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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충신 충경공 염제신(파주염씨 중시조)에 관한 연구집

파주염씨 중시조 충경공 염제신에 대한 연구

 

  파주염씨의 중시조이신 충경공(제신)선조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논문을 게재하였습니다.

Ⅰ. 권태원님의 논문 '1994년 대전문화3'에 게재된 '염제신' 편

Ⅱ. 홍영의님의 논문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군사활동' 편


  Ⅰ. 대전시 1994년 12월 편찬  '1994년 대전문화3'에 실린 '염제신' 편

                                                   권태원(충남대 명예교수)    

    고려말 명신(충렬왕 30년-우왕 8년 1304-1382)인 염제신은 본관이 서원(瑞原:坡州의 옛이름)이고, 자는 개숙(愷叔) 아명은 불노(佛奴)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공의 원조에는 휘가 현(顯)이요, 시호가 효문(孝文)이란 분이 있는데 관이 재상(宰相)에 까지 이르렀으며 고려 문종(文宗)때 성균관(成均館)에서 시험을보아 선비를 선발하였는데 전형에 밝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또한 휘가 신약(信若)이라 하는 분은 인종(仁宗)때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벼슬이 태사(太師)에까지 이르고 시호는 효문(孝文)이라 하였다.

   고조는 휘가 희헌(希憲)인데 벼슬이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일찌기 원나라 세조(世祖)의 부름을 받고 원조에 입시하여 그곳에서 그가 정통했던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인의설(仁義說)을 강하여 그의 학명이 당대 중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위국공(魏國公) 항양왕(恒陽王)에 봉해졌다.
   증조(曾祖)의 휘는 순언(純彦)이며 벼슬이 소부승(小府丞)에 이르렀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추증되었다. 조(祖)의 휘는 승익(承益)이며 흥법좌리공신(興法佐理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리감찰사사(判典理監察司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정(忠靖)이었다. 충열왕을 도와 당시 여러 상공(相公)들과 서로 차례로 국정을 책임졌던 바 이 가운데 공의 업적이 으뜸이었다고 하였다 고(考)의 휘는 세충(世忠)인데 벼슬이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대호군(監門偉大護軍) 이르렀다.

  비(妣) 가순택주(嘉順宅主) 조씨(趙氏)는 추충보절동덕공신(推忠保節同德功臣)으로 벼슬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사(都僉議事)에 이르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효가 정숙(貞肅)인 고려말 명신 조인규(趙仁規)의 딸이다.   이와같이 공은 친가와 외가가 다같이 시중(侍中)인 재상을 지낸 손자로 태어나 천품이 뛰어나고 어릴때부터 몸가짐이 보통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였다.

  공이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세때 원(元)나라의 평장사(平章事)로 있는 고모부(姑母夫)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말길은 공을 위하여 당시 그 나라에서 나이많고 덕망이 있는 선비를 가려 공을 훈도하도록 하였는데, 그가 10세가 되어 이미 덕행과 기국(器局)이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원 진정제(元 秦定帝))가 황제가 되어 원나라대통을 계승하게 될 때(1324) 고모부인 말길이 공과 함께 내몽고 화림(和林)에서 황제의 어가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때 황제가 공을 한번보고 금중(禁中,왕궁)에 숙위(宿衛)하도록 명하여 이후 공을 돌봄이 융숭 지극하였다. 말길은 대신(大臣)임에도 불구하고 황제로부터 매우 두터운 신임을 받는 사람이다 그가 혹 몸이 불편하여 조정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황제가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을 명하여 말길의 집에 찾아가서 자문하도록 하였고 또한 말길이 황제에게 진대(陳對)한 내용은 반드시 공으로 하여금 황제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적신(賊臣)인 어사대부(御史大夫) 첩실(帖失)이 모반으로 복주(伏誅)되었는데 그의 누이동생을 공에게 출가시키려 하였으나 공은 역신의 가족과 연을 맺기를 강력히 거절함에 황제는 더욱 공을 중히 여기었다.

  그후 공이 오랫동안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지 못한 것 때문에 어머니 뵙기를 황제에게 주청한 바 황제는 효성에 감동하여 다녀 올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의 귀행길에 금자원패(金字圓牌)라는 원나라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여 출타 거동의 징표를 내리어 그의 행차를 도왔고 아울러 조속한 귀환을 의무화하였다. 이 무렵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는 사행(使行)이 잦아 행차하는 수레가 서로 잇달았다. 그런데 사자들이 모두 원나라 조정의 위령(威令)을 빙자하여 고려의 재상을 능멸하였고 수령들을 천하게 여기였으므로 관할연도의 지탱이 어려웠다. 그러나 공은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서 고려 재상에게 공손하였고 각 관장(官長)들에게도 예로써 대우하였다. 또한 고려측에 대하여는 물심양면으로 침해함이 없게 하니 사행중 원나라 조정에서는 그에 대한 칭송의 소리가 높았다.

  그후 사명을 마치고 원에 돌아감에 그에게 상의사(尙衣使)를 제수하였다. 원의 문종(文宗) 신미년(1331) 다시 고려에 온 일이 있는데 더욱 공손하고 근신하므로 당시 부로(父老)들이 그가 비록 나이는 젊지만 노성(老成)한 사람에 못지 않으니 과연 내외(內外) 시중재상(侍中宰相)의 손자답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계유년(1333)에도 어머니 봉양을 청하여 귀향을 원하니 원나라에거 그에게 일본원정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되고 있었던 관리인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에 제수하여 9년간 머물게 하였는데 마치 충숙왕(忠肅王)이 돌아가자 공에게 원에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의 벼슬이 세수되어 또다시 원으로 복귀하였다. 원순제(元順帝) 계미년(1343)에 사명을 받고 강소성 절강성(江蘇省 浙江省) 지방에 나와 중앙 정부인 중정원(中政院)의 전화(錢貨)를 회계감사 할때 관리들이 다투어 뇌물로 아첨하려 하였으나 공은 이를 일체 사절하고 그의 청백과 공정성을 보였다. 이에 승상(丞相) 별가불화(別哥不花)가 특별한 예(禮)로서 그를 대우하였고 나아가 황제에게 천거함에 장차 그를 크게 쓰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공의 대부인(大夫人)의 병환으로 귀향할 것을 간곡히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오자 당시 충목왕(忠穆王)은 공이 비록 천조(天朝:元)의 신하이면서 선왕이신 충숙왕을 도와 동정(東征)의 막료(幕僚) 역할을 다하여 국사를 돌보았으므로 공에 대한 각별한 예우가 있어야 된다고 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를 제수하고 사은사(謝恩使)의 임을 맡겼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자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충목왕이 돌아가고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자 당시 정승(政丞)인 왕후(王煦:菊齊 權溥의 子로 忠宣王 때 賜姓되어 한 동안  宗姓 王氏되었다가 다시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復姓하게됨)가 황제에게 입조하면서 모든 시무가 공에게 위임되었다.

   이때 왕이 즉위한지가 얼마 안되어 국사가 어려움이 많았다. 남쪽에서는 왜구(倭寇)의 침략이 그치지 않고, 명(明)의 전신인 새로운 한족(漢族)세력의 공격으로 북쪽으로 밀려난 원나라의 사정 때문에 국내에서는 권간(權奸)이 된 재상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공은 이와같은 어려운 시국에 정사를 총찰하면서 매사에 공정을 다하여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였다.
 비록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원나라에 대관(大官)의 자리에 있었던 고모부 말길(末吉)과의 연으로 그곳에서 크게 등용되었으나 항시 고국인 고려에 대하여는 지극한 향념을 버리지 않고 기회있을 때마다 황제에게 귀향을 청하여 본국 고려의 여러왕을 섬기게 되고 원
.명(元. 明) 교체기 어려웠던 시대 왕을 보필하여 종묘사직을 지탱하는데 커다란 치적을 남기였다.
  결국 공민왕(恭愍王) 초기에 본국고려에서 좌정승(左政丞)으로 제수되었고(1354)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儀同德輔理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이 무렵 원의 정사는 문란해지고 외구(外寇)의 침략이 그치지 않아 태사(太師) 탈탈(脫脫)이 원황제의 명을 받고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고려의 정승 채하중(蔡河中)란 자라가 원나라에 있으면서 본국의 정승자리를 다시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은밀히 탈탈에게 청하여 고려에 돌아가서 군대를 징발하고 남정을 돕겠다고 하면서 아울러 염제신이 용략(勇略)이 있는 사람이라고 천거하기에이 르렀다. 이에 공은 그의 뜻을 미리 알아차리고 상소(上疏)하여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버렸다. 왕 또한 탈탈의 세력에 못이겨 채하중을 정승으로 삼고 공을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하게 되었다. 당시 곡성이 바로 오늘의 파주(坡州)를 말하는 것이다. 염씨(廉氏)가 본래 서원(瑞原)을 관향을 삼았는데 파주로 고친 것은 바로 공이 파주의 옛이름 곡성에 봉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역시 공도 원나라 사신의 부름을 받고 유탁(柳濯)과 더불어 출정을 하게 되었으나 그후 고려의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을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원나라 황제는 공이 고려의 이름난 대신이라고 하여 휘정원(徽政院)에서 잔치를 베풀고 예를 극진히 하여 돌려보냈다.
 공민왕이 기황후(奇皇后:元順宗妃)를 배경으로 권횡이 심했던
친원파를 죽인후(1356) 원의 견책이 두려워 공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임명하고 초구(貂 求+衣-갓옷구)와 금대(金帶)와 더불어 병마대권의 상징으로 왕이 출정장군에게 주는 절월(節鉞)을 하사하였다. 당시 왕은 공을 신뢰하기를 만리장성과도 같다고 하였다. 또한 공이 국경을 수비하면서 당시 부장(副將)이였던 최영에게 책략을 반듯이 의논하는 등 사람됨을 잘 알아보는 명철함과 덕이 겸비되었다.
    공민왕 7년(1358) 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당시 시속의 폐단과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10여조의 건백(建白)을 진술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양식은 백성의 하늘(民天)과 같다는 것이고, 또한 군사의 임무를 맡은 자는 농민이기 때문에 이들은 유사시에 조련(操鍊)을 하고, 평상시에는 둔전(屯田)을 두어 군사를 수비하면서 농사를 짓는 소위 병농일치(兵農一致) 등의 뜻을 밝히였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그를 위하여 지은 신도비(神道碑)에 공으로 말미암아 3군(三軍 : 고려시대 全軍을 뜻함)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온갖 법도가 바로 잡히게 되었다. (三軍 效命 百度惟貞 )함은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고 칭송하였다.

  신축년(辛丑年,1361)인 공민왕 10년은 부귀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야인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선비들이 논의하기를 공이 일찍이 인재를 등용하는 전형(銓衡)의 책임을 다섯 차례나 담당하였지만 한번도 은혜나 원망으로 말미암아 사사로이 진퇴한자가 없었다고 하였으며, 이 때문에 일문 종족이 매우 많았지만 요직에 앉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체로 공이 담담하여 욕심이 적었고, 확고하게 공정함을 지킨 까닭이라고 하였다.
  공이 곡성후(曲城候)에 봉해지고 사저에 나아가 있는지 한달만에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을 함락하자 왕은 남쪽으로 몽진하여 복주(福州:安東)에 있었다. 다음해인 임인년(壬寅年,1362) 봄에 왕이 공을 불러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곡성후로 봉하니 공이 공민왕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으로 하여 상주(尙州)로 옮겼다가 청주로 다시 옮겼다.

   이때 공은 시중(侍中)인 윤환(尹桓) 이암(李 )과 함께 왕을 호종하고 다시 원암역(元巖驛)에서 윤택(尹澤), 이제현(李齊賢)등 노재신(老宰臣)과도 회동하였다. 다음해 정월 홍건적이평정되어 왕이 청주에서 도성(都城)으로 돌아올적에 공은 여러 재신들과 더불어 흥왕사(興王寺)에서 왕에게 축수의 술장을 올리었는데 왕이 공을 보고 뜻밖에 환궁하게 된 것은 모두 경(卿)의 공이라고 하였다.  이해(공민왕 12년) 3월 왕이 공을 좌정승(左政丞)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있어 모부인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그 다음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는데 이 무렵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전제개혁(田制改革)등 선정도 있었으나, 인사 등용 등 정사에 전횡이 심하였다. 이와 같은 신돈은 공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자주 왕에게 참소하였으나 끝내 그의 말을 무시였다.

   공민왕 18년인 기유년(1369)에 삼중대광(三重大匡:品階)에 특진되고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지자 신돈이 또다시 왕에게 공을 참소한 바 있어 왕은 공의 아들, 사유를 시켜 그와, 타협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공은 더욱 굳건히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이후 왕은 더욱 공의 지조있는 기개에 감복하여 중히여기였다. 그러나 신돈은 결국 왕의 불신으로 수원으로 유배, 처형되었으나 한동안은 왕이 그를 믿었기 때문에 공은 5,6년 동안 칩거생활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고려왕조는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에 처하게 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되어 공과 같은 노성(老成)의 인재가 절감하던 시대였다.
  공민왕 20년 신해년(1371)에 공이 여진정벌을 위하여 서북도통사(西北都統使)가 되어 올라성(兀羅城)에 출정하였는데 참전한 여러 장수들이 공의 절제로 무고한 인명살상이 견제되었다. 정벌을 마치고 개선을 하게되니 다시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지고 고려왕조 행정의 최고 수반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 품계도 올라가 보국(輔國)이 첨가되었다.

   신돈이 처형된후 왕이 공의 딸을 맞아 신비(愼妃)로 삼고 공의 부인 권씨(權氏, 安東人)를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고 세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므로 나라에서 부인에게 일정한 늠료(凜料:특별녹봉)을 내리게 되니 세상 사람이 모두 부러워 하였다.
  공민왕22년(1373)다시 공을 문화시중에 제수하고 품계는 옛과 같았으나 판개성겸감춘추관사(判開城兼監春秋館事)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을 첨가하였다.

    을묘년인 우왕원년(禑王元年:1375) 공이 오조(五朝 : 忠惠王 忠穆王 忠定王 恭愍王 禑王)를 섬긴 원 정치인이라 하여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儀同德論道輔理功臣)으로 영삼사(領三司), 영경연사(領經筵事)가 배수되었다. 또한 다음 정사년(丁巳年:1377)에는 도총도감(都摠都監)을 설치하여 오부(五部)의 병마를 훈련시키면서 공에게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어 판문하사(判門下事),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옮기어 다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공이 이미 늙었으나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당시 재상(宰相)들이 반드시 공과 칠원부원군 윤환(尹桓)을 초청하여 회의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공은 모든 국사를 자기의 책임처럼 삼아 자상하고도 숨김없이 그의 경륜을 정하게 되었다. 공이 살고 있는 저택은 반드시 화려하게 치장하지도 않고 또한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몇 번인가 이사를 하여 집을 옮겼지만 반드시 별장을 마련하여 정원을 잘 가꾸고 그의 아호인 매헌(梅軒)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어놓았다. 또한 도서는 방안에 가득하고 화죽(花竹)은 뜰에 가득한데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하루종일 담담히 보내었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는데 잔과 쟁반이 깨끗하고 안주는 간단했으나 정결하였다. 그리하여 술잔이 오고 가는 수작(酬酌)으로 취흥을 도꾸어 즐기다 헤어지곤 하였는데 이와 같은 풍류는 마치 신선(神仙)과 같았다.

   임술년 정월(壬戌年, 禑王 8年 1382) 원로 재상들과 더불어 현능(玄陵,공민왕능)을 배알하고 돌아와 아들들을 모아 남긴 말에 '재주없는 자로써 현능의 은혜를 입어 시중(侍中)의 지위에 까지 이른지 29년이 되어 나도 79세에 달하였는데 질병이 잦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니 내가 죽으면 3일만에 하관(下棺)하고 유사(有司)를 번거러히 하지 못하게 하여라' 라고하여 그의 죽엄을 예칙하여 박장(薄葬)을 자제들에게 당부한 것이다.
   마침내 이해 3월 18일에 별세하였고 공이 이미 정해놓은 임강현(臨江縣) 대곡(大谷)의 언덕에 유언대로 3일장을 치루게 되었다.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저자가 정지하였고 도당(都堂,都評議使司의 준말)과 재신이 모여 공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다스리고 국가의 법례(國典)에 어긋남이 없이 치루게 하여 하나의 전례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충경(忠敬)이란 시호를 내리셨는데 이때가 고려 우왕(禑王) 8년이며 명(明)나라 태조(太祖) 홍무(洪武) 15년이 되는 해였다.

   공이 박장(薄葬)을 유언하여 유사들로 하여금 번거러움을 피하도록 하여 겸양의 덕을 남겼다. 이와같이 공은 평소부터 청백과 간결함으로 이름이 높았고 부귀가 극에 달함을 크게 경계하여 임종에도 검약과 겸손함을 유명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공에 대한 성대한 훈공(勳功)과 수복(壽福)을 사람들이 당나라 곽자의(郭子儀) 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공이 별세한지 10여년만에 고려왕조가 망하였는데 예부터 훈척(勳戚)의 가문은 반드시 휴척(休戚)과 흥망이 종묘사직(宗廟社稷)과 더불어 같이한다는 고사가 연상된다.

  공이 두 번 장가 들었는데 초취인 완산군부인(完山郡夫人) 배씨(裵氏)는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인 휘 정지(挺之)의 딸로 일찍 별세하여 자녀가 없고, 재취한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원나라에서 조열대부(朝列大夫)로 태자좌찬선(太子佐贊善)이 되고, 추성동덕협찬공신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품계에 올라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이르렀으며 시호가 문탄(文坦)인 휘 한공(漢功)의 딸이다. 그는 성품이 부지런하며 검소하였고 자제들을 매우 엄하게 가르쳤다.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국보(國寶)는 벼슬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고,
  둘째아들 흥방(興邦)은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지제교(知製敎),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에 셋째아들 정수(廷秀)는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손자인 치중(致中)은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상호군(上護軍), 겸판종부시사(兼判宗簿侍事)에 이르렀고, 둘째손자 치용(致庸)은 벼슬이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이르렀는데 그후 화를 입고 서울 한강(漢江)변에 살았으며, 조선왕조 태조(太祖)때 공조참의(工曹參議)에 발탁 제수 되었다.  참의의 아들 증(增)은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충청도 옥천군(沃川郡) 하곡에 예장되었다.

   본 고장 대전과 충경공과의 인연은 공의 8세손이며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낸 주(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즉 그가 경차관(敬差官)으로 광주(廣州)에 갔을 때 도중 소낙비를 만나 산중의 한 암자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는데 그곳 암자의 벽위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어 펴보니 이것이 바로 충경공의 유상(遺像 - 影幀)으로 고려왕조 475년동안 제1의 화인(畵人)으로도 널리 알려진 공민왕이 손수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마침내많은 돈을 주고 그 유상을 모시고 돌아와 한동안 전라남도 나주의 금강서원에 봉안되었다가 조선왕조 중엽 이를 모사(模寫)하여 강원도 영월 추원사(追遠祠)로 옮겼고 그후 다시 금강(錦江)가라고 전하며 파주염씨의 세거지가 된 오늘의 대전직할시 동구 효평동(東區 孝坪洞)에 효평사(孝坪祠)를 세워 봉안하였으며 자손들이 춘추로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또한 가까운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濟原面 龍化里) 소재 용강서원(龍江書院)에도 예향(禮享)된 바 있다.

    공의 실적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전해오고 있으나 여말 충신 목은 이색(李穡)선생이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과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의 유집에 전해오고 있어 이를 첨가 참작한 것이다.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新增東國與地勝覽, 韓國現代人物傳集成(第3券), 坡州廉氏大同譜(遺槁). 끝.


  Ⅱ. 다음은 '홍영의'님의 글을 염종환님이 가필한 것임.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軍事활동(國防개혁을 中心으로)-

홍영의 연구원 논문에서   

  1. 머리말

  고려 후기의 사회는 매우 복잡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는 려원(麗元-고려와 원나라) 관계의 재편성 과정에서 고려사회가 각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원의 직.간접적인 외압으로 고려 본래의 지배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지배세력인 원과 고려의 왕 사이에 편승한 친원세력의 등장은 이 시기 정치사의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

  한편 이 시기는 고려사회 내부구조의 변질로 사회경제적 토대 또한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러 고려사회가 해체의 길을 걷는 출발점이 된 때이다. 농민층의 유망(流亡) 확대(擴大), 인구의 감소 농지의 황폐화, 권세가에 의한 토지집탈 등으로 군인전을 매개로 한 본래의 군제 붕괴가 이 시기에 걸쳐 발생하였는데 고려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14세기초를 중심으로 한 개혁정치였다.   

  충렬왕22년의 홍자번(洪子藩)의 '편민십팔사(便民十八事)' 충선왕의 2회에 걸친 개혁(旣位.復位改革), 충숙왕, 충목왕 및 공민왕의 네 차례에 걸친 개혁이 그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염제신(廉悌臣)의 생애는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변화에 순응 하면서도 친원세력이나 그 부류들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권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의 평장사(平章事)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청년기를 지내는 한편 원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등 원과의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고려에 귀국하여서도 정동성(征東省) 낭중(郞中)으로 활동하면서 충숙왕으로 부터 신임을 받기도 하고, 공민왕으로 부터는 왕의 일련의 적극적인 반원정책과 관련하여 군사활동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한 실질적 후원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염제신의 생애는 당시 고려와 원의 국제질서 속에서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한 대부분의 친원 세력들과는 상이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는 염제신이라는 개인적인 인물을 통하여 고려와 원과의 국제질서 재편성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양상을 찾아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그 동안 주목되지 못한 염제신의 생애를 통하여 그의 역사적 비중을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염제신의 군사활동과 국방안을 검토하여 공민왕의 실직적으로 반원정책을 추진한 힘이 어디에 있었으며, 공민왕이 염제신을 그토록 중요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국방안을 대비하여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공민왕때 반원정책의 실질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한 단서를 제공하여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본고는 염제신 개인을 중심으로 한 분석인 관계로 그의 정치활동에 있어서의 제 세력과의 관계, 그리고 이 시기에 등장하는 무장세력(武將勢力)과의 연결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2. 廉悌臣의 생애

  고려-원 관계를 배경으로 권세가(權勢家)의 집안에서 충렬왕 30년(1304년)에 태어난 염제신은 원과 고려에서 꾸준한 관직생활을 하면서 충숙왕 이래 우왕대까지 6개대에 걸쳐서 근 60년 동안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생애 79년을 시기별 특성으로 구분해 보면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원에서의 성장. 활동기를 1기로, 원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는 충숙왕대로부터 충정왕대의 활동기를 2기로, 반원정책을 단행한  공민왕과 우왕대를 3기로 그 성격을 파악해 보았다.

 

  염제신의 집안은 서원(瑞原-파주의 옛이름) 염씨 가문인데, 충렬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염승익(廉承益)이 그의 조부이다. 염승익은 조인규(趙仁規), 홍자번(洪子藩)과 더불어 정권을 천단하면서 왕권을 배경으로 토지겸병등을 통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등 당시 최고의 권세가로 지목받고 있었다. 또한 역관(譯官)출신으로 원의 유력한 가문과 고려 국내의 문벌과 통혼(通婚)관계를 맺어 당대 최고 권세가로 성장한 조인규의 딸과 자신의 아들인 세충(중시조님 부친)을 혼인시키는 한편 자신의 3녀 중 1녀를 공암(孔岩) 허(許)씨인 허호(許蒿), 2녀를 원의 평장사인 말길(末吉), 3녀를 심양왕고를 옹립하여 했던 조(曺)적과 혼인시킴으로써 서원 염씨 가문은 이를 바탕으로 원의 외압에 의해 새롭게 대두한 권세가와 혼인관계를 통한 가문의 중첩형태를 지니면서 새로운 권문(權門)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염제신의 아명(兒名)은 불노(佛奴), 자(字)는 개숙(愷叔)으로  6세(충렬왕2)에 감문위(監門衛)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부(父)인 세충(世忠)을 여의고 모(母)인 조씨와 외가에서 생활하다가 11세의 나이로 원에 들어가서 평장사인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문을 배경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원에 들어간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이 기간이 바로 그의 생애 1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는 여몽(麗蒙)전쟁이 종식된 뒤 새로이 전개된 여원관계 속에서 고려의 정치질서가 재편성되어 가던 때였다. 또한 위로 부터의 정치력 부재와 아래로 부터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동시에 노정되어 제 개혁안이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 개혁정치는 원과 직.간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각기 상이한 정치세력은 원과 고려를 중심으로 그 이해를 달리하여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단위(禪位, 충선왕과 충숙왕의 양위(讓位)와 같은 일들이 그러한 가운데 일어났다. 고려의 국내 정세가 이처럼 복잡하게 전개되는 동안에 염제신은 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충숙왕 11년(1324년), 염제신이 20세가 되던 해에 원에서는 철실(鐵失)이 영종(英宗)을 시해하고 우승상(右丞相) 배주(拜住)를 죽여 진왕(晋王) 야손철목아태정제)也孫鐵木兒(泰定帝)를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고모부 말길과 함께 화림(和林)에서 어가(御駕)를 맞이한 염제신은 태정제(泰定帝)의 눈에 들어 황실(皇室)에 숙위(宿衛)케 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태정제의 신임을 얻은 그는 태정제의 자문에 응하면서 관계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수년간 시종하다가 충숙왕 16년(1329년) 5월에 오랫동안 어머니를 돌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휴가를 얻어 금강산 어향사(御香寺)로 귀국, 충숙왕에게 술과 의복을 전하여 주고 다시 원으로 들어가 상의사(尙衣使)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귀국을 청하고, 충숙왕 복위 3년(1333) 원의 순제로부터 정동성 낭중(征東省 郎中)을 임명받아 돌아 왔다.

  염제신의 생에 2기는 충숙왕에서 충정왕대의 활동기로 그가 원에서 정동성 낭중을 제수받고 귀국한 때이다. 이 기간은 원의 거듭된 왕위 교체로 왕권이 실추되고, 친원세력에  의한 입성책동(立省策動)으로 대원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국가를 부정하는 입성책동은 고려인에 의해서 3차례에 걸쳐서 제기 되었는데, 충선왕 4년(1312)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 홍중희(洪重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요양성 우승(右丞)으로서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해진 충선왕과의 세력 다툼에서 충선왕의 세력 기반을 없애기 위해서 였지만 결국 충렬.충선왕 부자간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충숙왕과 상왕인 충선왕의 양위 과정에서 상왕으로 원도(元都)에 머물러 있던 충선왕이 실각하자 충숙왕 10년(1323)에 심양(瀋陽)王 고의 옹립운동을 전개한 오잠(吳潛), 유청신(柳淸臣) 등이 "청입성 차내지(請立省 此內地)"라 하여 입성운동을 제기하였고, 충혜왕 복위 4년(1344) 이예.조익청.기철(李藝.曺益淸.奇轍)에 의해서 "청입성 이안백성(請立省 以安百姓"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러한 입성책동은 고려에서 왕위계승과 이에 따른 제 지배세력들 간의 이해를 달리하는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더군다나 원은 고려의 내정간섭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동행성의 좌우사(左右司) 및 이문소(理門所)를 위시한 제속사(諸屬司)에 많은 원인(元人) 및 원관료를 파견하어 그들의 내정간섭을 실질적 방향으로 전환시켜 가려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염제신이 원으로 부터 정동성 낭중에 임명되어 귀국하였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려인 출신이 원관료서 성관에 파견되어 온 인물은 정동행성 설치 전기간 동안 5명에 불과하여 그만큼 비중이 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고려의 대원관계의 복잡성에 비추어 보아 충숙왕을 비롯한 국내 정치 세력들은 원의 황실과 조정에 그대로 일정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염제신을 통하여 고려 정부의 대원교섭이 그만큼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리라 기대 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염제신이 고려에 돌아와 가장 먼저 불법적 토지의 점탈로 발생한 전민(田民)의 소송을 해당관서에 되돌려준 일은 주복된다. 원래 전민의 소송은 해당관서가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토지를 점탈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친원세력이나 권세가, 행성관원(行省官員)이어서 법대로 처리될 수 없었으므로 전민의 소송이 정동행성으로 몰리게 되었는데, 염제신이 자신의 권한으로 이를 해당관서에 되돌려 주고 소송의 원활한 처결이 이루어지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충숙왕으로부터 "청렴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고, 또한 좌우사가 국가 공문서에 서명하기를 청하면 반드시 먼저 "우리 낭중이 서명하였느냐"고 묻고 서명할 정도로 염제신에 대한 충숙왕의 신임은 대단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이 시기에 충선.충숙왕대 찬성사(贊成事)를 재내다가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으로 치사한 배정(裵挺)의 딸과 처음 혼인하였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두 번째로 찬성사(贊成事)로서 충선왕 선위 후 원의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李帝賢)과 생활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심양왕 고 옹립에 참여했던 권한공(權漢功)의 딸과 재혼하여 염국보, 흥방, 정수 등 3남5녀를 두었는데, 여러 가문과 혼인 관계를 통하여 권세가문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충숙왕 복위 8년(1339) 왕이 죽자 원에 들어가 원으로부터 익정사승(翊正司丞)을 제수받고, 충혜왕 복위 4년(1343)에는 원의 승상(丞相)인 별가불화(別哥不花)가 천거하여 순제(順帝)로부터 관직제수를 보장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어머니의 병환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여 충목왕 2년(1346)에 삼사우사(三司右使)와 상장군(上將軍)에 제수되고 수성익대공신(輪誠翊戴功臣)의 호(號)를 받고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었다. 충목왕 3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원에 들어간 이듬해에 왕이 12세에 어린 나이로 죽자 왕위 계승문제로 원에 들어간 정승왕조(政丞王照)를 대신해 기철과 함께 서무를 맡아 처리하기도 하였다.


  종보 제6호 7면-                             파란만장의 생애(격동의 세월을 헤치고)

  염제신의 생애 2기인 충숙왕대로부터 충정왕대는 원과 관련하여 사은사.성절사로 임명되어 대부분 고려 정부의 외교적 임무를 대신해 활약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정은 염제신이 원 조정에서의 정치력 발휘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3기인 공민왕대 및 우왕(禑王)대 염제신의 정치활동은 그 어느 때 보다 확고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의 활동이 대부분 군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할 때 염제신과 공민왕과의 관계는 매우 깊었다고 보여진다. 특히 공민왕은 그 초년에 반원정책을 추진하고 고려의 독자성을 유지하려고 끊임없는노력을 경주하던 때였다. 공민왕은 즉위 초기에 원의 간섭 배제와 국내정치의 안정이란 측면에서 원년과 5년 두 번에 걸쳐서 재개혁을 단행하는데, 염제신은 바로 동왕 5년의 반원정책과 관련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공민왕은 원에서 일정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염제신을 즉위 처음부터 등용하려 하였지만 공민왕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던 조일신(趙日新)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염제신과 조일신은 조인규(趙仁規)의 외손과 친손이라는 혈연적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일신은 염제신의 등용을 반대하였다. 조일신의 반대는 원을 매개로 한 고려 국내에서의 상호간의 정치적 우위를 다투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조일신이 제거된 후 공민왕은 3년(1354) 1월에 염제신에게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도첨의좌정승 판군부사사 상장군(都僉議左政丞 判軍簿司使 上將軍)에 임명하였다.

   당시 그의 관직에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막강한 군사권을 부여받고 공민왕의 반원정책 추진을 준비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해 7월 원나라의 요청으로 내란의 평정을 돕기 위해 유탁(柳濯) 등과 함께 그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원에 갔다가 10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5년(1356) 5월에 친원세력인 친원파 세력을 제거한 뒤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9월에 서북면(西北面) 도통사(都統使)로 나갔으며 11월에는3개항으로 된 국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6년 수문하시중(守門下待中)을 겸하게 되었을 때 여러 도에 염철별감(鹽鐵別監)을 파견하는 문제를 놓고 신진관료인 이색(李穡), 전녹생(田祿生), 이보임(李寶林), 정추(鄭樞)가 반대하였으나 염제신은 염철사는 이미 정해져 있는 법이라 하여 파견을 적극 주장하는 보수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동왕 8년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어머니를 피난했다는 이유로 일연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홍건적의 12차 침입으로 인해 국내 정치질서가 극도록 혼란하던 시기로 동왕 12년(1363) 김용(金鏞)의 공민왕 암살기도 사건(흥왕사(興王寺)의 亂)이 일어나고, 원에 있으면서 덕흥군(德興君) 추대를 획책하던 최유(崔濡) 일파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보수적 무장세력이 대두하여 왕권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노국대장공규(魯國大長公主)의 죽음 등으로 어려운 국면을 맞은 공민왕은 동왕14년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단행하는 한편 동영부 정벌(東寧府 征伐)(동왕 19년, 20년)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염제신은 공민왕 13년(1364)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올라 있었으나 신돈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한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공민왕 20년(1371)에 동녕부 정벌과 관련하여 서북면 도통사가 되었고, 이 무렵 딸을 공민왕에게 납비(納妃) 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민왕 23년(1374) 6월에는 탐라의 말 2천필을 요구하러 온 명사(明使) 임밀.채빈(林密.蔡斌)을 홀대하여 광천에 유배되고, 공민왕이 환자 최만생(宦者 崔萬生),  홍륜 등에 의해서 시해된 뒤에 공민왕을 이어 즉위한 우왕대에는 즉위년에 영문하부사(領門下府使)가 되었고 동왕 2년(1376)에는 북원(北元)의 사신인 예부상서적홈(禮部尙書翟欽)으로부터 선명자덕대부(宣命資德大夫) 장작원사(將作院使)를 받았으며 6년(1380)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어 관직활동을 하다가 우왕9년(1383) 3월에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염제신은 원의 간섭기라는 외압에서 재편성된 고려의 정치구조의 변화와 여기에 부응하려는 가문의 환경 속에서 자라 어린 나이에 원에서 성장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 그리고 귀국 하여서도 고려 국내의 어려운 여러 여건 속에서 고려의 존속을 위해 고려 정부의 외교적 임무를 도맡아 처리하면서 원과의 외교적 교섭을 원활히 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원의 압력을 직.간접적으로 줄이려 하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려-원 관계의 새로운 질서 가운데 고려의 자주성 회복이라고 하는 일관된 정책 속에서 그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이 시기 원과 결탁한 친원 세력과는 남다른 모습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보 제7호 6면-

고려의 국토회복을 위한 근원적인 힘인 군사력 육성책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反元政策)

  공민왕의 反元政策 추진은 공민왕 3년을 전후로 하여 원의 쇠퇴로 말미암은 그 존재의미의 상실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남정군(南政軍)으로 파견되었던 장수들이 돌아와 원의 사정을 보고하면서 反元活動을 단행할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더군다나 동북면에서 친원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던 영흥간호(永興干戶) 李子春의 내조는 공민왕에게는 크나큰 정치적 군사적 힘의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동왕 5년 5월에 친원세력인 친원파를 치밀한 계획아래 제거하는 날로부터 정동성 이문소를 혁파하는 동시에 동북면 서북면의 구토회복을 결행하였다. 評理인당을 서북면 병마사로 사윤, 신순, 유홍, 최영, 최부개를 부사로 하여 압록강 이남의 8站을 공략케 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공천보 김원봉을 부사로 하여 永興등지를 수복케 하였다. 인당은 군사를 이끌고 3站을 공파하였고 유인우는 쌍성을 빼앗아 화주, 등주, 정주 등 9주와 선덕등 6진을 수복하였다.  이리하여 고종 45년(1258)이래 동부 서북면 지방을 지배하던 원을 내목고 고려의 국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和州 定州 咸州는 물론 북청지방까지 회복할 수 있었고 여진인의 본거지인 압록강 남쪽 강변까지의 공략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영토수복 뿐만아니라 동년 6월 충렬왕의 서자 석기일당인 손수경 일파를 제거하고 제군의 만도 백호태의 몰수 그리고 지정(至正)년호의 사용금지 7월의 관제개혁등 일련의 反元조치를 단행함으로서 원에 대한 고려의 자주적 자세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원과의 예속관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구조,  즉 고려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데에 있었던 것으로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일련의 반원정책을 취한 공민왕의 노력은 5년 6월에 교서를 발표하여 친원세력인 친원파 일타의 죄상과 석기의 난에 대한 그 처단의 명분을 밝히고 고려왕조의 중흥을 다시금 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전왕대에 시행하고자 하였던 개혁정치와 원년에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던 조치를 계속 추진하여 그간의 원의 간섭과 친원세력의 전횡에서 비롯된 정치 사회경제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공민왕 5년의 내정개혁안은 모두 l7개항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국방력의 재정비 차원에서 시행된것이 5개항으로 군졸의 충당 역제의 재정비 군량의 확보 차원에서 개혁조처가 이루워지고 있다.

충경공의 군사활동

  염제신은 공민왕의 반원정책의 실질적 행동인 서북면의 구토(옛땅) 회복 노력에 부응하여 군사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의 군사활동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사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유탁, 염제신 등 40여인의 군사 2천여인을 이끌고 원에 가려하니 왕이 영빈관에 거동하여 친히 점검하고 보냄에 미쳐 행군하여 압록강에 이르니 염윤충이 군중에게 모의하여 말하기를 "친척을 떠나 분묘를 등지고 사지에 나왔으니 어느날 돌아 가겠는가?   정기(精騎) 50으로서 경성에 치환(馳還)하여 처음 발병할 것을 꾀한 자를  참하고자 한다."하고 염제신에게 고하니 제신이 말하기를 "좋은 꾀가 아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이다. 하늘을 가히 도피할 수 있겠는가?  충신과 의사로서 어찌 반칙하는 말이 있으리오!. 하고 사잇길로달려가 이미 도성에 이르렸다.('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3년 추 7월)

 2) 친원파를 주살하고 公을 서북면 도원수로 임명하였다. 인당이 副使인 강중경을 천살(擅殺)하여 나라가 그의 분동(奔動)에 두려워 하였는데 곧바로 토벌을 명하지 않고 공에게 계책으로써 주살(誅殺)케 하니 군이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 (원의) 朝廷에서 사신을 보내어 국경에 이르러 난이 일어난 연유를 물으나 "기씨가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여 먼저 친 뒤에 갖추어 아뢰고자 하였다."고 진달하니 元帝가 노여움을 풀어 우리 나라를 용서 하였으니 이는 모두 공이 이에 대응한 힘이었다.(《염제신 신도비銘》)

 3) 그해 겨울에 서북면 도원수로 임명되어 공민왕이 절부(節斧)를 주면서 또한 말하길 "公이 간 뒤에는 내가 북방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하니 공이 대답하길 "신 또한 감히 米.鹽의 일로써 임금을 거스리지 않겠습니다."하였는데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염相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군정을 다스리되 도량을 먼저하고 성보를 그 다음으로 하고 기계(器械)를 그 다음으로 하라."하였다.(〈동상〉)

 4) 5월에 왜적이 전라도 회미.옥구 등을 침범하고, 또 양광도(楊廣道).평택.아주.신평 등의 고을을 침범하였는데 용성 등 10여 고을을 불태우니 京城에 계엄을 내리고....동네의 장정들을 뽑아서 군인을 만들고 또 百官들로 하여금 전쟁을 돕게 하였다.  간관(諫官)이 공민왕에게 나아가 절하고 하직하니 참정 정세운이(鄭世雲)이 아뢰기를 "간관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옛날에 듣지 못하던 일이오니 국체가 무슨 꼴이 됩니까?"하니 왕이 특별히 이를 면제하여 주었다. 국자박사(國字博士)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은 공자의 묘정(廟庭)을 모시고 있는데 학관이 전쟁에 나가는 것은 옛날부터 그런 예가 없었습니다."하니 시중 염제신과 이암(李巖)이 모두 말하기를 "내가 비록 공자를 모시고 있지 않더라도 공자가 어디로 도망하랴!"하였다.(고려사절요 권27. 공민왕 9년)

  1)은 염제신과 유탁 등은 2천여명의 군대가 원의 요청으로 남정을 가는 상황에서 염윤충 등 일단의 무장이 친원세력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는 것으로 염제신은 공민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고 그들의 남정에 따른 불만을 무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남정은 공민왕 3년 6월 정승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채하중(蔡河中)이 원의 국내사정을 파악하고 원의 정승인 탈탈(脫脫)에게 고려의 군사를 출병하여 정벌에 협조케 하겠다고 하여 이수산(李壽山)과 더불어 국내에 들어와 공민왕에게 脫脫의 파병 요청인 것처렴 속이고 염제신, 유탁을 거론하여 원에 보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공민왕은 염제신을 曲城府院君에 봉하여 유탁 등과 함께 남정에 참여케 하였다. 그러나 염제신은 고려 국내의 군사지휘체제의 공백으로 공민왕에 의해서 곧 고려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2)는 공민왕 5년 5월에 친원세력인 친원파 세력을 제거하면서 영토 수복을 위해 동북면, 서북면의 공격에 따른 원의 불만을 염제신이 처리한 내용이다.

  인당 등의 파사부(婆娑府) 등 3站을 공파하였을 때 원에서는 아직 친원파가 이미 피살되고 또 고려군의 8참 공략이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하고 원의 直省舍人이 친원파에게 주는 선명(宣命)과 인장(印章)을 가지고 오자 서북면 병마사 신순(辛珣)이 원사(元使)를 도중에 만나 선명과 인장을 빼앗고 원사를 가두고 그의 從子 3인을 죽여버린 일이 발생하였는데, 도망한 원사가 원에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에서는 고려의 절일사 금귀년(節日使 金龜年)을 요약에 가두고 "80만명을 보내어 내토(來討)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다시 원사 살적한(撒迪罕) 등이 압록강에 이르러 원제의 지(旨)를 전하여 인당의 변방 침략을 들어 힐문하자 이에 대하여 공민왕은 서북면 병마사 인당을 목베고 표(表)를 살적한에 붙여 "친원파를 벤 것은 그들의 불궤를 꾀한 까닭이다."하고 변강이 시끄럽게 된 것은 실로 본의 아니라는 뜻을 밝혀 일련의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당을 목베는데 바로 염제신이 주동이 되어 일을 마무리 하였던 것을 알수 있다.

  이와 같은 서북면 병마사 인당의 제거는 구토를 희복한 이상 더 이상 원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기에는 인당이 강중경(姜仲卿)을 살해하고 물의를 일으켰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은 인당이 앞서 서북면 탈환을 위한 8참 공략의 길에 오르기 전 자신과 함께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된 강중경이 술에 취하여 뒤늦게 도착하고 酒氣를 부리자 신순에게 죽이게 한 사건에 대하여 그대로 두었다가 인당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의 파사부등 3참을 격파한 다음 염제신으로 하여금 인당을 제거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3)서북면 병마사 인당을 죽인뒤 원의 내침에 대비하고자 염제신을 서북면 도원수에 임명하고 형부상서 유연(柳淵), 판사재사사 길비순(金之順), 상장군(上將軍) 김원명(金元命)을 부원수로 하여 표의와 금대(金帶)를 내리고 서북면의 방어를 담당하게 하였다. 여기서 염제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데 바로 공민왕은 "경이 간 뒤에는 내가 북방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점과 "염제신은 나의 만리장성이니"라고 하여 염제신을 높이 평가한 대목은 염제신의 원에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할때 주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염제신을 장수로써 그의 능력을 평가한 것이라는 점과 원과 밀접한 염제신을 북방의 최전선에 내세웠던 공민왕의 의도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군정을 다스림에 있어서 도량을 먼저하고 성보(城保)와 기계(器械)를 그 다음으로 하라는 대목은 염제신의 국방안 제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4)는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도인 개성에 계엄을 내리고 유탁을 경기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로, 이춘부(李春府)를 동강도병마사(東江都兵馬使), 이자춘(李子春)을 서강(西江) 병마사(兵馬使)로 임명하여 백관이하 일반민에 대하여 전시 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 간관과 학관 등이 전쟁에 나가려 하지 않자 염제신은 이들의 태도를 힐난하며 "공자가 어디로 도망하랴?"하고 극명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물론 전시 동원령에 참여치 않으려는 이들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염제신이 공자에 빗대어 이들을 강경하게 비판한 점은 당시 왜구 침략에 따른 각오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 예라고 할 수 있다.

  염제신의 국방안은 공민왕 5년 11월에 올려지는데 이 시기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제시된 것으로 이것은 앞으로의 고려 군사력의 재정비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국방안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변경을 방수하는 법은 적당한 때에 교대하는 것입니다.  이제 군사들은 한여름에 북쪽으로 와서 겨울이 되도록 머물러 의갈이 없으니 무엇으로 추위를 막을 것이며 설사 몰아서 실석간(失石間-전쟁)에 넣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까?  청컨대 반년으로써 1期를 삼아 교대하게 하소서,(《고려사》지35 병1 오군 공민왕 5년 11월)

  2) 또 군증에서 비록 친상(親喪)을 당하더라도 대열(隊列-行伍)을 면할 수 없으니 그 어찌 사람의 자식된 정리로서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무릇 상을 당한 자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만약 대신할 사람이 없으면 날짜를 계산하여 휴가를 주게하소서.(동상)

  3)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하고 병을 농사에 감춘다고 하였으니 마땅히 군사들로 하여금 일이 있으면 무기를 잡고 일이 없을 때에는 둔전(屯田)하게 하면 군량을 운반하는 일은 생략되고 군식(軍食)이 넉넉하여 질 것입니다. 군사의 강성함은 군량의 저축에 있는데 지금 군사를 일으킨지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수송하는 도로는 험하니 만약 그 정강(精强)한 자를 뽑아 요해처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그 나머지 군졸은 옮겨서 안주(安州) 등처에 취식케 하되 변(變)을 보아 동원하면 곧 군량미를 운송하는 노고를 덜고 양병(養兵)하는 힘이 강해질 것입니다.

  (《고려사》236 병2 둔전부(屯田府-兵糧 공민왕 5년11월)에서 볼때 염제신의 국방안은 3조항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보 제7호 7면-

파란만장의 생애

- 격동의 세월을 헤치고        

  그 첫째는 변방지역의 문제로 반년을 일기로 교대하여 복무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방수에서 정규적 수자리의 교대는 1년이었다.  그런데 이를 6개월을 1기로하여 교대하자는 것이었다.  방수기간에는 의복이나 무기를 마련해야 하고 또 부임 도중의 식량도 각자의 책임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방책은 군인들의 가장 무거운 방수의 임무를 덜어 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하겠다. 그러나 그만큼 군사의 숫자가 줄어들 수 밖에 없으므로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이 어느정도 마무리된 상태에서 만이 이러한 조치가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군사가 친상(親喪)을 당하면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고, 대신 할 사람이 없으면 날짜를 계산하여 휴가를 주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원래 제령부(諸領府) 군인에게도 그 부모상에는 1백일의 급가(給暇)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 15년, 원의 일본 정벌에 이어서 충렬왕대에 들어 원에 의한 군사상의 압박이 강화되자 고려는 군사들에게 상가(喪暇)기간을 대폭 단축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종래의 1백일의 급가에서 그 반인 50일로 단축된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해에는 원의 제2차 일본정벌이 있었으므로 전후의 사정을 침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원정책이 단행된 공민왕 5년에 가서는 친상을 당한 군졸이 그나마 50일의 급가조차도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염제신의 위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군량의 확대책으로, 둔전의 경영을 통해서만 군량수송의 수고로움을 덜고 군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정예한 군병만 요충지에 남겨두고 그 나머지 병사는 安州(평남 안주) 등지로 옮겨 후방에 주둔케 하자는 것이다. 둔전은 변경(邊境), 진성(鎭城)에 주둔하는 군대가 군량을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경작하는 토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둔전이 권세가에 의해서 탈점되거나 묵은 토지로 되어 버렸는데, 원이 강점하고 있던 동북면, 서북면을 되찾으면서 그동안 묵었던 둔전처(屯田處)를 경영하자는 것이었다.

격동기의 슬기

  이상 염제신의 국방안은 공민왕 반윈정책의 추진과 그 성공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을 재정비 하자는 것임을 알수 있다. 왜냐 하면 공민왕 5년의 국방정책은 군량의 확보, 군사의 문제에 그 결함이 있었던 반면에 염제신의 이러한 국방안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둔전의 문제 역시 동.서북면의 회수된 토지를 둔전처로 재확보 경영하려는 것이었고, 방수의 문제 또한 방수의 교대기간을 줄인다는 것은 일반민이었던 군병의 피해가 그만큼 적어지고, 한편으로 병사의 숫자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면이 있다. 그러나 염제신의 국방안은 실제적으로는 고려전기 이래의 군사체제 복구를 위한 특별한 방향이 제시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민왕 5년의 국방정책이 그대로 그 골격을 유지하면서 어느정도 서오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염제신이 이러한 국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공민왕 5년의 국방정책에서 얻어진 군제 정비과정은 홍건적의 1.2차 침입을 물리친 이후 집중적 노력의 결과로 그 골격이 고려말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맺 음 말

  이상에서 우리는 염제신의 생애와 관력을 통하여 그의 역사적 위상, 그리고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관련하여 염제신의 군사활동을 살펴보았다.  앞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여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염제신은 원의 외압에 의해 재편성된 고려의 정치구조의 변화와 여기에 부응하려는 가문의 환경속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원에서 생활하면서 관직생활을 하고, 귀국하여서도 고려 국내의 어려운 여건속에서 고려의 존속을 위해 고려 정부의 외교적 임무를 사은사(謝恩使), 성절사(聖節使)를 역임하는 가운데 도맡아 처리하면서 원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노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원의 압력을 직.간접적으로 줄이려 하였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려의 원 간섭 배제라는 일관된 정책 속에서 그가 어느정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의미있는 모습이며, 이 시기 원과 결합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던 친원세력과는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공민왕의 반원정책은 그의 측근(側近)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고 보여지는데, 염제신은 여기서 실질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공민왕 5년 5월의 친원세력인 친원파 세력(奇轍勢力)을 제거한 이후 인당 등을 제거하면서 그 수습과정에서 공민왕을 도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염제신의 군사활동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국방개혁안이 동시에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과 관련한 실제적인 힘이 되어야 할 국방개혁은 사실상 고려 군제상에 있어서 고려 초기 이래의 군사체제를 그대로 복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반원정책의 추진과정에서 우선 시급한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군인의 확보, 이에 따른 둔전의 확대, 역제(驛制)의 재정비를 해결하고자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염제신의 국방안은 공민왕 5년의 국방정책의 재정비라는 측면에서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제신의 국방안 역시 실제적으로 고려 전기 이래의 군사체제의 복구라는 측면에서는 특별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있어 그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염제신의 군사활동과 그의 국방안은 이 시기에 있어서 고려 정부나 일반민에게는 일정한 역할을 하게끔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시된다. 그러므로 염제신의 비중은 고려의 대원관계 속에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고 주목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洪榮義세종기념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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