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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동정공 염흥방

파주염씨 2世祖 동정공 염흥방

  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 重大匡 瑞城君   三司左使 成均館大司成 藝文館 大提學 上護君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 중대광 서성군 삼사좌사 성균관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상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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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흥방에 대한 高麗史의 색인

 
 
38권 世家 38-16쪽 뒤2,
40권 세가 40  공민왕3-12-24-1363
41권 세가 41-16쪽 앞7,
44권 세가 44 공민왕3-12-51-1374
73권 志27  선거1-과목1-048,  049
105권 列傳18권-09쪽 앞6, 23쪽 앞5,
111권 열전 24  4쪽 뒤8,
112권 전 25권-39쪽 뒤8,
113권 전 26권-
115권 전 28
117권 전 30권-07쪽 앞5, 32쪽 앞5,
118권 전 31권-03쪽 앞3,
119권 전 32권-01쪽 뒤8,
124권 전 37권-33쪽 뒤8, 37쪽 앞6,
126권 열전 39  
132권 열전 45   반역 6
133권 전 46권-02쪽 앞5,
135권 열전 48    신우 3
136권 열전 49    신우 4
137권 전 50권       그 외 다수
 


동정공 염흥방의 약력
(東亭公 廉興邦)
   公은 파주염씨의 중시조이신 충경공 염제신의 2남으로 태어나시어, 고려사의 기록처럼 고려 말기인 공민왕때(1351-74)와 우왕때(1374-88)에 대단한 활약을 하시었다.

생졸 년대 : 출생년도는 미상이나 대략 1330년경으로 보며, 1388년 졸하심.
자와    호 : 자는 중창,   호는 동정, 이암, 어은
가족 사항 : 아버지는 곡성부원군 염제신, 형-국파공 염국보, 아우는 청강공 염정수이고, 배(配)는 청주한씨로 2남을 두셨는데 염치함과 염원보 이시다.

관직 사항
충근익대섭리찬화공신 중대광 서성군 삼사좌사 성균관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상호군
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 重大匡 瑞城君 三司左使 成均館大司成 藝文館大提學 上護君
으로  대사성이나 대제학은 석학에게 주어지는 명예직으로 종신직이다.

경력 사항 : 1355년 형님 국보께서 과거 급제하고, 2년후인 1357년 공민왕 6년에 장원급제하신후 좌대언, 밀직지신사, 동지공거, 지공거, 제학, 밀직제학, 병마사, 삼사좌사, 대사성, 대제학 등등 중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홍건적  평정, 목호의 난 진압, 위위윤  2등 공신 등등

교우 관계 : 목은 이색, 정몽주, 정도전, 나옹스님 등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
   (仲昌), (東亭, 理庵, 漁隱), (曲城府院君 廉悌臣), (淸州韓氏)

동정공 염흥방의 인품
  
-침류정기, 이색의 시, 나옹스님의 글로 본 인품-

1. 침류정기 : 동정(흥방)은 선왕(공민왕)께서 알아줌을 받아 젊은 나이로 재상이 되었네. 말할 때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일할 때는 어려움을 사양치 않으며, 굳센 의지는 금석보다 더 강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은 귀신을 감동시킬만 하였으니, 진정 너무나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2. 목은 이색의 시로 본 인품
"동정(흥방)의 풍채는 유림을 비춘다".
"동정의 호기는 인걸이라 동산에 높이 누워 풍월을 희롱한다. 도심은 쾌히 스스로 얻었고, 중간한 마음은 미래를 권면하네. 뱃속에는 산수의 운치가 있고, 몸은 나라의 동량같은 재목이로세"

"가장 기쁜건 동정이 평리에 임명되어 황각에 문풍을 떨치려 함이라네. 향 머금고 조용히 아뢰어 임금마음 돌리고 바다건너 일찍이 땅 개척한 공 이루었네".
"조정에서 물러가니 하늘이 대궐에 닿았고, 여강가에 집지으니 달은 강에 가득해라"(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3. 나옹스님(공민왕 스승)염흥방에게 주신 말씀
진정 이 큰 일을 참구하려면 승속과 남녀를 묻지 말고 상중하의 근기도 묻지 말며 또 초참·후학을 묻지 마십시오. 그것은 오직 당사자가 결정적인 믿음을 세우고 견고한 뜻을 내는 데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여서 모든 선법을 자라게 한다'하셨고 또,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자라게 하고, 믿음은 반드시 여래의 자리에 이르게 한다' 하셨습니다.

공(公; 염흥방)은 젊어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임금님을 만나 사무가 매우 번거로운 때인데도 우리 불법에 대해 의심없는 확실한 믿음으로 마음 닦는 방법을 물으시니, 어찌 세간 출세간을 막론하고 가장 역량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 닦는 법을 따로 구하지 마십시오.

내가 광명사에 있을 때 공에게 말씀드린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들되, 어디서나 언제나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끊지 않고 들며 쉬지 않고 참구하여 조금도 틈을 주지 말고, 다닐 때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섰을 때에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 하며, 앉았거나 누웠을때도 그저 `이것이 무엇인가'하십시오.

옷 입고 밥 먹으며 대소변 보고 손님을 영접하며, 나아가서는 공무를 처리할 때나 임금님 앞에서 나아가고 물러날 때나 붓을 들고 글을 쓸 때나 필경 `이것이 무엇인가' 하십시오. 그저 이렇게 끊임없이 들고 참구하다 보면 어느 새 들지 않아도 화두가 저절로 들리고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어, 밥을 먹어도 밥인 줄 모르고 차를 마셔도 차인 줄 모르며, 또 이 허깨비 몸이 인간에 있는 줄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같고 자나깨나 매한가지인 곳에서 몸을 뒤쳐 한 번 던지십시오.

그런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관직이나 속인의 모양을 바꾸지 않고 화택을 떠나지 않고라도, 서천의 스물 여덟 분 조사와 동토의 여섯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들이 전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본유(本有)의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합니다.
    枕流亭記, (儒林), (廉興邦), (廣明寺), (火宅), (西天), (東土), (本有)

  동정공의 주요 경력
  고려 9충신  :  '변안렬', '조민수', '이보', '염동정', '윤이', '이초', '김우', '왕안덕', '최영', 이다. 흥방에 대하여 고려충신록에 기록되길, <염동정 : 서원인, 父 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서원인이란 파주염씨의 옛날 표기임)(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홍건적 평정과 지신사 승진 : 흥방은 홍건적1차 침입에 뒤이은, 2차 침입을 평정한 후 1362년 지신사로 승진했다. 이 때 같이 활약한 장수들이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이었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국사연구회, 청년사, 1997, 81쪽).

한자와 해설 : 홍건적(원나라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의 하나;   1차 침입/1359년 12월.  2차 침입/1361년 10월)

동정공의 시문집 : 도시후서, 동정집 등의 이름이 보이나 전해지는 것은 없음.
  도시후서(陶詩後序) : 정도전의 시문을 보면 읽어 보았다고 기록되었음.
  동정집(東亭集) : 동정집이란 문집으로 당대 학행과 재덕을 겸비한 인재였다. (명현록; 대동보 문헌록, 1986).
  
율시 1수 : 1362년 9월 공민왕 11년에  지금의 개성 송도의 공북루에서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였을 때,  염흥방이  지은 율시 1수의 한 구절이 "백일이 하늘을 능멸하려 한다"였다.(白日欲凌虛;  동정공사적; 대동보 1986).

2등공신 책록 : 흥방은 1363년 송도 탈환 등과 같은 공로가 있어서 위위윤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밀직부사, 1367년 밀직지신사, 제학을 역임하였다. 흥방은 학문에 뛰어나 지공거로 여러 차례 과거 시험관을 지냈다.
한자 : (衛尉尹), (二等功臣), (密直副司), (密直知申事), (提學), (知貢擧)

목호의 난 진압 : 염흥방은 1374년 밀직제학으로 양광전라경상도 병마사였고, 최 영(崔 瑩)은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로서 함께 탐라(제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에 출전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공헌하였다('목호의 난' 참조).
한자 : (楊廣全羅慶尙道 兵馬使), (牧胡의 亂)

유배생활후 서성군 : 흥방은 1375년 우왕1년에  당시 권신이던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서 정몽주 등과 외방으로 유배당했지만, 곧 풀려나 서성군에 봉해졌다(대동보, 1986).
한자와 해설 : (李仁任), (鄭夢周), (外方=경기 여주군 금사면 용담리), (瑞城君=정1품)

맹사성 등의 선발 :  공은 1380년(우왕 6)에 동지공거로 인재들을 선발했고, 또 1386년에도 동지공거로 33명의 인재들을 선발했는데, 그 중엔 조선 4대 세종 때의 명재상으로 활약한 정승 맹사성도 들어 있었다(대동보, 1986).
한자
 : (同知貢擧=정3품), (孟思誠)

동정학당 : 공민왕 초엽 홍건적이 개경 근방에 쳐들어와 상하가 피난길에 분주하던 때, 전서공 김자정은 피난은 커녕 동지들을 모아 창의군을 일으켜 관군을 도와서 평정하는데 공이 컸다.
한자 : (東亭學堂), (典書公 金子汀/ 공조전서 역임), (彰義軍),

당시 도원수 정세운은 김자정이 그 어린 몸으로 의기가 가상하다면서 동량지재로 보아 염흥방동정의 문하생이 되게 하였다. 당시에 권신 염흥방은 자기의 동정학당이 명문이며 영재들이 많았었기 때문에 기고만장 했다고도 알려지고 있다(김자정 전서공) 한자 : (鄭世雲), (廉興邦東亭), (權臣)

염흥방과  정도전
  
정도전
(1337?-1398)은 이색의 문하생이고, 정몽주, 이숭인, 권근 등과 친했고, 특히 문장에 능하며 성리학에 밝아 따를 자가 없었으며, 1362년(공민왕 11) 진사 급제, 충주사록, 1376년 성균관 박사로 우왕에게 대학을 강의했다.

한편, 중국에서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에 고려조정은 친원파(이인임, 임견미, 염흥방)와 친명파(이성계, 정도전 등) 사이의 사상적 대립,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아들일 때 정도전은 유교사상 전파에 앞장섰다. 원의 사신이 명을 치는데 고려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정도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하시중 이인임은 원 사신을 받아드렸다.

이에 정도전은 이인임에 의해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염흥방이 사람을 보내 경부흥에게 말하여 이인임의 노염을 풀었으니 떠나지 말라고 하자 "모두 나라의 뜻이오. 왕명인데 어찌 안 갈 수 있느냐?"면서 떠났다. 그후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 건국의 공신이 되었다. (단양군 홈페이지 참조)

  다음은 정도전의 시문집 '삼봉집'에 실린 '동정공'과 관련된 시문을 소개합니다.

 1. 삼봉집 제1권 오언고시(五言古詩)에서

- 염동정의 시운을 받들어 차운하다[奉次廉東亭詩韻]
   동정은 염좌사(廉左使) 흥방(興邦)의 호이다.
     그 옛날 시끄러운 조시에 있을 적엔 / 昔在朝市喧     
     한적한 전야를 무척이나 생각했네 / 苦憶田野寂
     지금 오니 본래 바라던 그대로인데 / 今來愜夙尙
     죄의 그물이 촘촘하다고 한탄할쏜가 / 肯歎罪罟密
     벼와 기장 모두 무성도 하여 / 禾黍正離離
     농사일도 멀지 않아 끝이 나겠네 / 歲功將告畢
     더더군다나 진귀한 물산이 많아 / 況復物産奇
     등귤도 소반에 오를 거로세 / 行看薦橙橘
     내 고향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오 / 莫言非吾土
     남은 날을 여기서 보냄직하다 / 可以送餘日
     명을 믿으니 다시 무얼 의심하리요 / 信命更何疑
     총리란 칼머리에 발린 꿀 같은 걸세 / 寵利刀頭蜜
     원컨대 그대는 부디 내 말을 들으오 / 願公取吾言
     내 말이 다시는 나오질 않아 / 吾言勿再出

- 동정에게 올리다[奉寄東亭]
   계절은 시화(始和)를 당했으나 일기는 아직도 차다.   개연히 탄식하며 소회를 적어 부친다.
     하느님이 네 철을 나누어 놓으니 / 皇天分四節
     춥고 더움이 제각기 때가 있다네 / 寒暑各有時
     정월이라 설도 이미 지나가고 / 原正旣已屆
     입춘도 더디지 않건만 / 立春亦不遲
     추위는 아직도 위세를 부려 / 寒威尙未收
     으시시 살갗에 스며드누나 / 凛冽侵人肌
     이역에 막혀 있는 오랜 나그네 / 殊方滯久客
     떨어진 옷에 헌 솜이 뭉쳤다네 / 短綿紛敝衣
     새벽닭이 좀처럼 울지 않으니 / 晨鷄不肯鳴
     밤새도록 부질없이 슬퍼만 하네 / 達夜空悽洏
     광산이라 산마루 높고 높은 곳 / 峩峩光山顚

     정운(停雲)은 언제나 여기 있구려 / 停雲長在玆
     어찌하여 남으로 함께 떨어져 / 如何同落南
     왜 서로 추종을 못하는 건지 / 不得相追隨
     노정을 헤아리면 얼마나 될까 / 道里能幾許
     생각할 때마다 나를 슬프게 하네 / 每憶令人悲
     부디 금옥처럼 몸을 아끼어 / 公其自金玉
     원대한 기약을 삼아 주소서 / 遠大以爲期

     정운(停雲) : 친한 벗을 생각한 시(詩)를 일컫는다.

     달밤에 동정을 생각하다[月夜奉懷東亭]
     한밤중에 일어나 홀로 섰으니 / 半夜獨起立
     긴 허공은 해맑아 고요하구나 / 長空澹自寂
     바다 위 한 조각 저 밝은 달이 / 一片海上月
     만리라 오두막집을 비추누나 / 萬里照茅屋
     차가운 그림자 한들거리어 / 冷影故依依
     귀양살이 나그네 가련하다는 듯 / 還如憐竄客
     미루어 동정옹을 생각하노니 / 爲憶東亭翁
     응당 고독을 함께 맛보리 / 應共此幽獨

- 동정의 시운을 받들어 차운함[奉次東亭詩韻]
     물은 흘러도 종당 바다로 가고 / 水流竟到海
    구름은 떠도 항상 산에 있다오 / 雲浮長在山
     이 사람은 홀로 시들어 가며 / 斯人獨憔悴
     나그네로 한 해 한 해 보내고 있네 / 作客度年年
     옛동산 아득해 얼마나 멀까 / 故園渺何許
     가는 길은 깊은 못에 막혀 버렸네 / 歸路阻深淵
     봄 농사 멀지 않아 미쳐 오는데 / 春事逝將及
     뉘라서 동고의 밭을 가꿀 건가 / 誰破東皐田
     생각은 있어도 가질 못하고 / 可思不可去
     창해의 사이에서 방황만 한다오 / 棲棲蒼海間
     빌린 집이 너무도 작고 낮아서 / 賃屋絶低小
     아침 저녁 더워라 밥 짓는 연기 / 朝暮熏炊煙
     이따금 우울증을 풀어 보자고 / 有時散紆鬱
     걸어서 동산 마루에 오른다 / 步上東山巓
     아스라이
무진성 바라보니 / 遙望茂珍城
     그 가운데에 한가한 고인이 있네 / 中有高人閒
     눈으로 나는 새를 보내나니 / 目送飛鳥去
      내 생각 부질없이 유유하구려 / 我思空悠然
      
(안) 동정은 이때에 광주(光州) 무진성에 있었다.

- 동정에게 받들어 부치다[奉寄東亭]
     이 해도 저물어 눈이 내리니 / 雨雪成歲暮
     강산이 내 고향과 막히었구려 / 江山阻鄕關
     날아서 하늘 끝에 와 있노라니 / 飄飄在天末
     뒤처져서 세상과 어그러졌네 / 落落違世間
     양양은 예전에 노닐던 곳인데 / 襄陽舊遊處
     더위잡기 어려워 매양 한이다 / 每恨難追攀
     내 시가 졸하다고 괴이타 마오 / 莫恠吾詩拙
     천리라 안면을 대신함이로세 / 聊代千里顔

 

2. 삼봉집 제2권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 동정의 죽림에 봉제하다[奉題東亭竹林]
     죽림이라 깊은 곳에 살평상 배치하니 / 竹林深處着匡牀
     오뉴월 남방에도 이 한쪽은 서늘하이 / 六月南方一片凉
     대낮에 홀로 누워
도시를 읽노라니 / 臥讀陶詩日將午
     바람 불어 맑은 이슬 의상에 떨어지네 / 風吹淸露滴衣裳
     
(안) 동정공(東亭公)이 도시후서(陶詩後序)를 지었음

      이상은 '민족문화취진회'홈에서 발췌

침류정과   용담염씨
  
침류정
은 고려때 여주군 천령현 금사리에 있었다. 침류정 마을의 염정승동, 염정승평, 염정승굴, 정자천, 주자천, 와룡암 등은 염흥방의 별장이었고,또한 언사로 인한 유배지였다.
침류정 마을에서 흥방은 시가를 즐기며, 당대 명사들(유항, 둔촌, 평재, 척약재 등)과 조정의 친구들로 도의와 충절을 숭상했었다.  그리고 무진참화 후에 이곳은 흥방의 1남 염치함과, 2남 염원보의 도피처와 정착지였다.

그후 공의 후손들이 용담리에서 살면서 '용담 염씨'로 본관을 바꾸었는데 이는 무진참화 이후 공의 후손들이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알수있다.
한자: (枕流亭),(言事),(流配地), (龍潭 廉氏), (용담리= 여주 금사면 용담리, 남한강 이포나루 근처)
 

 

목호의  난 (牧胡의 亂)
   고려말기에 탐라에서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탐라에서 삼별초를 평정한 뒤, 1273년(원종 14)에 원(元)은 일본원정에 대비하여 이곳에 탐라총관부목마장을 두고, 소 말 낙타 나귀 양을 방목하면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감독했다. 1294년(충렬왕 20)에 탐라가 고려에 반환되자, 조정에서는 목사와 판관을 두어 다스렸다. 목마장은 가끔 원나라가 직접 관할하기도 했다.  1372년(공민왕 21) 고려가 명(明)과 우호를 맺자, 명에 말(馬)을 보내기 위하여 제주의 말을 징발하였다. 이에 필사초고, 석질리, 독불화, 관음보 등과 같은 목호들은 "元나라 세조황제가 방축한 말들을 원나라의 적인 明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난을 일으켜, 유경원, 이용장을 죽여버렸다. 조정은 사람을 보내 말을 바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런데, 1374년 다시 명나라에서 말 2,000필을 요구해 왔는데, 역시 제주에서 징발하자 다시 목호들이 난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은 최영을 양광전라경상도 도통사, 염흥방을 병마사, 이희필양광도상원수, 임견미부원수, 지윤경상도상원수,  김유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도문순사에 임명했고, 각기 2개 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도록 한 결과, 전함 314척, 군사 2만 5천 6백5명으로 적괴 3명을 죽이고 난을 평정하였다. 이처럼, 커다란 토벌규모는 당시 목호의 제주세력이 강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http://members.tripod.co.kr/~agentguy/a09.htm)

한자 : (耽羅: 제주), (耽羅摠管府), (牧馬場), (다루가치/達魯花赤), (必思肖古), (石迭里),(禿不花), (觀音保), (劉景元), (李用藏), (崔 瑩), (兵馬使), (李希泌), (楊廣道上元帥), (林堅味), (副元帥), (地奫), (慶尙道上元帥), (金庾), (三道助戰元帥 兼 西海交州道都巡問使)

고려의 쇠퇴와 동정공의 운명

이인임  일파  숙청계획
   32대 우왕(1374~88)때에는 친원파친명파의 각축전 및 왕조충절 세력과  역성혁명 세력과의 갈등이 첨몌화 되었다(박영규, 1996).
당시 문하시중 최영이성계와의 합의 및 우왕의 밀령으로 권력형 부정축재자 이인임 일파 숙청계획에 따라서 임견미, 염흥방, 왕복해, 이성림 및 도길부 가문이 숙청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로 인해서 우리 염문은 동정공 때문에 연루되어 형님 국보,  아우 정수와  매제 홍징 등 7,8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몰락되었다.(참고 : 고려 및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1996 ; 동정공사적=문헌록, 1986).

公은 당대에 학행재덕이 으뜸인 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영 및 이성계와 같은 권간들의 모략으로 화를 당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서 公의 혁혁한 행적들이 감추어진채 역사에서 역적, 간신, 권력형 부정부패자로 묘사되고 있으니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문헌록, 1986).

고려말 사전개혁과 이인임 일파 숙청계획은 백성들의 고충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문하시중 최영이 권력형 부정부패자로 몰아세운 권문세력의 박탈에 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로써, 다섯 가문에서 50여명이 멸문지화를 당하여 우리 문중에서는 '허영심을 내지 말고 가난해도 즐겨하라'를 가훈으로 삼았다.  
한자
 : (親元派), (親明派), (王朝忠節勢力), (易性革命勢力), (門下侍中 崔塋), (李成桂), (學行), (才德)

그러므로 후손들은 고려시대 선조들의 자랑스런 발자취와 더불어 불행한 에피소드를 되짚어 보고, 이를 거울삼아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앞으로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메시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염태호, 2000)

이인임 및 최영과 염흥방과의 관계
   염흥방의 발자취를 알기 위해 이인임, 최영과 公과의 관계를 살펴 보면

이인임은 1332년 음보로 전객시승이 된 후 전법총랑, 공민왕 초기에는 좌부승선, 1356년 강릉 존무사로 쌍성을 쳐서 항복받고, 1359년 홍건적 침입으로 의주가 함락되자 서경 존무사로 전공을 세운 2등공신, 1362년 홍건적 2차 침입때 개경이 함락되어 왕이 복주(안동)로 파천하자 개경을 수복하여 1등공신, 벽상에 올랐고, 1364년 최유 등이 원에 있던 덕흥군을 받들고 의주로 쳐들어오자 서북면 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이를 격파했다.

1365년 삼사우사 도첨의찬성사, 순성동덕보리공신, 1368년(공민왕 17)에 좌시중, 1370년 수문하시중 겸 서북면 도통사로 원의 동녕부를 토벌하고 광평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이인임의 덕을 본 지윤, 임견미, 염흥방, 최영 : 이인임은 1374년 공민왕 살해후 왕위계승문제가 생겼을 때 명덕태후와 경부흥 등의 주장을 꺾어버리고 10살된 우왕을 왕위에 오르게 함으로써, 왕의 신임으로 정권을 잡았고, 그의 심복이던 지윤, 임견미, 염흥방을 등용, 친원정책을 유지했고, 1377년 경기도통사로 삼량에서 왜구격파의 공을 세웠다.
인임의 그의 사촌, 이림의 딸을 우왕의 비(근비이씨)로 만든 것은 최영과 협력하여 정권을 장악했던 1379년 4월이다. 이인임의 신임을 받은 최영은 비로소 정계의 핵심인물로서 1381년 문하시중에 이르렀다(박영규, 1996).

최영 : 최영은 평장사 최유청의 5세손,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장성한 후 양광도도문순사 휘하에서 여러번 왜구토벌의 공을 세웠다. 1352년 조일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호군에 임명되었다. 1354년 원(元)에서 장사성이 난을 일으켜 구원군을 요청하자 대호군에 임명되어 원정갔고,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즉시 원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 8참을 수복했다.

최영은 1355년 서북면병마사로 인당과 함께 원의 서쪽지역을 공격하여 파사부 등 세 곳을 격파했다. 1357년 양광전라도 왜적체복사로 오예포에 침입한 왜선 4백여척을 격파, 1361년 홍건적 격퇴, 서경과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도형벽상공신, 전리판서에 올랐다. 1363년 김용의 난, 흥왕사의 변을 진압하여 진충분의공신이 되고, 찬성사에 올랐다.
한자 : (李仁任), (隅王), (崔瑩/1316-88), (崔惟淸), (崔元直), (趙日新), (張士誠), (吾乂浦)

신돈과 최영 : 최영은 1364년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 원에서 쳐들어온 최유의 난을 의주에서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전장을 누비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1365년 강화도에 침범한 왜구를 막던 중 신돈의 참소로 경주윤으로 좌천, 유배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1371년 신돈이 숙청되면서 최영은 다시 소환되어 육도도순찰사에 올라 70세 이상되는 장정에게는 군역 대신 쌀을 거두어 들이는 등 무리한 군수물자 보충으로 원성을 듣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사헌 김속명 등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오히려 김속명이 유배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최영과 염흥방 : 최영은 1374년 제주도의 목호의 난때에 경상전라양광도 도통사로서 병마사 염흥방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천명을 거느리고 목호의 난 평정 후 판삼사사에 승진되었다.

이인임과 최 영 : 최영은 1374년 9월 공민왕 살해 후, 이인임의 보필을 받은 32대 우왕이 즉위하면서 조정은 이인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권력을 쥔 이인임은 친원정책을 실시하던 중 김구용,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에게 탁핵을 받자 최 영은 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인임의 편이 되어서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귀양보내고 권력의 핵심에 떠오른 후 1375년 판삼사사,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고, 원수 박원계가 참패하자 출정을 자청하여 홍산(논산)에서 크게 무찌른 공으로 철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최영은 1380년 왜구섬멸의 공으로 해도도통사, 계속 왜구를 토벌하여 안사공신이 되었지만, 이때 최영이 병을 얻어 개경에서 요양중 1381년 수시중에 임명되어 처음 중앙의 중책을 담당, 1384년 재상직인 영삼사사, 곧 문하시중에 된 후 한 동안 판문하부사로 이전했다.

부정부패자 숙청 : 1388년에 중임된 문하시중 최영은 우왕의 밀령(密令)을 받아서 당시 부패와 횡포가 심했던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의 일당 다섯 가문을 숙청했고, 1388년 최영의 딸이 우왕의 영비로 책봉되었다

최영과 이성계 : 고려말엽 최영과 이성계는 뛰어난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면서 출세한 후, 이들의 행보는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으로 연결된다. 즉, 최영은 명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건국의 첫걸음을 내디뎠다(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 최영과 이성계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을까 ? 청년사, 1997).
한자 : (德興君), (崔濡), (都統使), (兵馬使 廉興邦), (朴元桂), (林堅味), (寧妃)

공의 후손 염치중, 염치용, 염 순
  염치중과 염치용 : 조선 3대왕 태종(이방원)은 고려충신 염흥방을 아깝게 생각해서 공의 장조카인 송은공 염치중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하려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이로 인해서 태종은 염치중의 그같은 높은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서, 대신 국보의 2남인 염치용공조참의로 임명했다.
염치용이 태종의 왕명을 받들고 중국에 변무사로 가게 되자 곧 떠나면서 를 올려서 무진참화로 염씨가문이 희생당한 억울함을 상소했다(대동보, 1986).

  염순 : 조선 4대 세종때는 염흥방 후손인 염순(廉淳)에게 문의현령으로 임명했다(동정공사적 ; 문헌록, 1986).
한자 : (松隱公 廉致中=국보의 1남), (廉治庸), (工曹參議), (辯誣史), (疎), (文義顯令)

 

   * 무진참화와 그에 얽힌 당시의 정세 등은  '염문내력 - 염문 역사'에서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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