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형명은 파주염씨 시조로 '삼한공신'에 책봉되었고, 벼슬은 '대사도'까지 오르셨으나, 생.졸연대, 배위, 계대, 출생내력, 묘소 등에 대한 모든 자료가 미상이다.
'삼한공신'에 책봉되고 '대사도'를 지내셨다는 자료는 '고려사 7권 세가7 문종 1편'과 '고려사절요 문종 인효대왕1편'에 나타난 기록 및 고려 태조 23년(940)에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을 설치할 때 후삼국 통일에 공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삼한공신으로 책봉하였는데 그 명단 등에서 확인.
이로보아 삼한공신을 지내신 것 등에서는 자료가 확실하나 '삼한공신'에 책봉될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하신분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서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조와 동일 시대에 동일한 업적 등으로 활약하신 '廉湘, 廉相'에 대한 자료는 많이 볼 수 있으나 유독 시조에 대한 자료는 불명하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혹 이 분들이 동일인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과 후손의 한사람으로 시조에 대하여 정확하고 더 많은 자료가 찾아지기를 기대하며 올립니다.
시조의 휘(諱) '형명(邢明)'의 고찰.
'1704년판 갑신보'를 보면 시조의 휘자(諱字, 고인의 이름)를 '염현'으로 하였고, 1753년판(영조 29) 계유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邢明'을 일명 교명(교明) 으로 표기하여 왔고, 유래를 중국교목세가의 후예이니, 대염씨니, 공손씨니 하였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 중앙일보에서 '성씨의 고향'이란 제호아래 각 성씨들의 시조와 유래 등을 연재할 때, 한 지역종친회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우리 문중의 유래를 '중국교목세가의 후예로 신라말에 중국에서 건너와 귀화하였다느니....' 운운하는 것으로 게재하여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일부 중소기업에서 만든 책자에 그렇게 옮겨졌고, 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제대로 파악하거나 고증없이 마구잡이로 인용하여 왔습니다.
역사서의 자료들을 볼 때 시조 이전 신라때에 고승 '염거', '염경', '염종' 등을 볼 때 시조님 이전에도 염씨가 존재한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고, 신라말에 귀화하였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설령 귀화하였다 한다면 귀화하자마자 어떻게 '삼한공신'에 책록되고, '대사도'란 높은 벼슬을 하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그러던중 1985년부터 대동보를 새로이 편찬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와 고려사(高麗史), 교과서(敎科書), 씨족원류 및 만성보(萬姓譜) 등 고증을 찾아, 1986년판 대동보부터 형명(邢明)으로 올바르게 수정하고, 내력 또한 여러 역사서의 고증에 따라 낙랑군때부터 이땅에 전래하여온 토성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
염형명은 염씨족보 제2호 [1753년판 계유보(영조 29년)]부터 [1986년판 병인보(대동보)]까지와 2가지 사료(史料), 즉, [고려사 7권- 세가 7- 문종 1] 및 [고려사절요 4권 559쪽] 및 씨족원류에 있다. (파주염씨종보 1986 제2호 2면, 창성조 및 시조에 관한 고찰. 염종환).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1986. 15-16쪽) : 시조 형명의 수정 증보 사실
구보(舊譜) : 형명(邢明)은 일명 교명(교明)이라고도 한다.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서 관(官)은 대사도(大司徒)이시다. 배위(아내)와 묘소는 전해 오지 않는다. "당사(唐史)를 살펴보면 남당 때에 사도 형명이 있었으나 동방으로 왔다는 문헌을 보지 못하였고, 또한 만성보를 살펴보면 형명이 염씨의 시조로 되어 있으나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또한 어느 누가 기록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 후고(後考)하기 바라며 기록한다" (一作교字三韓功臣官大司徒 配位墓所失傳 按唐史南唐時 有司從교明而未見來東之文又按萬姓譜以邢明爲始祖不知何所據亦不知何人所記也註竣後考).
보충 : 1985년도 파주염씨대종회에서는 대동보 발간 이전에 '염형명 시조설'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 이유는 [1704년판 갑신보]에서의 "시조 염현(始祖 廉顯)"을 49년 뒤에 나온 [1753년판 계유보]부터 "시조 염형명(始祖 廉邢明)"으로 기록하면서 "2세 염위(廉位)"와 "3세 염가칭"을 새로이 추가하고 기존의 시조 염현을 "4세"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염형명 시조설'에 대한 대종회의 결론은 1986도를 기준으로 이미 230년(1753) 전에 선조분들이 '형명을 시조로 결정했던 사실과 역사적 근거'(高麗史 7권 및 高麗史節要 4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종회에서는 그같은 선조분들의 결정을 일단 존중하기로 합의했으며, 이를 후손들이 앞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치도록 당부하였다(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삼한공신(三韓功臣) 고려 태조(太祖, 왕건)가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功臣號)다. 삼한공신의 최초 기록은《고려사》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있는데, 936년(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태조 23)에 통일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제정된 것이다.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은 통일전쟁에 직접 참여한 태조의 막료와 그에게 협력한 각 지방의 대소호족 세력이었다. 이들에게는 직첩(職牒)이 내려지고 이를 후손에 물려주게 하여 문음(門蔭)의 특전, 식읍(食邑)과 녹읍(祿邑), 역분전(役分田)의 형태로 경제적 기반도 제공되었다. 공신들은 사심관(事審官) 제도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본거지에서 독자적인 세력가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독자성은 새로 탄생한 고려왕조에 커다란 견제세력으로 작용하였다. 태조 이후 왕권강화를 목표로 삼았던 광종(光宗)은 이들을 숙청했고, 경종(景宗) 초기에 이에 대한 반동의 기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종(成宗) 때의 중앙집권화정책으로 새국가체제의 정비작업이 추진되면서 점차 토호세력의 독립성을 잃고 중앙정부의 관료로서 일정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요약 : 삼한공신 사도(三韓功臣 司徒 : 正一品)는 고려조에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삼공(三公)을 설치하던 것으로서, 각각은 정일품관(正一品官)으로 삼사(三師)와 더불어 국왕의 고문 또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참고 : 명단은 맨 하단에 게재
다음은 상계선조분의 관계 제고'라는 제목으로 대종회 종보 제15호(2002.11.7일) 5면에 게재된 염종환 총무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상고(上古)에 이를수록 불확실(不確實)한 부분들이
개인들의 주관만으로 추정(推定)해 버린 결과 후대사람들은
그 불확실한 기록을 사실인양 전해지는 현실을 볼 수 있다.
같은 이유로 한 가문의 계대(系代)를 보더라도 시대를 올라갈수록 불확실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세대에 이르러 족보를 수찬(修撰)함에 있어 성급히
계대를 연계시키려는 의욕이 앞서서 확실한 근거도 없이
상계를 연계해 버려 의문된 부분이 있어도 규명하려 들지않고 의식을 고정(固定)해 버리려는
성향이 있음을 많이 본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확실한
가계(家系)를 알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사실은 이를
보전하고 근거가 없거나 의문이 되는 부분은 추정(推定)하지 말고 미 확인의 사실을 솔직히
남겨두는 것이 후학을 위한 지식인의 태도가 아닌가싶다. 1986년(병인) 8월 25일에 발행된 파주염씨의 대동보를 보면 중시조님 이상의 상계에서 시조 형명(邢明) → 子, 위(位) → 子 가칭(可偁) → 子, 현(顯) → 子, 한(漢)으로 연계되어있다.
필자가 아는 범위내에서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사실에는그 근거를 밝히고 근거가 없고 불확실한 부분에는 그 의문점을 제시하여 후일 누군가에 의해서라도 새로운 근거가
발견(發見)되어 우리 가문의 역사가 바르게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기술해 본다. 우선 '형명'님을 시조로 모신
내용을 찾아보면, 고려사(1451년 경태 2년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 등이 지은 책 139권) 권7, 세가제 7 문종(文宗) 1에 기록되기를 "병신(丙申) 10년(문종 10년
- 1056년) 2월 갑오일에 유사가 왕께 아뢰기를 번인(蕃人)들에게
납치되어 갔던 '염가칭'은 군기승(軍器丞)인 '염위'의 아들이요 삼한공신
염형명의 손(孫)으로 경술년중(현종원년 1010년)에 환위공자(環衛公子) 군에 편입되어 군역중(軍役中) 마침 계단군(契丹軍)이 침입하여 서울이
소란하게 되자 부모를 모시고 고향인 봉성현(峯城縣
- 지금의 파주)으로 가던 도증 그들에게 납치되어 갔다가 청녕원년(거란
도종년호 - 서기 1055년) 정월에 아들 하나만을 데리고
도망하여 왔으니 그의 선대로 부터의 영업전(永業田)과 가택을 돌려
주도록 하기 바란다고 상주하였다.
이때 왕은 '가칭'은 공신의 후손으로 청장년시기에 적에게 잡혀갔다가 번토(藩土)에 있던
처자를 버린채 다만 아들 한 명만을 데리고 백발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정상이 매우
가없고 민망하니 그의 세업으로 내려오던 토지와 주택을
주라고 하였다." 이것이 역사서에 의해 파주염씨의 시조로 '형명'님을 모시는 근거이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많은 씨족들의 현대에 와서도 신빙하고 있는 '씨족원류'(氏族源流
- 풍양 조종운(豊壤 趙從耘 편찬 선조 40년 丁未 1607~
숙종 9년 癸亥 1683)에서도 서원염씨(瑞原)의 가계로 '형명'
→ '위' → '가칭'의 순으로 연계되어있다.
여기서 '형명'
시조님에 관해 다른 면을 생각해보자. 시조님은 어느 시대의 분이었을까?
고려사에서 연대가 표시된
'가칭'님의 기록을 근거로 계산해 본다. '가칭'님의 군역에 편입된 해가 1010년으로 청장년이라 했으니 당시의 연령은
약 20세 전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피납되었다가 백발이되어 돌아왔을 때가 1055년이니 20세에서 45년후이니 이때는 약 65세로 계산된다. 여기까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을
추리이다. 이를 역산해본다면 1010년에 '가칭'님이 약20세였다면 생년은 990년이 되고,
이때에 부친되시는 '위(位)'님의 연세는 얼마나 되었을까? 가령 이때 '위'님의 연세가 약
25세였다면 '위'님의 생년은 965년이 된다. 965년에 '위'님의 부친되시는 분 …'형명'…의 연세를
약25세로 보았을때 그 분의 생년은 940년 전후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고려 태조 왕건(867~943)의 연대와 비교해 보면 시조님은
왕건이 죽기 전후로 보는 것이 연대로 계산한 상식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다시 고려사에서 태조시대(太祖時代)의
두 기록을 살펴보자. "태조 무인원년(918년) 8월
신해일(辛亥日)에 개국공신의 행상(行賞)을 함에 있어 1등으로 4명, 2등으로 廉湘
등 7명을, 3등으로 2,000여인에게 포상을 했고, 왕건이 후년 병이 들어 계묘
26년(943) 5월에 재신 염상(宰臣 廉相), 왕규, 박수문에게 유언을 하기를 나라 안팎의 중요사무들은 태자
무(太子 武 - 2대 혜종)와 함께 처리하라며 같은 달 병오일에
죽었다." 이상이 왕건때에 염씨성에
관한 기록의 대략이다.
고려사 등을 근거로 시조님의 벼슬인 '삼한공신
사도(三韓功臣 司徒)'라는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사
권76, 지제30에 기록되기를 '태사, 태전, 태보(太師, 太傳, 太保)'를 삼사(三師)라
하고 태위, 사도, 사공 (太尉, 司徒 司空)을 삼공(三公)이라 하며
이에 해당할
만한 인물이 없으면 빈자리로 두었고 언제부터 삼사, 삼공(三師, 三公)을 두었는지 알 수 없고 삼사,
삼공은 각 1명씩이며, 정일품(正一品)으로 한다로 하였다.
기록의 뜻만으로 본다면 삼사, 삼공은 정무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명예의 최고직으로 국사(國事)에 자문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려사 권75, 지제29에 삼한공신이란 말이 있는데 개국전후의
공신에 대한 일반적 호칭으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제시해 본다. 왕건이 죽고 문종
22년까지의(943~1055) 112년간, 혹은 시간의 범위를 좁혀 태조 죽기 전후의 기간중 나라의 상징적인삼한공신, 사도였던 '형명'님의 기록은 겨우1055년에 염씨의 시조격으로만 언급되었는가. 이 기간중 삼한공신
반열의 염문의 인물은 '상(湘)' '상(相)' 두 분의 기록이 핵심인데 이 두 분 아니고 또 한 분의
'형명'이란 분이 있어 시조로까지 언급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한 가지 추정(推定)을
해 본다.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 '상(湘)'과, 유언을 받들은 '상(相)' 그리고 시조 '형명'은 '동일인물'일 것이다.
918년의 이등공신이었던 '湘님의 당시 연령을 2~30대로 보면 943년에 재신인 '相'님은 60 전후의 연세가 되지 않았을까? 개국공신이고 후에 재신이면 나라에서 염문의 시조로 봉성(峯城) 땅에 영업지(永業地)를 준게 확실하지 않을까. 이상에 추리라면 한 가지 장애가 남는다.
'형명'님과 '위' 사이는 부자관계가 아니라 또 한 분이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데는 이유가 있다. 즉, 고려사에서 '가칭'은 '형명'의 자손(子孫)이라는 해석을 손자라고 해석한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사 이 구절 다음에 보면 '가칭'은 공신의
묘예(苗裔-먼 후손)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고려사 번역학자들은 이 부분을 후손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년대의 추정상 '형명' → 위의 사이에 우리가 확인하지 못한 또 한 분의 대(代)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점 유념해서 깊히 재고해야 될 숙제로 남는다.
다음 병인 대동보에 '가칭' → 子, '현' → 子,'한'의 계대이다. 먼저 고려사의 기록을 살핀다. 권제 74, 지제 28에 보면 국자감 시험으로 덕종초년(德宗初年 - 1032년)에 우습유(右拾遺) '염현'에게 명하여 정공지 등 60인을 뽑았다.
권제 5, 세가제 5 덕종에 보면 '염현'을 우보궐(右輔闕)로 승신시켰고(1033), 1046년 정종이 죽자 왕명에 의해 죽은 왕의
시,묘호(諡,廟號) 등을 재신 '염현'이 책문으로 지어 바쳤다.동문선(東文選)
고려사 권 9, 세가 9 문종 3에는 경신 34년(문종때 1080년) 12월초에 동번(東蕃)에서 병란이
일자 병부상서(兵部尙書) '염한'을 병마사로 하여 보병과 기마 3만을 출동시켜 431명의 살상과
포로들을 체포했으며 신유 35(1081) 봄 정월 을미일에 '염한'을
병부상서로 임명(문종 3년), 또 이 해 11월 정미일에는 병부상서
'염한'이 글을 올려 년로한 관계로 퇴직을 청했으나 왕에 의해 허가되지
않았다. 이상의 기록으로 확인할 때
'가칭'님의 번지(蕃地)에 피납 되었던 기간이 1010~1055간으로 도망올 때 겨우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아드님('현')이 1032년에 우습유로 국자감시를 치르고 1033년에는
우보궐로 승진 1046년에는 재신으로 책문을 올렸는데 이 기간은 '가칭'의 피납기간이니 사실이 성립될 수 없고 또
상식에 의한 계산을 해본다면 백발이 된 '가칭'님이 1055년에
돌아오셨으니 생년을 990년으로 할 때 '현'님이 재신으로
책문을 쓰셨을 때를 약 65세로 본다면 생년은 981년으로
계산되니 오히려 '가칭'님 보다 더 연로한 분으로 계산이 되고 또 '가칭'의 아드님이 '현'님이라는 역사의 기록이 없다.
다음 '현'의 아드님으로 '한'자 조상님을 연계한 것에 대해 검토해
보면 '한'님께서 연로하셔서 퇴직을 원했던 해가 1081년인데 이때의 연세를 약 65세로 볼 때 생년은 1016년이고 '현'자 선조님이 재신으로 책문을 쓰실때(1046년)를 약 65세로 보았을 때 생년은 981년으로 '한'자 조상님과의 연세차이는 약
35세이니 조금은 무리가 되나 연세상으로는 부자 관계로도
긍정이 되나, 역시 친부자간이란 기록은 없다.
이러한 계산에서 구보(舊譜)에는 '한'자 조상님을 '현'자 조상님의 윗분으로 모셨다가 '한'자 조상님을 밑으로 모신 점만은
수긍이 된다. 처음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믿을만한 기록을 소개하고 의심되는 부분을 제시하며 하나의 추상(推想)을 해 본 것이니 종인(宗人)들의 진지한 재고와 근거수집에 힘써 주셨으면 더할 바램이 없겠다.
고려사(高麗史)
7권 세가7 문종 1(1-10-03-1056 고려사 원문 소개)
'十年丙申二月甲午有司奏: "沒蕃人廉可偁 軍器丞位之子三韓功臣司徒邢明之孫於庚戌年中充環衛公子軍役契丹兵 蘭入京城震騷奉二親避兵于故鄕峯城縣道遇賊被虜而去淸寧元年正月携一子亡來請可偁 父祖永業田舍 竝令還給." 制曰: "可偁 功臣苗裔丁年被 浮棄蕃土妻兒惟携一子皓首而歸深可憐憫可給舊業田廬.'
'고려제11대 문종 10년 병신(서기1056년)
봄 2월에 유사가 아뢰기를 거란군에게 잡혀 갔던 염가칭은
군기승 '位'의 아들이고 삼한공신 사도 '형명'의 孫인데
경술 년중(서기1010년)에 환위공자의 군역에 충당되었다가
계단병의 경성침입으로 二親을 모시고 고향인 봉성현(지금의
파주군)으로 피하려다 도중에서 피로되었다가 청녕원년
정월에 아들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왔으니 부조의
영업전사(세습되는 농토와 집)를 환급하소서' 했더니 '가칭은 공신의 묘예로서
정년에 피로되었다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탈출하여
백발이 되어 왔으니 가련함에 구업전려를 돌려 주라'고
문종이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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