게 많았지만 한사람도 요직에 있는 자가 없었다. 공은 대체로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공이 곡성후에 봉해져서 사저에 나아가 있는 지 달포 만에 홍건적이 북면을 침범하였다.
   임인년에는 다시 벽상삼한 삼중대광이 되고 곡성후에 봉해져서 어가를 호종하여 상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청주로 옮기었다.  이때에 공은 시중 윤공환 ·이공암과 더불어 어가를 호종했었다.
   그 다음 해 3월에 또 공을 시중으로 기용하였으나, 얼마 후에 공이 모부인의 상(喪)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歲乙巳  上用辛旽言黜陟
旽惡公不附己  譖於上
上不聽  歲已酉  以特進三重大匡
仍封曲城伯 旽又譖於上 上命公之子壻 鍮以不可絶旽之意
公益堅所守  上於是益信公焉
兀羅城之役 諸將受公節制   不敢多殺人 旽敗 上愈重公  加公輔國二宇
封邑依舊   親圖形賜之 納公女曰愼妃
封夫人權氏曰辰韓國大夫人
以三子登科  廩夫人  故事也
其後仲子評理 再知貢擧 當世歆之
 
 
  을사년(1365)에는 상이 요승 신돈의 말을 들어 관리를 진퇴 시켰다. 신돈은 공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상에게 공을 참소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기유년에 삼중대광에 특진되고 이어 곡성백에 봉해지자 신돈이 또 공을 상께 참소하였다. 그러자 상이 공의 아들과 사위들을 통해서 공에게 신돈을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뜻을 하유하였으나 공은 더욱 굳게 자기 소신을 지켰다. 그리하여 상이 공을 더욱 믿었다. 올라성의 싸움에서는 제장이 공의 절제를 받아 감히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다.
   신돈이 패하자, 상은 더욱 공을 존중하여 공에게  "보국 두 자를 더해주고 봉읍은 그전대로 하였으며 친히 공의 초상을 그려서 하사 하였다. 상이 또 공의 딸을 맞아 신비로 삼고 공의 부인 권씨를 진한국대부인으로 봉하였는데, 세 아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한 때문에 부인에게 봉름이 내려졌으니, 이는 고사에 따른 것이다. 둘째아들 평리는 지공거를 두 번씩이나 맡아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그를 부러워하였다.

  歲癸丑 起公門下侍中 階兼如故
加以判開城兼監春秋館事曲城府院君 蓋所以寵之者至矣  倖臣金興慶
多所請謁 公不暇貸  興慶有怨
  言 上曰 侍中學於中國 性且高潔
非他廷臣比 且大臣之用心
又非汝之所知也 興慶不敢復言
今上卽位 以公領門下事 又領書筵
五世元老故也
  歲乙卯正月初五日  上喪畢御正殿
宰臣上壽  公首陳爲君難爲臣不易
  親賢遠侫等語 辭意明簡 上爲之改容 拜公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
領三司事 餘竝如故
 
  
  계축년에 공을 다시 문하시중으로 기용하였는데, 품계와 겸직은 예전대로하고 판개성 겸감춘추관사를 더하고 곡성부원군에 봉하였으니 대체로 공을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행신(총애받은 신하) 김홍경이 공에게 청탁한 일이 많았으나 공은 그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므로 원망스런 말을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중은 중국에서 학문을 하였고 성품도 고결하여 다른 정신(廷臣 : 조정 신하)과 비할 바가 아니다.  또 대신의 마음을 네가 알 바 아니다" 하니, 흥경이 그후로는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금상이 즉위하여서는 공을 영문하사로 삼고 또 영서연사로 삼았으니 그것은 공이 5세(五世 : 다섯 조정)의 원로였기 때문이었다.
   을묘년(1375) 정월 초5일에 상이 상(喪)을 마치고 정전에 나오자 재상들이 축수를 올렸다. 이때 공이 맨 으뜸으로  "임금노릇 하기도 어렵고 신하노릇 하기도 쉽지 않으니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아첨하는 소인을 멀리하라"는 등의 말을 진술하였는데, 말 뜻이 매우 분명하고도 간결하므로 상이 안색을 바로 하였다. 이어서 공에게 충성수의 동덕론도 보리공신으로 영삼사사를 제수하였고 나머지는 그전대로였다.

 丙辰十月元朝 禮部尙書翟欽  
來錫宣命  資德大夫將作院使
公拜受語使臣曰 臣老矣 乃蒙聖恩
末由圖報 區區之情 有如天地
  歲丁巳 設都摠都監 訓鍊五部兵馬
以公判其事
  歲己未 判門下事 歲庚申 移領三司事 其冬 復府院君 公旣老矣 國有大疑
宰相必請公及尹漆原會議
公斷然以爲己任 必盡言之 公治居第 不侈不陋 雖屢遷徙
必置別院 植花木如山林然 扁曰梅軒 焚香端坐  淡如也  客至設酌 
殽饌極精潔 熏然而罷  風流瀟酒 
望之如神仙
 
 
  병진년 10월에는 원나라에서 예부상서 적흠이 와서 황제의 명으로 공에게 자덕대부 장작원사의 벼슬을 내리자, 공이 절하고 받은다음, 사신에게 말하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이제 성은을 받고서 그 은혜 갚을 길이 없어 구구한 정이 천지와 같습니다" 하였다.
   정사년에는도총도감을 설치하여 오부의 병마를 훈련시키면서 공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기미년에는 판문하사가 되었고 경신년에는 영삼사사로 옮겼으며 이 해 겨울에는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공이 이미 늙었으므로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재상이 반드시 공과 칠원부원군 윤환을 청하여 회의하였는데 공은 그때마다 단연코 나라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반드시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공은 거처하는 집을 사치스럽게도 그리 누추하게도 다스리지 않았고 아무리 자주 이사를 다녀도 반드시 별장을 두고 마치 산림처럼 화목을 심어 가꾸었다.  그리고는 그 별장에 '매헌'이란 편액을 걸고서 향(香)을 피우고 담담하게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손님이 찾아오면 술과 안주를 차려오데 음식이 극히 정결하였고 거나하게 취해서 파하곤 하였다. 그 쇄락한 풍류가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今年正月 同耆老拜玄陵 有所感
退而語諸子曰  吾以不才 蒙玄陵過擧 位侍中者二十又九年
年且七十九矣 而吾病屢作
吾必不久於世矣 乃有薄葬之命
三月初二日感疾 十八日丁卯
卒于正寢 二十日己巳
葬于臨江縣大谷之原 公所卜也   嗚呼 公可謂無憾也已矣
  上之遣中官判厚德府事金實問公也  公具衣冠受御藥宮醞訖
 謂實曰 公善爲老臣奏于上
 上之所以念及老臣者  
 徒以臣嘗左右先君也 臣今殆矣
願上日愼一日 惟永終是圖 臣之願也
  是曰  謹妃毅妃使來賜宮醞
  嗚呼 公可謂無憾也已矣
 
  
  금년 정월에는 공이 여러 기로와 함께 현릉(공민왕의 능)을 배알하고 느낀 바가 있어 물러와서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재덕도 없는 사람이 현릉의 지나친 대우를 받아 시중 자리에 있은지 29년이나 되었고 나이도 79세나 되었는데, 내가 자주 병이 나곤 하니 반드시 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이어 자신이 죽으면 박장으로 치르라는 유명까지 내렸다. 3월 초2일에 병환이 있어 18일에 정침에서 작고하자  20일에 임강현(지금의 장단) 대곡의 언덕에 장사하니 이곳은 공이 잡아놓은 자리이다. 아, 공은 참으로 한이 없다고 하겠다.
   상(上)이 중관인 판후덕부사 김실을 보내어 공에게 문병하자, 공은 의관을 갖추고 어약(임금이 내려준 약)과 궁온(임금이 내려준 술)을 다받고 나서 김실에게 이르기를,  "공은 이 노신을 위하여 상(上)께 잘 주달해 주기 바랍니다. 상께서 이 노신을 그렇게 염려해 주시는 것은 한갖 이 노신이 일찍이 선군(先君 : 죽은 임금)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입니다. 신은 지금 명이 거의 다 되었으니 상께서 나날이 더욱 신중하시어 국운을 영원토록 보존하실 것을 도모하시는 것이 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날 근비와 의비도 사자를 보내와 궁온을 하사하였다. 아, 공은 참으로 유감이 없다 하겠다.

  公凡再娶
完山郡夫人裵氏 重大匡完山君諱挺之女
早亡無子
辰韓國大夫人安東權氏元朝朝列大夫
太子左贊善 推誠同德協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醴泉府院君 領藝文館事 諡文坦諱漢功之女也  性勤儉敎子嚴 平居綿綺不加于身
先公病數年 公救藥久益勤 生三男五女
  長曰國寶
推忠輔理功巨重大匡瑞城君藝文館大提學
  次曰興邦
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前匡靖夫夫 門下評理兼成均大司成藝文館大提學 上護軍
  次曰廷秀 正順大夫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 右文館提學知製敎充春秋館修撰官 知典理內侍茶房事
  女長適奉翊大夫密直副使洪徵
  次適奉翊大夫判內府寺事進賢館提學任獻
  次適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使上護軍鄭熙啓  次卽愼妃也
  次適中正大夫三司右尹李悚 曰惠珠 通濟院住持 金氏出也
  曰廣元 奉順大夫判司僕寺事 李氏出也
  女適中郞將洪文弼 金氏出也
 
 
  공은 무릇 장가를두 번 들었는데,초취인 완산군부인 배씨는 중대광 완산군 휘 정의 딸로 자식이 없이 일찍 작고했다.
   재취인 진한국대부인 안동권씨는 원조의 조열대부 태자좌찬선으로 추성동덕 협찬공신에 벽상삼한삼중대광이 되고 예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예문관사에 이르렀고 시호가 문탄인 휘 한공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자식들을 엄하게 가르쳤다. 평상시에 비단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공보다 먼저 수 년 동안 병환을 겪었는데, 공은 부인의 병을 구완하면서 시간이 오랠수록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3남 5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국보인데 추충보리공신으로 삼중대광이 되고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다음은 흥방인데 충근익대 섭리찬화공신으로 벼슬이 전 광정대부 문하평리 겸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상호군에 이르렀다.
   또 그 다음은 정수인데, 벼슬이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 제학 ·지제교. ·충춘추관 수찬관 ·지전리내시다방사에 이르렀다.
   큰딸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홍징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 제학 임헌에게 시집갔고,  또 다음은 추성좌리공신으로 봉익대부 밀직사사 ·상호군 정희계에게 시집갔고, 또 다음은 바로 신비(공민왕의 후궁)이다.  또 다음은 중정대부 삼사우윤 이송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 혜주는 통제원의 주지인데, 김씨 소생이고 또 광원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인데, 이씨 소생이고 또 서녀는 중랑장 홍문필에게 시집갔는데 김씨 소생이다.

  孫男女若干人
瑞成娶玄福君權公諱廉之女
生男長曰致中 親御軍護軍
  次曰致庸 典儀副令
女適司憲持平安祖同
評理娶宗簿副令趙文慶之女
  生女長適衛尉少尹林緻 餘幼
知申事娶判典農寺事趙得珠之女 生女幼
  外孫男女若干人
 密直男曰尙賓 成均學諭
  次曰尙簿 散員
  次曰尙淵 權務 皆中成均試 女皆幼
  內府生男曰公緯 郞將
  次曰公縝 別將 餘幼
  女皆幼 密直使生男曰吉祥 中郞將
  女幼 右尹生男曰佶 權務
  次曰佾 幼 判事生男幼 中郞將生女幼
  曾孫男女若干人
  護軍娶典法判書朴思愼之女
  生男曰怡 權務
副令娶密直提學尹邦晏之女
  生男曰恂 權務 侍平生男曰金剛
權務 餘幼
 
  
  손자는 남녀 모두 약간 명이다.
   서성군은 현복군 권공 휘 염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치중은 친어군 호군이고,
   다음 치용은 전의부령이고, 딸은사헌부 지평 안조동에게 시집갔다.
   평리는 종부부령 조문경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큰딸은 위위소윤 임치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지신사는 판전농시사 조득주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외손 남녀가 약간 명이다.
   밀직의 큰아들 상빈은 성균관 학유이고
   그 다음 상부는 산원이고 또 다음 상연은 권무인데, 모두가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딸은 모두 어리다.
   내부시사의 큰아들 공위는 낭장이고
   그 다음 공신은 별장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딸은 다 어리다.
    밀직사의 아들 길상은 중랑장이고 딸은 어리다.
    우윤의 큰아들 길은 권무이고 그 다음 일은 어리다.     판사의 아들은 어리다.
    중랑장은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증손은 남녀 약간명이다.
    호군은 전법판서 박사신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이는 권무이다.
    부령은 밀직제학 윤방안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 순은 권무이다.
    지평의 아들 금강은 권무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嗚呼 公之具五福而子孫逢吉者如此 天之厚於公者 其必有所以然者矣
世臣舊家之餘慶歟
  忠君澤物之明驗歟
臣於此實有所興起馬
使如公者相繼於廟堂之上
則大乎之期 豈不適當今日歟
  嗚呼公亡矣 嗚呼公亡矣
 
 
  아, 공은오복이 구비하여 복을 받은 자손들이 이와 같으니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한 것은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세신 가문의 끼친 복인가,
   임금께 충성하고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 인한 밝은 증험인가? 나는 여기에 실로 흥기된 바가 있다.
   가사 공 같은 이가 서로 이어 조정 안에 있게 된다면 태평성대의 기약이 어찌 오늘날과 똑같이 되지 않겠는가.
  아, 참으로 공은 이제 작고하였다.
 
 臣穡謹拜手稽首 而獻銘  銘曰
公在妙齡  揚翹帝庭
歸長省幕  理靜民寧
歷事五朝  揚國威靈
鎭之山嶽  動以雷霆
時之艱矣  公乃適丁
三軍效命  百度惟貞
生民是育  宗社是屛
以匡以直  以毒以亭
衆病以痊  群醉以醒
大平之目  神明所聽
於穆玄陵  親圖其形
豊功盛德  煥乎丹靑
展也元老  一國儀刑
胡不期頤  天地杳冥
有截原隰  川流泠泠
山止氣畜  有美泉扃
有突豊碑  上麻于星
千載勿訛  照我東坰
 

  신(臣) 색(이색)은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써서 바친다.
공은 어린 나이에   천자의 조정에 이름 날렸네
정동성에 있을 때는 고요하고 편안하게 백성다스렸네
다섯 조정 내리 섬기면서 국가의 위엄 드날렸다오
산악같은 묵중함으로 진정하고  뇌정같은 위엄으로
    움직였네
그 어려운 시기를 공이 마침 만났는데
삼군이 목숨을 돌보지 않았고 온갖 법도가 바르게 되어
백성은 잘 길러지고 종사는 매우 튼튼해졌네
바르고 곧음으러써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져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해주고 술취한 사람들을 깨게
    해주었네
태평재상이란 지목은 신명이 들어 아는바라
훌륭하신 현릉께서 친히 초상화 그려주니
위대한 공덕이 단청에 빛나도다
참으로 이 원로는 일국의 모범이로세
어찌하여 백세를 못다살고 천지가 깜깜해졌단 말인가
저 끊어진 언덕 아래 맑은 시냇물이 흐르누나
산 기운이 한군데로 뭉쳐 좋은 명당자리 이루었네
우뚝 솟은 큰 비석이 하늘에 치솟아 있으니
천재에 어김없이 우리 동녘 들 비추리라.

       韓山伯 臣 李穡 奉敎撰
       淸城君 臣 韓脩 書拜篆額
교열 任正基(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감수 李家源(퇴계학 연구원장. 문학박사)
참고문헌 :
목은 문집, 충경공 염제신 신도비편(목은집 921~926쪽 성균관대학교 연구원 편) 인용
 
  
한산백 臣 이색은 上敎를 받들어 이 글을 짓고,
청성군 臣 한수는 전액과 아울러 이 글을 쓰다.
   국역 임정기(민족문화 추진회 전문위원)
   감수 이가원(퇴계학 연구원장 문학박사)
   참고문헌 : 목은 문집 921~926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편)인용.
     
한국정신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는 충경공의 신도비 탁본.
고려 충성수의 동덕론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 곡성부원군
충경 염공제신 지묘
 이 탁본은 경기도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항동의 휴전선 안에있는 신도비문의 일부분으로 탁본의 실제 크기는 101X48㎝인 것으로 보아 신도비의 실제 크기는 이보다 클것으로 짐작하며, 휴전선안에 있으므로 현존하는지 의문되며, 사진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다.
형태서지 : 101X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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