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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신 예문관 대제학 국파공 염국보

파주염씨 2世祖 국파공 염국보

2世 국파공 염국보(菊坡公 廉國寶)
高麗國 推忠輔理功臣 重大匡 瑞城君 藝文館 大提學
(고려국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 대제학)

주요 내용 연결 목차

 
 

염국보(廉國寶)의 프로필

   염국보(廉國寶, ?~1388)는 고려의 문신. 본관 서원(파주), 호는 국파(菊坡), 생년미상, 파주염씨의 중시조이신 충경공 염제신(忠敬公 廉悌臣, 1304-82)의 맏아들이고, 아우들은 흥방(興邦, 호 東亭)과 정수(廷秀, 호 淸江)였다. 염국보가 공부한 성리학은 익제 이제현(李齊賢)-문경공 안보(安輔)의 계보로서 안보 선생과는 좌주-문생 관계였다. 특히 염국보는 안보의 문하생들 중 인기와 칭송이 높았고,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등과 도의를 논하면서 덕망과 기품을 이룩했으며, 공민왕 4년(1355)에 과거급제 했다. 그간 아버님 충경공은 좌정승, 우정승, 수문하시중, 문하시중에 올랐고, 맏형님을 뒤 따라 두 분 아우도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삼자등과댁(三子登科宅)이 되었다. 염국보는 낭중과 안렴사를 거쳐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가 되었다. 공민왕 23년(1374)에 아버지는 문하시중에 중임, 밀직부사 염흥방은 동지공거 역임, 이인임 탄핵사건의 여파로 삼형제가 유배 후에 풀려났다.

  우왕 2년(1376)에 예문관대제학 염국보는 한림 정몽주와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공헌했다. 1380년에 서성군 염흥방은 지공거를 역임했다. 아버님 충경공은 우왕 8년(1382)에 별세 후 시호는 충경(忠敬)이었다. 우왕 9년에 지신사 염정수는 성균시 시관을 역임했다.

  우왕 11년(1385) 서성군 염국보 지공거와 정당문학 정몽주 동지공거는 변계량 등 인재를 선발, 우왕 12년(1386) 삼사좌사 염흥방은 동지공거로서 맹사성 등을 선발했다. 그리고 사신 염국보는 부사 정몽주와 서장관 한상질과 함께 명태조에게 아뢰고 대답한 말씀이 자상하고 분명하여 해마다 바친 공물(貢物)과 5년 동안 못 바친 공물 등을 탕감받았고, 유배 중인 사신 홍상재, 이자용, 김보생 등을 풀려나게 했다. 한편, 염국보는 처음으로 명관복을 입고 호복을 입지 않도록 건의했고, 단상(短喪)의 제도를 없애고 명나라의 3년복제(三年服制)와 도포를 입고 관을 쓰게 하여 동방문물이 이로부터 시작되게 만들었다.

  염국보는 공신호와 관작이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예문관대제학 서성군(推忠輔理功臣 重大匡 藝文館大提學 瑞城君)에 이르렀다. 그러나 1388년 정월 18일에 아우 동정공(東亭公)이 최영(崔塋), 이성계 등에게 모함을 당하여 그 화가 온 가문에 미치어 끝내 화란을 면치 못하였으니 조정에서나 백성들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고려사 ; 고려사절요 ; 목은문고 15권 충경공염공신도비 ; 1986년판 대동보 1권 6-8쪽).

  머리말

   염국보(廉國寶)는 중시조 염제신(廉悌臣)의 3남 5녀 가운데 맏아들이시다. 자녀들 중 특기할 사항은 세 분 아드님이 과거급제자였다는 것, 그리고  한 집안에서  4부자 모두가 고려의 중신들이었다는 것이다.  

  염국보는 공신호와 관작이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던 한국 역대인물의 서원(파주)염씨들 중 한 분이시다. 두 분의 아우 흥방(興邦)과 정수(廷秀) 역시 재상급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매형과 매제 중 첫째 매부는 홍징(洪徵, 남양홍씨), 둘째 매부는 임헌(任獻), 셋째 매부는 정희계(鄭熙啓, 경주정씨), 넷째 매부는 공민왕으로 신비염씨(愼妃廉氏), 다섯째 매부는 이송(李悚, 예안이씨), 이복여동생의 남편은 홍문필(洪文弼)이었다. 이러한 염문은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던 우왕 14년에 이인임 일파가 다섯 가문을 멸족시킨 무진참화로 기울어졌고, 고려왕조 또한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본고의 목적은 염국보(廉國寶)에 관한 대동보의 손록에 적힌 기록을 기초적인 자료로 삼아서 그 분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복원해 보려는데 있다.

염국보의 생애와 행적

염국보의 출생과 성장 및 성리학 공부
   염국보(廉國寶)의 자는 민망(民望), 호는 국파(菊坡), 생졸미상, 충경공(忠敬公 廉悌臣)의 맏아들이다. 일찍이 문경공 안보(文敬公 安輔) 선생에게 학업을 닦았고, 성리학(性理學)에 독실하여 이보림, 이인, 우현보, 정습인, 이원령 등과 함께 당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염국보는 인기가 높아서 온 세상이 그를 칭도하였다. 목은 이색(李穡)과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과 종유(從遊)하면서 도의(道義)를 논하면서 절차탁마하여 덕기(德器)가 성취되었다(1986년판 대동보 1권 6-8쪽 손록 ; 문헌록 503-505쪽 국파공사적)

  고찰 : 문중기록 및 역사기록을 보면, 충경공 염제신(1304-1382)의 생졸연대가 분명하지만, 세 분 아드님 국보(國寶), 흥방(興邦)과 정수(廷秀) 각각의 출생년월일은 모른다. 이로 인해서 염국보가 안보(安輔) 선생에게 배웠던 기간이나 과거급제의 연령을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1남 국보와 3남 정수의 자(字)가 똑같이 민망(民望)이다(문헌록 504쪽 국파공사적 ; 대동보 1권 손록 13쪽 정수). 이로 인한 혼란은 국파시고에서 언급한다. 염국보가 공부한 성리학은 익제 이제현(益齊 李齊賢, 1287-1367)-문경공 안보(文敬公 安輔, 1302-1357) 계보였다. 따라서 염국보의 교우관계 역시 안보의 문하생들, 즉 이보림(李寶林, 이제현의 손자), 이인(李靭), 우현보(禹玄寶, 1333-1400), 정습인(鄭習仁, 초계정씨 박사공파), 이원령(이집/李集, 1314-87)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염국보는 더욱 인기가 있었으며, 이색(李穡, 1328-96), 정몽주(鄭夢周, 1337-92), 이숭인(李崇仁, 1349-92) 등과 도의를 논하면서 절차탁마하여 덕기(德器)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염국보의 착한 행실과 뛰어난 기품은 이색이 염국보에 대해서 “내가 왜 벼슬하기를 싫어하느냐 하면, 나날이 그대를 만나기가 어려워서라네”라는 시구로 요약된다(1986년판 문헌록 503-504쪽 국파공사적.  Empas백과사전).

1350년대 : 아버지 염제신의 행적

  아버지 염제신(廉悌臣)은 6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머님의 권유로 11살 때부터 원나라(元, 1271-1368)에 유학했고 21살 때부터 그곳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중에 모친 봉양을 위해서 충목왕(1344-49) 때 귀국하였다. 그후 염제신은 고려의 조정에서 광정대부, 삼사우사, 상호군, 대광, 도첨의평리, 찬성사, 판판도사사,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 서북면도원수,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좌정승, 우정승, 대원응원군 수뇌 및 수문하시중을 지낸 재상급 반열에 올라 있었다

1355년 2월 : 염국보 과거급제

   고려사 : 공민왕 4년 찬성사 이공수 지공거와  밀직제학 안보 동지공거가 진사를 뽑았는데 안을기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8)
   고찰 : 염국보(廉國寶)의 과거급제에 대한 문중기록은 ‘공민왕 4년 을미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대동보 1권 6-8쪽)는 것과 ‘공민왕 4년 안을기과방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문헌록 503-505쪽)는 것이다. 이것의 출처가 [고려사 73권]이다. 즉, 염국보는 공민왕 4년(1355) 안을기과방(安乙起科榜)의 33명 급제자 중 1인이었다. 이는 삼형제 중 염국보가 맏이답게 650년 전에 이룩한 염문의 경사였다. 이같은 염문의 과거급제는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과거급제의 첫 번째 분이 인종 24년에 염신약(廉信若, 고려사 73권, 99권-염신약)이었다. 그후 고종 12년(1215)에 염후(廉珝), 고종 34년(1247)에 염수정(廉守貞), 그리고 공민왕 4년(1355)에 염국보(廉國寶)의 급제였다. 이러한 염국보의 스승 겸 좌주였던 문경공 안보(安輔) 선생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염국보의 스승 안보(安輔, 1302~135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녕(영주시 순흥), 안석의 아들이고, 첨의찬성사 안축(安軸)의 아우이다. 안보(安輔)는 충숙왕 7년(1320) 19세로 문과 급제 후 경주사록  권지전교 교감  예문검열 춘추관수찬  문하주서  감찰규정  군부좌랑  좌정언  우헌납  전리정랑  감찰장령  전의부령  전리총랑  감찰집의, 편수관 등을 지내고 충목왕 즉위(1344년)에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란 벼슬에 있다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귀국했다. 우대언 겸 집의를 거쳐 충정왕때 전법판서를 거쳐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밀직제학 겸 감찰대부제조 ? 전선사를 지냈다. 안보는 공민왕 4년(1355) 동지공거 ? 정당문학을 거쳐 동경유수가 되었다. 안보의 관직은 제학에서 대제학에 이르렀고, 지방관으로는 충목왕 5년(1344) 양광도안렴사, 1345년에 교주도안렴사를 지냈다.

  목은 이색은 안보의 묘지(墓誌)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史記)를 즐겨 읽었으며, 일에 임하매 대체를 좇아 조금도 치우침이 없었고, 문장은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할 뿐이었다.」고 했다. 또「묘지가 아닌들 선생의 이름을 전함에야 무엇을 근심하리, 안씨 형제의 이름은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으며, 그 행적이 국사(國史)에 올라 뒷날 공민왕의 실록(實錄)을 작성하게 되면 선생의 열전(列傳)이 족히 사책(史冊)에 빛나리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묘지의 끝맺음에서 「선생은 이르기를 “나는 자식이 없지만, 내 문도들이 곧 내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의 문하에서 이보림(李寶林)  염국보(廉國寶)  이인(李靭)  우현보(禹玄寶) 등과 같은 덕망있는 재상급 인물들이 있었고, 그 밖에도 이름 높은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소수서원에 배향되어있다(고려사 108권-열전 21-안축/安軸-안보/安輔 ; 동사강목 제14 하 ; 야후백과사전 ; 순흥안씨 홈페이지

1356년 9월 : 염제신 서북면도원수

  아버지 염제신(廉悌臣)은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모델일 정도로 문무겸전의 한국역대 인물이시다(문헌록 1094-1101쪽 : 국토방위 정책의 선구자 염제신). 말하자면, 염제신은 공민왕 5년(1356)의 반원정책에 따른 국방정책 수립과 훌륭한 지휘관으로 활약한 분이었다. 이와 관련된 6백여 년 전의 역사적 사실들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공민왕조에는 물론 1991년도 군사전문지에 한 편의 논문으로 등장될 만큼 한반도 국토방위의 선구자였다(군사 23호 : 공민왕 5년의 반원정책과 염제신의 군사활동. 홍영의/세종기념관 연구원, 1991). 여기에서는 염제신 서북면도원수에 관한 일부만 소개하고자 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 공민왕 5년(1356) 5월 반원정책에 따라 원 순제의 기황후(奇黃后)를 배경으로 그 세력을 업고 권세와 횡포를 부리던 친원파들을 죽여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서 공민왕은 원으로부터 견책을 당하거나 또는 군사적인공격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서 공민왕은 1356년 9월 계미에 곡성백 염제신(曲城伯 廉悌臣, 53세)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임명하고, 유연과 김지순을 부원수로 임명했으며, 등차에 따라서 담비의 모필로 만든 갑옷과 금띠를 내리고 군대를 주둔시켜서 북쪽에서의 외침을 방어하게 하였다(고려사 43권-세가 43권-공민왕 6년 ;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 병신 5년).

1357년 4월 : 염흥방 장원급제

   고려사 : 공민왕 6년 4월 정당문학 이인복 지공거와 첨서추밀원사 김희조 동지공거가 염흥방(廉興邦) 등 33명을 급제시켰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8).
   고찰 : 공민왕 6년(1357)에 염흥방의 장원급제는 [고려사 73권]의 염흥방과방(廉興邦科榜)이었다. 이는 2년 전 염국보(廉國寶)의 과거급제에 뒤를 이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같은 염문의
장원급제에 있어서 첫 번 째는 ‘염후(廉珝)’였고(고려사 22권, 73권), 두 번째가 ‘염수정(廉守貞)’이었다(고려사 74권). 말하자면, 세 번째가 염흥방(廉興邦)이었다(고려사 73권).이와 같은 장원급제자 염흥방에 대한 축하 시가 없을 수 없다

 목은시고 29권 : 염흥방 장원급제, 이색의 축하 시

    젊은 장원(염흥방)이 늙은 장원(이색)을 초대하는데
    장원한 문생이 또 특별히 말을 전하네
    이런 성대한 일이야 능히 세상을 일깨울만 하건만
    다만 병든 몸이라 문을 나갈 수 없어 한이로세。

    만나고 헤어짐은 마치 부평초와 같건만
    한가하거나 바쁘거나 항아리 술은 다 좋아한다오
    이 몸 쾌차할 날이 어느 때런고
    비 바람 쓸쓸한 난간에 혼자 기대어 있노라

1358~1369년 : 문하시중 염제신과 염흥방의 행적

  1358년에 염제신(廉悌臣)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종1품)에 올랐다. 1359년에 염흥방(廉興邦)은 밀직사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1361년 홍건적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행할 때 곡성백(曲城伯) 염제신이 여러 노신들과 함께 어가를 호종하였다. 1362년 10월에 염흥방은 지신사(知申事), 1363년 3월에 염제신은 우정승(右政丞), 1364년에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임명되었다. 1365년 신돈의 득세로 염제신은 6년 동안 물러나 있었다. 1367년 염흥방은 밀직지신사가 되었다(홈-중흥시조-염제신 선조, 차남 동정공 염흥방). 한편, 염국보에 관한 대동보의 손록과 문헌록을 살펴 보면 4부자 중 가장 공백이 많을 만큼 관련 자료들이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아쉬움에 적지 않게 큰 보탬이 되어 준 것이 염국보(廉國寶)의 장인 권염(權濂)에 관한 백과사전과 묘지명(墓誌銘)이었다(목은문고 제16권 ; 동문선 126권).

염국보의 장인 권염(權濂, 1302-1340)

   고려의 문신, 자는 사렴, 호는 송재, 본관은 안동. 1311(충선왕 3)년 음보로 함경전녹사가 되었고, 1318(충숙왕 5)년 삼사부사에 임명되어 봉상대부에 올랐다. 1323년 사복정이 되었고, 1325년 원나라 황제로부터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 부만호를 받았다. 그후 응양군대호군을 거쳐서 1327년 선군별감 자리에 올라 토지를 법에 따라 지급하여 인심을 얻었고, 1330년에 좌상시가 되었다. 1335(충숙왕 4)년에 딸이 충숙왕 비(妃)가 되자 현복군(玄福君)에 봉해졌고, 그 뒤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야후백과사전 ; 동문선 126권). 한편, 염국보(廉國寶)에 대해서는 1370년 쯤에 작성된 장인의 묘지명(墓誌銘)에서 당시의 관직과 2남 1녀에 관한 자료가 나왔다는 것은 반갑고도 기쁜 일이다(목은문고 제16권 ; 동문선 126권 : 중대광 현복군 권공묘지명 병서/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 幷書). 즉, 염국보는 현복군 권염의 5남 5녀 중 넷째 사위로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는 것이다.

 묘지명에 나오는 외손에 관한 기록 중에서 ‘넷째 사위 염국보(廉國寶)가 2남 1녀를 두었다는 것은 염문 대동보와 일치하는 것이다. 즉, 장남 치중(致中)은 목릉직, 차남 치화(致和)는 창릉직, 딸은 어리다’고 적혀 있다(동문선 제126권).
  고찰 : 염국보의 2남 1녀에 대한 외할아버지의 묘지명에서 1370년경에 장남 염치중(廉致中)은 목릉직(穆陵直)이었고, 차남 치화(致和, 즉 치용/致庸)는 창릉직(昌陵直)이었으며, 딸은 어리다고 하였다(동문선 제126권). ‘목릉직’과 ‘창릉직’ 역시 1986년판 대동보 치중과 치용의 손록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당시에 어리다던 따님의 남편은 안조동(安祖同, 직제학)은 고려에 성리학을 도입한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裕)의 후손이다(국파공사적).

1370년경 염국보의 관직 :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염국보는 다섯 분의 처남을 두었는데, 첫째가 권용(權鏞), 둘째는 권현(權鉉), 셋째가 권호(權鎬), 넷째는 권균(權鈞), 다섯째가 권주(權鑄)였다. 그리고 처제들 중 첫째는 충숙왕의 수비(壽妃)로 봉해졌고, 둘째의 남편은 원의 영록대부 보달실리, 셋째의 남편은 판전의사사 오중화(吳仲和)였다. 그리고 바로 넷째 따님(四女)의 남편이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염국보(廉國寶)라는 것이다. 막내의 남편은 상호군 원송수(元松壽)였다고 한다(동문선 126권 : 중대광 현복군 권공 묘지명 병서)
  고찰 : 고려시대에는 한 사람의 자녀가 보통 10명 안팎이었던 것 같다. 권염(權濂)의 자녀 10남매 중 앞에서와 같이 넷째 사위가 염국보라고 밝혀진 것이다. 한편, 염문에서 염국보는 “추충보절협찬공신, 삼중대광,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봉서성군”(1986년판 대동보 손록 6-8쪽)이라는 것, 그리고 “고려국 추충보리공신 중대광(종1품) 서성군(1-2품 공신군호) 예문관대제학(정2품)”으로 알고 있다(목은문고 15권 ; 동문선 119권). 그런데, 처가댁 장인의 묘지명에서 염국보(廉國寶)의 중년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 종3품 상계)’, ‘전의령(典儀令, 정3품)’,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정4품)’, ‘지제교(知製敎, 정4품)’였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소중한 정보들이 사돈댁 권문에서 나온 것을 감사하고 싶다.

  중정대부(中正大夫) : 고려시대 문산계의 하나. 1308년에 복위한 충선왕이 종3품 상계 통의대부를 중정대부라고 바꾼 것이다(야후백과사전).
  전의령(典儀令) : 고려시대 후기에 제사를 주관하고 왕의 묘호와 시호의 제정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관원은 영사(令事) 2명, 영(令 : 정3품) 1명, 부령(副令 : 정4품) 2명, 승(丞 : 정5품) 1명 등이 있었다(드림위즈사전).
  직제학(直提學) : 고려시대에 예문관, 보문각, 우문관, 진현관 등에 있었던 제학(提學)의 바로 아래가 직제학으로서 정4품이었다고 한다(야후백과사전)

1371년 3월 : 염정수 과거급제

   고려사 : 공민왕 20년 3월에 이색 지공거와 전녹생 동지공거가 진사를 뽑았는데 6월에 공민왕의 친시에서 김잠 등 31인을 급제시켰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8).
   고찰 :  염정수(廉廷秀)는 공민왕 20년(1371)의 과거 및 공민왕의 친시를 거쳐서 선발된 김잠과방의 31명 급제자 중에 1인이었다. 이는 16년 전에 맏형님(廉國寶)의 과거급제와 14년 전에 둘째 형님(廉興邦)의 장원급제에 뒤를 이은 염문의 대경사였다. 이에 대해서 공민왕은 삼형제의 모친 권씨부인(權氏夫人)에게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했다. 그리고 스승 이색은 문생 염정수(門生 廉廷秀)의 훤정기(萱庭記)를 남겨 놓았다(목은문고 제2권 ; 동문선 제73권 ; 문헌록 606-608쪽 ; 홈-“막내 청강공 염정수”). 이에 대해서는 삼자등과댁(三子登科宅)으로서의 위상과 명망, 노부모의 건강, 자식 사랑, 기쁨 등을 묘사해 준 이색의 축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목은시고 28권 : 문헌록 975-976

     제목 : 염정수 대언을 축하하다

    세 아들 모두 급제하여 일찍부터 명망 높은데
    막내 아들 사랑한 분은 바로 어머니라오
    고당의 늙은 어버이는 모두 건강하시고
    태평성대 임금님 근신(近臣)이라 더 없는 영화로세

    맑고 깨끗한 인품은 옥수와 같고
    드높은 대궐(大闕)은 하늘에 가 닿는다
    이 늙은이 몹시 기뻐함 무어 물을 것 있나
    성주(聖主, 임금) 보좌하는 문생(門生)을 보아서라네

1371년 11월 : 염제신의 따님, 공민왕의 신비 책봉

   공민왕 20(1371)년 11월 28일에 염제신(廉悌臣)의 (넷째) 따님을 공민왕의 신비(愼妃廉氏)로 책봉하였다(출처 : 고려사 세가 공민왕조).

1374년 4월 : 문하시중 염제신

   고려사 : 1374년(계축, 공민왕 23) 4월 정유에 공민왕은 문하시중 이인임을 파면하고 염제신(廉悌臣, 70세)을 또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기용하면서 품계와 겸직은 전과 똑같게 했고, 판개성겸감춘추관사를 더 보탰으며,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으로 봉하였으니 대체로 염제신을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염제신은 어머님의 병환으로 시중에서 물러났다(고려사절요 제29권 공민왕 4 갑인 23년 ; 고려사 44권-세가 44-공민왕 7-23-24-1374 ; 목은문고 16권 : 충경공염공신도비.

   고찰 : 동사강목 역시 고려사의 기록대로 ‘공민왕 23년(1374) 4월에 시중 이인임(?-1388)을 파면하고 후임으로 염제신을 문하시중으로 삼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런데, 당시 염제신에게 공민왕의 행신 김흥경(?-1374)이 청탁을 많이 했지만 염제신이 거부하자 김흥경이 원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공민왕이 “시중 염제신은 중원에서 공부하고 성품이 고결하여 다른 대신과는 비교가 안 된다. 염제신의 마음씀은 네가 알 바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니까, 김흥경이 감히 다시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한다(동사강목 제 15하)

1374년 4월 : 밀직부사 염흥방 동지공거

   고려사 : 공민왕 23년 4월에 정당문학 이무방 지공거와 밀직부사 염흥방 동지공거가 진사를 뽑았고, 공민왕의 친시에서 김자취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
   고찰 : 정3품의 밀직부사 염흥방(密直副使 廉興邦)으로서는 장원급제 16년만이던 공민왕 23년(1374)에 동지공거가 된 것이었다. 이에 있어서 염문의 과거 시험관으로서 제1호는 고려의 덕종 초년, 즉 2005년을 기준으로 1천 년 전에 가깝던 서기 1032년에 우습유 염현(廉顯, 고려사 74권)이었고, 제2호는 의종 12년(1160)에 국자쇄주 염직량(廉直凉, 고려사 74권-십보시)이었다. 그리고 제3호는 명종 3년(1173)에 장작감 염신약(廉信若, 1118-1192, 고려사 74권), 제4호 역시 명종 7년(1177)에 판대부사 염신약(廉信若)이었다(고려사 73권). 그 후 삼형제 급제자들도 꾸준하게 지공거, 시관 및 동지공거로서 인재 발굴에 기여하게 된다.

1376년 : 예문관대제학 염국보의 왜구 침략 저지

   고려사 : 1376년에 염국보는 왜구 침략을 저지하였다. “병진년(1376년/우왕 2)에 일본의 장수 삼도가 큰 배 수십 척을 몰고 들어 와 해변의 군현들을 침략하자 주민들이 도망가고, 온나라가 경계를 엄중히 하게 되었다. 그러자 예문관대제학 염국보(藝文館大提學 廉國寶)는 한림 정몽주(翰林 鄭夢周)와 더불어 왕명을 받들고 패가대에 들어가 의리를 지적하여 설명하고, 왜구들의 침범을 문책하니, 왜장 삼도(三島)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렸다. 그리하여 삼도는 포로가 된 고려인들을 모조리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마침내 자기 부하들에게 명하여 우리나라 군현들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로는 연해의 주군이 모두 예전처럼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러자 우왕이 염국보와 정몽주를 매우 예우하여 존중하면서 “나에게 두 신하가 있으니, 우리나라에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려사 발췌요약/麗史抄略 : 1986년판 문헌록 587-588쪽).

   고찰 : 왜구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지속적으로 침략해 왔다. 즉, 공민왕부터 공양왕까지 41년 동안 왜구의 침략이 총 506회, 1년 평균 약 12회 이상이었다. 우왕 때에 왜구침입이 제일 극심했는데, 그 중 1377년(우왕 3)에는 월평균 4회 이상인 총 52회를 침략해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청년사, 1997). 그리고 여사초략 처럼, 정2품의 예문관대제학 염국보(廉國寶)는 한림 정몽주와 함께 왕명을 받들어 패가대에 들어가서 의리(사람으로서 당연히 행하여야 할 정당한 도리)를 통렬하게 개진하여 마침내 도주(島主)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의 명(銘)이나 기(記)에 적혀 있다(문헌록 177-179쪽 : 곡성염씨세고서, 1848년 전전악정 이휘영 근서).

1375-76년 : 염씨 삼형제의 유배

   염씨 삼형제들은 1374년에 공민왕이 갑작스러운 살해 이후 32대 우왕의 등극에 기여함으로써 권력의 정상에 오른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의 탄핵사건에 다른 연루자들과 더불어 삼형제 모두가 유배를 당한 일이 있었다. 즉, 염국보(廉國寶)는 안렴사(按廉使)로 파견된 지방에서 그 지방의 폐단을 다스림으로써 개혁에 참여했는데, 두 분 아우님(흥방 및 정수)과 함께 이인임의 비위를 거슬려서 전녹생(田祿生, 1318-1375, 담양전씨), 박상충(朴尙衷, 1332-1375, 반남박씨) 등이 귀양을 갔다. 귀양지는 염국보가 순창, 염흥방은 천령현(여주), 염정수는 북청이었다(홈 : 막내 청강공 염정수).

  안렴사(按廉使) : 고려시대 지방관직의 하나. 1276년(충렬왕 2) 관제개혁을 할 때 안찰사(按察使)를 고친 것으로, 중간에 제찰사(提察使)로 되었다가 다시 안렴사로 되었다. 관직순위가 낮고 일이 많다는 의견에 따라 1389년(창왕 1) 양부대신(兩府大臣)으로 임명되는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고쳤다(엠파스 백과사전 검색).

[목은시고 제5권] : 차운염낭중시권 국보(次韻廉郎中詩券 國寶)

  문헌록 국파시고(919-920쪽)의 “차국파시권운(次菊坡詩券韻)”이라는 시의 출처는 [목은시고 제5권]이었다. 그리고 시의 원래 제목은 “차운염낭중시권 국보(次韻廉郎中詩券 國寶)”라고 밝혀졌다. 염낭중시권에서 염국보(廉國寶)는 ‘낭중(郎中)’ 벼슬에 있었다는 것과 그의 시들을 엮어 낸 시권(詩卷), 즉 시집(詩集)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고려시대에 낭중(郎中)은 정5품인데, 이는 오늘날의 서기관, 군수 또는 소령에 해당된다(고려시대의 품계와 관직 해설). 그러나 염낭중시권은 오늘날 전해오지 않는다. 목은 이색의 작품 ‘차운염낭중시권’ 2수는 [국파시고] 에서 언급될 것이다.

1380년 5월 : 서성군 염흥방 지공거

  고려사 73권 : 서성군 염흥방 지공거와 밀직사 박형 동지공거가 이문화 등 33명을 진사로 선발했고, 명경에서 6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9 ; 홈-고려의 과거시험

  고찰 : 염흥방은 1374년에 동지공거를 역임한지 6년만이던 1380년에 서성군 염흥방 지공거(瑞城君 廉興邦 知貢擧)로서 39명의 인재 선발에 공헌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목은 이색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목은시고 29권 : 문헌록 949-950쪽

  제목 : 경신과 좌주 염동정(庚申科 座主 廉東亭)

   장원 급제하여 좌주가 된 것으로는 나(이색)와 동정(염흥방)이 대충 같다오
    세 번이나 문생을 배출했지만 머리가 아직도 검고
    한 번 전시(殿試)에 참여하였으나 얼굴은 길이 붉구나
    내 병이 지난 날과 같음을 무어 혐의하랴
    사문(斯文)이 고풍을 회복하니 가장 즐겁네
    어진 문생 그득하고 풍악 소리 웅장하니
    당(堂)에 가득한 빈객들 매우 화락하네.

1382년 3월 : 부친 염제신 별세, 시호 충경(忠敬)

   삼형제의 부친 염제신(廉悌臣)이 1382년 3월 18일에 별세하였고, 유언대로 3일만인 3월 20일에 임강현 대곡 언덕(장단군 강남면 대곡리)에 장사를 지냈다. 우왕은 중신들과 논의하여 시호를 충경(忠敬)으로 내렸다(고려사 세가 38권, 89권-열전 2권, 111권-열전 24 염제신 ; 목은문고 제15권 및 동문선 제119권 :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 병서). 이처럼, 염제신의 별세와 관련된 여러 편의 시들 중에도 특별히 목은 이색이 왕명으로 작성한 충경공염공신도비의 글을 비석에 글씨를 새겨서 남겨준 유항 한수(柳巷 韓脩, 1333-1384)의 시를 고찰에 덧붙인다. 

곡성부원군 염충경공 만사(曲城府院君 廉忠敬公 挽詞) 005_272c
  출처 : 유항선생시집(柳巷先生詩集)   문헌록 889-890쪽 : 부 곡염시중(附 哭廉侍中)

    세가지 달존 겸한 건 해동에 으뜸이오(兼達尊三冠海東)
    맑고 밝은 기질은 세상에 짝할 사람이 없다오(淸明氣質世無同)
    두 조정의 예악은 모두 극치를 이루었고(兩朝禮樂皆硏極)
    한 시대의 공명은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네(一代功名孰比豊)

    팔십 다 된 나이에도 항상 경계하였고(年近八旬猶儆戒)
    자식들 경사 넘쳐 모두가 영웅이라오(慶流諸于摠英雄)
    그대는 오늘날에 아무 여한 없으려니(知公此日無遺恨)
    시종이 훌륭했던 분양이 뭐그리 부러우랴(何翅汾陽有始終)

삼달존(三達尊) : 연치(年齒), 덕망(德望)과 작위(爵位)가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
곽분양(郭汾陽) : 안록산의 난 등을 평정한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1383년 4월 : 성균시 시관 지신사 염정수

  고려사 : 1383년 4월에 지신사 염정수는 우홍명(禹洪命) 등 99명을, 명경 6명을 선발하였다(고려사 74권-지 28-선거 2-과목 2-국자시지액-020 ; 홈-고려의 과거시험).
  고찰 : 지신사 염정수(知申事 廉廷秀)는 우왕 9년(1383년)에 성균시 시관(成均試 試官) 으로 우홍명(禹洪命)을 장원으로 105명이라는 많은 인재들을 선발하였다. 이는 과거급제 이후 12년만에 시관이었고, 또한 둘째 형님(興邦) 1374년에 동지공거와 1380년에 지공거의 뒤를 이은 것이다. 이처럼, 문생 염정수의 시관 중책 수행에 대해서 스승 이색이 축하의 뜻으로 지은 노래가 [목은시고 제26권]에 “문생장시도가(門生掌試圖歌)”라는 것이다(문헌록 211-214쪽 ; 홈 : 막내 청강공 염정수).

1385년 4월 : 서성군 염국보 지공거

   고려사 : 우왕 11년 4월 서성군 염국보 지공거(종3품)와 정당문학 정몽주는 동지공거(정4품)가 우홍명 등 33명에게 급제를 내렸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9).
  고찰 : 서성군 염국보(瑞城君 廉國寶)는 우왕 11년(1385) 을축방(乙丑榜)에 지공거(知貢擧, 주시험관)가 되었다(대동보 1권 6-8쪽). 그리고 1385년 을축방 급제자 중 우홍명, 문중용, 변계량 등과 같은 인재들을 얻었다고 모두 일컬었다고 하였다(문헌록 503-505쪽). 이는 염국보가 공민왕 4년(1355)에 과거급제 30년 후 지공거가 된 것은 대동보의 손록에서 30년 동안의 행적이 공백상태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염국보와 함께 과거급제자인 우현보(禹玄寶)의 아들 우홍명(禹洪命)이 1385년에 염국보 지공거때 장원급제인데), 1383년에 염정수 시관때에도 장원급제라는 것이다(고려사 74권).

   우홍명(禹洪命, ?∼1392/태조 1) : 고려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아버지는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장원급제, 공양왕 때 이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아버지 현보와 형제인 홍부(洪富)·홍득(洪得) 등과 함께 이초(彛初)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 획책하다가 전라도에 귀양, 유배지에서 장살당하였다(한국의 역대인물. 단양우씨)

1385년 4월 : 염국보의 학사연과 우왕

  고려사 : 을축 11년(1385) 4월  우홍명 등을 급제로 과거에서 시취하였다. 우왕이 염국보의 집에 행차하였다가 다음 날에 염국보가 학사잔치를 베풀자 우왕이 또 행차하였다. 우왕이 정몽주의 집에도 행차하였다(고려사 135권 열전 48권 신우 3)
  고려사절요 : 1385년 4월 과거에 노씨의 아우 노귀산과 환관 이광, 종자 문윤경 등도 응시하였다. 전례에, 시험장마다 심사하여 합격자를 발표하였는데, 초장에 합격지 못한 자는 중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종장에서도 그렇게 하였다. 노귀산은 어리고 미련하여 글자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중장에게 쫓겨났다. 우가 크게 노하여 과거시험을 끝내려 하니, 시관 염국보(廉國寶)와 정몽주 등이 그를 급히 뽑았다. 문윤경은 초장에서 그 친구의 책문을 훔쳐 썼기 때문에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쫓아내었는데, 염국보가 안 된다 하며 이를 아울러 뽑았다. 최영이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전달에 감시학사 윤취는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뽑았기 때문에, 큰 우박이 와서 내 삼[麻]을 다 망가뜨렸는데, 이번에 동당학사는 다시 무슨 천변을 가져오려는가."라고 말 하였다(고려사절요 제32권 신우 3  을축 신우 11년/1385년 ; 고려사 117권- 열전 30-정몽주). 바로 이같은 과거시험 의 후유증에 관한 것이 [한국의 역대인물 : 서원염씨 염국보]에 인용된 것이었다.

1385년 4월 : 지밀직 홍징 동북면부원수

  고려사 : 찬성사 심덕부로 동북면상원수를 삼고, 지밀직 홍징(知密直 洪徵)으로 부원수(副元帥)를 삼았으며, 판덕창부사 김립견으로 교주도부원수를 삼았다(고려사 135권-열전 48-신우 3-11-04-1385).
  고찰 : 염제신(廉悌臣)의 맏사위 지밀직 홍징(洪徵)은 1385년에 동북면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홍징(?∼1388/우왕 14)은 고려 말기 문신으로서, 1377년(우왕 3) 서해안 각지에 침입한 왜구와 싸우던 원수 양백익의 원군 요청에 따라서 밀직부사로서 이성계 · 임견미 · 변안렬 등과 함께 조전원수로 출전하였으며, 뒤에 당산군(唐山君)에 봉해졌다. 84년 북변 동북면에 정몽주 등과 함께 파견되었으며, 이듬해 동북면부원수가 되어 홍원 등지에서 왜구와 싸웠다(야후 지식검색)

1386년 5월 : 삼사좌사 염흥방 동지공거

  고려사 : 우왕 12년(1385) 5월에 한산부원군 이색 지공거와 삼사좌사 염흥방 동지공거가 맹사성 등 33인을 급제시켰다(고려사 73권-지 27-선거 1-과목 1-049).
  고찰 : 삼사좌사 염흥방(三司左使 廉興邦)은 1374년 동지공거와 1380년 지공거를 지낸 후 세 번 째로 1385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조선 세종조에 명재상 맹사성 등 33명을 뽑았다. 즉, 염흥방과 이색(李穡) 두 사람이 함께 훌륭한 인재들을 선발한 좌주였던 것이다.

1386년 : 명나라 사신 염국보

  우왕 12(1386)년 병인 명나라(明, 1368-1644)에 파견된 사신 염국보(使臣 廉國寶)는 부사 정몽주(副使 鄭夢周), 서장관 한상질(書狀官 韓尙質)과 더불어 가셔서 아뢰고 대답하신 말씀이 자상하고 분명하여 해마다 명에 바친 공물과 5년 동안 바치지 못한 공물 등을 탕감하였으며, 명에 먼저 가 있다가 유배 당한 사신 홍상재, 이자용, 김보생 등을 유배에서 벗어나게 하시었다(1986년판 대동보 1권 손록 6-8쪽 ; 1857년판 정사보 서문, 글 곡성백 15세손 염종걸).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使臣)은 판서(判書)급 이상의 정사(正使), 참판(參判)급 이상의 부사(副使), 및 정4품~6품의 기록관(記錄官), 이들 3인으로 구성되는데 기록관이 바로 서장관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고려사 열전 30-정몽주]를 보면, 염국보의 성함이 없이 주인공 정몽주 중심으로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신 염국보를 수행했던 부사가 정몽주였다는 것이다.

한상질(韓尙質, ?~1400)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자는 중질(仲質), 호는 죽소(竹所). 본관은 청주(淸州). 밀직부사를 지낸 한공의(韓公義)의 손자, 판후덕부사를 역임한 한수(韓脩)의 아들이다. 한상질(韓尙質)의 손자가 조선 세조 때 공신 한명회(韓明澮)다. 한상질은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 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양왕 때 형조판서·우상시·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고 90년(공양왕 2) 천추사(天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서북면 도관찰출척사 겸 병마절제사를 지냈다. 92년(태조 1)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로서 주문사(奏聞使)를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국호를 조선으로 결정받고 이듬해 돌아왔다. 93년 양광도관찰출척사가 되고 97년 경상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예문춘추관대학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열(文裂)이다(참고: 엠파스 백과사전).

고려사 : 32대 우왕 제위기간(1374-88)의 몇 해전부터 고려와 명(明), 양국 사이에 분쟁이 많았기 때문에 명 태조가 성이 나서 장차 우리나라에 출병하려 할 뿐만 아니라 매년 명에 바치는 토산물(공물)을 증액시켰으며, 5년 간에 걸쳐 토산물을 약속대로 보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 사신 홍상재, 김보생, 이자용 등을 볼기를 치고 먼 곳에 유배한 사실까지 있었다. 즉, 명은 고려로 하여금 매년 좋은 말 5백필, 금 5백근, 은 5만량에다가 세포(細布)는 은의 두 배를 똑같이 바치도록 강요했다. 이 때에 와서는 명태조의 생일을 축하해야 될 형편이였는데, 사람마다 가기를 꺼려 회피하므로 마침내 밀직부사 진평중을 보내기로 토의, 결정되었다. 진평중은 노비 수십 명을 임견미에게 뇌물로 주고 드디여 병을 칭탁하니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우왕이 정몽주를 불러 직접 말하기를 “근래에 우리나라가 명나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은 모두가 대신들이 잘못한 탓이다. 그대는 고금 역사에 정통하고 또 나의 뜻을 잘 알고 있는바 지금 진평중이 병으로 하여 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대를 대행시키려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떤가 ?”라고 했다. 이에 정몽주가 대답하기를 “임금의 명령이라면 물불도 피하지 않겠는데 하물며 명나라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명태조 생일날에 당도하여 축하문을 올리었다(북역 고려사 117권 열전 30 정몽주).

1387년 : 염국보와 염정수의 관복개혁 공헌

  염국보(廉國寶)는 처음으로 명나라의 관복을 입고 그동안 입어 왔던 원나라의 호복을 입지 않도록 건의 하시었다(대동보 1권 6-8쪽).
  고려사 : 염국보는 명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중국의 관복을 살피고 있었고, 귀국후에 호복을 입지 말도록 하고, 명의 관복제도를 따르도록 건의했다. 즉, 사신으로 다녀 온 이듬 해였던 1387년 염국보(廉國寶)는 아우 청강 염정수, 포은 정몽주(1337-1396), 호정 하륜( 1347-1416), 이숭인(1349-1392), 강회백(1357-1402)과 함께 고려에서 명관복(明官服)을 문무관복으로 입되, 원나라 호복(湖服)을 입지 않도록 건의한대로 고쳐 결정하였다. 이를테면, 1품부터 9품까지 모두 명관복대로 모두 다 사모(沙帽)를 쓰고 단령(團領)을 입으며, 그 품대(品帶)에만 차등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백관이 모두 그 관복을 입고,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자, 명 사신 서질(徐質)이 “뜻밖에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본받았구려”라고 말했다. 고려의 의관제도는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려사 117권-열전 30-정몽주 ; 국파공사적, 서국파염선생관복주청녹후 : 문헌록 205, 206-209).

염국보(廉國寶)와 삼년복제

   문헌록 :당시 나라 풍속이 점점 문란해지고 예제(禮制)가 크게 무너지고 부모의 초상을 당하여도 복(服)을 1백일 밖에 입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대로 국록을 타먹는 집안이나 사대부 집안이라도 단상(短喪)제도를 따르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인륜이 거의 두절되었는데도 태연하게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자 염국보(廉國寶), 정몽주, 이숭인이 함께 소(疏)를 올려 삼년상(三年喪)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위로 고관에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삼년상을 치름으로써 그 나쁜 풍속이 마침내 개혁되었다(1986년판 문헌록 587-588쪽, 여사초략/麗史抄略).

   고찰 : 고려는 원(元)의 80여년간 지배시절에 호복(胡服)을 문무관복으로 입어 왔다. 이런 오랑캐 풍속을 고쳐서 우리나라의 관대와 의복에 있어서 한족(漢族) 국가인 명(明)나라의 관복제도를 따르도록 만든 역사적 사실과 고인의 제사에 있어서 성리학적 유교사상에 기초를 둔 삼년복제를 정착시킨 분이 바로 국파 염국보의 공로였다. 염국보(廉國寶)는 단상제도(短喪制度)를 없애고, 명나라의 삼년복제(三年服制)와 도포를 입고 관을 쓰게 만들었으며, 이로 부터 동방문물이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한다(국파염선생사적후서 ; 국파염선생관복주청녹후 : 문헌록 205, 206-209 ; 177-179쪽 곡성염씨세고서). 이같은 염국보의 업적에 대한 축문은 ‘오랑캐 풍속 상제를 바꾸었고, 의복은 중화제도를 따랐네. 시관이 되어 명예를 날렸고, 중국에 바치는 공물을 삭감하였네’(문헌록 881쪽. 용강사정향축문).


참고 : 고려후기의 복식사 연구 자료 발견 중앙일보 기사

▶ 게 재 일 : 2000년 09월 22일 22面(10版)
▶ 글 쓴 이 : 박소영 기자

    
경남 청도서 고려말 채색벽화 발견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서 고려시대
채색벽화가 발견됐다.
이 묘의 주인공은
고려말 예부시랑(정4품)을 지낸 송은(松隱) 박익(朴翊.1332~1398)으로 벽화에 그려진 인물과 말.도구 등은 고려말의 생활풍속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무덤 중
벽화가 발견된 곳은 1970년대에 발굴된 거창 둔마리 고분과 지난 91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기도 파주 서곡리 민통선 안쪽 석실무덤 등이 있다.
이번에 발견된
채색벽화는 석실 4개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벽화내용을 먼저 소묘한 다음 석회가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서쪽 면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행차하는 여인 3명이 그려져 있고, 동쪽면에는 남성 1명과 여성 3명의 인물 행렬도가 남아 있어
고려후기 풍속 및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고분
벽화는 최근 태풍 사오마이가 지나간 다음 봉분이 내려앉은 것을 밀양朴씨 문중이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참고 : 고려후기의 복식사 연구 자료 발견 조선일보 기사

  고려 고분벽화  조선일보 : [이규태 코너] 2000. 9. 23일. 24796호 40판 7면

고려 말의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이색(李穡)등 십은(十隱)으로 우러름을 받았던 송은(松隱)박익(朴翊)의 고분에서 마치 사실화 같은 벽화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다. 여태까지 발견된 고분벽화 가운데 선이나 색조가 가장 선명하여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복식이나 풍속, 그리고 당대의 문화변천을 아는 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분의 동벽서벽에 여섯 여인과 두 남자가 장례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가는 그림인데 여기 여인들이 입고 있는 엉덩이까지 덮는 장삼(長衫)이 똑같음을 볼 수 있다.

주의를 끄는 것은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여인들의 장삼은 좌우 옷깃이 복판에 와 마주치는데 이번 벽화의 장삼은 왼쪽 자락이 가슴과 배를 덮어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맺고 있다는 점이다. 저고리 자락의 왼쪽이 위냐 오른쪽이 위냐는 문화의 변천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다. 고구려 벽화들에 나오는 인물 41명 가운데 왼자락 위가 25명이요, 오른자락 위가 16명으로 상대적으로 왼자락 위가 많다. 한데 집안 등 고구려 전기의 고분 벽화에는 북방민족의 영향으로 왼자락 위가 많은데 장수왕의 평양 천도 후의 평양 인근 고분들에서는 한나라 영향으로 오른자락 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평양 천도 후의 고구려에서는 북방 오랑캐(胡族) 복식을 탈피 문명국이던 중국의 오른자락 위의 복식을 본떠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 말의 복식도 오른자락 위이어야 했을 텐데 이번에 발견된 벽화에서는 한결같이 왼자락 위로 되어 있다. 그동안에 어떤 문화적 변수가 작용했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다. 그 변수로 고려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한동안 지배했던 몽골(元)의 민족 복식이 북방 민족의 그것인 왼자락 위라는 사실이다.

이 벽화 발견으로 논란이 될 소지를 제공한것이 이전의 복식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남자의 두루마기와 모자다. 머리를 꿸 구멍만 내서 입는 원시 복식인 관두의에 소매만 단 둥근깃(團領) 두루마기를 입고 몽골인들의 카우보이 모자 같은 좁은 테에 화분을 뒤집어놓은 듯한 발립을 쓰고 있다. 이 차림새야말로 몽골 냄새가 물씬한 것으로 미루어 복식문화에 몽골 영향이 의외로 컸음을 입증해주는 벽화이기도 한 것이다.

 


1388년 1월 무진참화 : 국보, 흥방, 정수

  상기와 같이, 충경공 염제신의 1382년 별세 이후에도 세 분 아드님들은 지공거, 동지공거 또는 시관으로서 인재선발의 중책을 수행함은 물론 염국보는 관복개혁과 삼년복제 시행에 앞장 서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뜨면 또 지듯이, 문중의 융성기는 고려의 쇠퇴기와 맞물려 있었다. 1388년 정월에 당시 문하시중 최영과 신군부세력 이성계와의 일시적인 연합세력에게 정적으로 떠오른 이인임 일파(임견미, 염흥방, 반복해, 이성림, 도길부)의 숙청과 더불어 고려의 운명이 저물고 있었다.

   염국보의 유언 : 염국보는 고려의 운명이 나날이 쇠망함을 예상하고 가족들에게 유언하였다.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멸문위기에 놓여 있으니 각자는 명심하여 가문을 계승하도록 하라. 공민왕이 하사하신 충경공의 초상화는 내가 어느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부탁할 것이니 안심하라”(문헌록, 1986).

   고려사 : 1388년 1월 조반 옥사 사건 이후에 임치, 왕복해, 이성림, 염흥방, 염흥방의 아우 대사헌 염정수, 임견미의 사위 지밀직 김영진 등을 순군옥에 가두었고, 각 도로 찰방을 파송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이 강탈한 전민을 조사하여 그 주인에게 반환해 주었다. 드디어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흥방, 도길부, 염정수, 김영진, 임치를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염흥방의 형 서성군 염국보와 염국보의 아들 동지밀직 염치중(廉致中), 그의 사위 지부 안조동, 염흥방의 사위 성균제주 윤전, 호군 최지, 왕복해의 매부 대호군 김함, 그 일족인 전법판서 김을정, 장령 김조, 임제미의 아들 임맹양, 도길부의 일족인 전 강릉부사 도희경, 도간, 도운달 및 사형자의 족당인 전 지밀직 전빈, 밀직부사 안사조, 밀직제학 박중용, 신정, 사복정, 감성단, 환자 조원길 등 50여명을 죽이고, 임견미 등의 재산을 몰수하였다(고려사 126권-열전 39-임견미 ; 고려사절요 제33권 > 신우 4 무진 신우 14년 1388년).

국파공사적(菊坡公事蹟)

   공의 휘는 국보, 자는 민망, 호는 국파인데, 충경공의 맏아들이다. 일찍이 문경공 안보 선생에게서 학업을 닦았고, 이보림, 이인, 우현보, 정습인, 이원령 등과 함께 당시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인기가 높아서 온세상이 그를 칭도하였다. 목은 (이색) 선생과 종유하면서 도의를 절차탁마하여 덕기가 성취되었다. 목은 선생이 공에게 준 시에, “내가 왜 벼슬하기를 싫어하느냐 하면, 나날이 그대 만나기 어려워서라네”라고 하였으니, 목은 선생이 공을 매우 친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염국보는 공민왕 4년(1355년) 안을기 과방 을과에 급제하고, 뒤에 추충보절협찬공신으로 삼중대광이 되고,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예문관대제학 우정승에 이르렀다. 1385년 4월에 염국보는 지공거가 되어서 동지공거인 포은 정몽주와 함께 우홍명, 문중용, 변계량 등 33인을 시취하자, 당시에 인재를 얻었다고 모두 일컬었다.

  당시 고려가 중국과 불화한 일이 많아서 명나라 황제가 진노하여 군대를 인솔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세공을 가중시켰는바, 좋은 말 5천필, 금 5백근, 은 5만냥에 세포의 필수는 은의 2배와 똑같이 바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공물을 5년 동안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나라에 들어간 우리나라 사신 홍상재, 김보생, 이자용을 먼 벽지에 귀양보냈다.

  그후 홍무(홍무, 명태조의 연호, 1368-1398)의 연호 19년에 염국보공이 상사가 되어 부사인 정몽주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자세하고 명확하게 모든 사유를 아뢰고 이어서 세공을 경감해 줄 것을 주청하여, 미납한 5년 동안의 공물과 상수에 가중된 세공을 모두 면제받고, 먼 벽지에 귀양간 사신들도 사면을 받아 함께 귀국하였다.

  염국보는 또 그 때 중국의 관복을 살펴 보고 와서는 원나라식의 호복을 혁파하고 명나라의 제도를 따르르 것을 건의하여, 그 이듬 해에 아우인 청강공 정수, 포은 정몽주, 호정 하륜, 강회백, 이숭인 등과 함께 문무관의 관복을 명나라의 제도대로 고쳐 정하였는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다 사모를 쓰고 단령을 입고, 그 품대에만 각기 차등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백관이 그 관복을 입고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자, 명나라 사신 서질이 탄식하기를, “뜻밖에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를 본받았구려” 하였다. 우리나라의 의관의 제도는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국파공사적 : 대동보 문헌록, 1986. 503-505쪽).

국파선생사적후서(菊坡先生事蹟後書)

   옛날 홍무(洪武, 명나라 태조의 연호) 년간에 국파선생(菊坡先生)이 있어,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면서 작위는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고, 훌륭한 명성이 백세에 전하여 명예는 보절 추충에 드러났다.
  염국보는 을축년 4월에 공거(관리등용법의 하나)를 주관하였을 때는 동지공거인 포은 정몽주와 함께 지공거가 되었다. 그리고 병인년에 세폐(歲幣, 해마다 중국 조정에 바치는 공물)를 견감시키기 위하여 명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는 명나라 고황제가 특별히 5년분의 세폐를 면제해 주었다. 우리 동방의 문물과 의관을 환히 빛나게 하였거니와, 선생의 옛날 의용과 법도는 그지없이 성대하도다.

  태산 북두와 같은 지위와 명망에 대해서는 목은 노인이 화답하여 지은 황각시(黃閣詩)에 자세히 나타나 있고, 국가의 주석(柱石)과 같은 경륜에 대해서는 둔촌(遁村 이집)이 읊은 동고시구(東皐詩句)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국가의 휴척(休戚, 기쁨과 걱정)은 자기 한 몸의 안위(安危)에 달려 있었고, 씨족들의 계승에 있어서는 세 조정의 공훈과 업적을 계승하였도다.
  양산원에서 예를 갖추어 향사하니 사림에게 추중(推重, 추앙하여 존중히 여김)을 받았고, 금관(錦館)의 장구지(杖屨地, 장구는 지팡이와 신, 전하여 훌륭한 사람이 머무르던 곳을 이름)에서는 근원을 찾고 각 파(派)를 열기(列記)하도다.

  한 시대의 곧은 절개는 마치 일월(日月, 해와 달)처럼 빛나고, 만고의 풍의(風儀, 훌륭한 풍채)는 천지 사이에 우뚝하도다. 후손들은 잔약하여도 다행히 대대로 전하는 가승(家乘)을 보존하였고, 훌륭한 사적을 흠모한 데 있어서는 명공(名公)들의 서문(序文)에 많이 나타나 있도다.
  공훈은 주소(중국 고대의 周召라는 인물)와 동등하다 할 수 있고, 훌륭한 계책은 기설(중국 고대의 기설이란 인물)과 동등하다 하겠도다.

  이러한 덕이 있고, 이러한 행적이 있으니, 의당 시권(詩卷) 끝에 발문 쓰는 것이 명예롭다 일컬을만 하고, 그 글을 외우고 그 글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손을 씼고 공손히 받들게 되도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을유년에 행이조참판 이광헌(行吏曹參判 李光憲)은 삼가 쓴다(1986년판 문헌록. 205-206쪽).

1) 서국파염선생관복주청녹후(書菊坡廉先生冠服奏請錄後)

   대체로 사업은 일정하지 않지만, 백세에 걸쳐 영원토록 후인들이 그 은택을 입게 되는 것은 공(功)이요, 천추 만세에 광휘를 남기는 것은 적(蹟)이다.
  그 공이며 적은 곧 후인에게 있어 일상 생활의 바탕이 되는 것인데도, 후인들이 그 구명할 줄 모른다면 이야말로 귀한 것을 버리고 천한 것을 취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아 ! 관대(冠帶)와 의복(衣服)에 있어 우리나라가 오랑캐의 풍속을 고쳐서 중화(中華)를 따르게 한 것이 누구의 힘인가 ?
  국파 염선생이 없었던들, 선왕의 문물을 오늘날 이 외진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저 1386년에 염 선생이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사신으로 뽑히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맨 먼저 관복을 예전대로 회복할 것을 주청하였다.

  다음은 세공을 견감할 것과 그곳에서 장류(杖流, 장형을 받고 유배됨)된 우리나라 사신들을 방환(放還)할 것을 주청하였다.   또 그의 아우인 청강공 정수(淸江公 廷秀)와 함께 조정에 건의하여 의장(儀章)과 전도(典度)를 모두 옛 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였으니, 선생의 사업은 결코 강성(江城, 문익점 봉군의 호, 지금의 경남 산청)이나 춘정(春亭, 변계량의 호)에 못지 않다 하겠다.

  이제 4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악(禮樂)이 노(魯)나라에 간직되고, 정려가 조(趙)나라를 중하게 함으로써 사직을 보호하고 역사를 빛낼 수 있게 된 것이 이와 같이 위대하고도 탁월하였다. 옛날 공자가 말하기를, "관중(管仲)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선생은 우리나라에 있어 또한 우리나라의 관중이라고 이를만하다.

  염국보 선생의 후손인 염재설씨가 그 때의 일기 및 야사와 여러 문집들 가운데서 참고가 될만한 것들을 수집하여 한 책을 만들고, 또 여러 유림들에게 서언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여 그 유적을 오래도록 전할려고 한다. 그래서  나 역시 그의 선조 추모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이렇게 한 마디 하였다(중략). 국보, 흥방과 정수의 3형제는 도첨의중찬 충정공 염승익(廉承益)의 손자요, 곡성부원군 충경공 염제신(廉悌臣)의 아들이다. 이들 모두는 재상 지위에 이르렀고, 또 한 시대에 혁혁하던 행적이 사서(史書)에 끊임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권간들의 비위에 거슬려서, 즉, 간신 이인임, 지윤 등이 사람을 사주하여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원을 섬기자는 의논을 주청하였다. 이로 인해서, 박상충이 먼저 소(疏)를 올려 이인임을 베죽일 것을 주청했다가 그들의 모함을 받아 도리어 형장에서 매맞고 유배되던 중에 박상충이 사망했다. 그 뒤에도 포은 정몽주, 동정 염흥방과 청강 염정수도 동시에 죄를 받고 조정을 떠났다. 그후 1388년 1월에 최 영이 주도한 이인임 일파 숙청계획에 연루된 무진참화로 집안까지 패망함으로써, 염씨의 후손이 마침내 부진하여 그 혁혁하던 귀족의 후손들이 그만 한미한 겨레로 전락했으니 슬프기 그지 없다.
영원군 윤행직(鈴原君 尹行直)은 삼가 쓴다(1986년판 문헌록 206-208쪽).

2) 서국파염선생관복주청녹후(書菊坡廉先生冠服奏請錄後)

   내가 일찍이 홍무 원년 2월의 조서(詔書, 임금이 내린 명령)에서, “의관을 중국의 제도로 회복하라”고 한 것을 보고는 심신이 매우 상쾌하여 마치 기나 긴 밤 어두운 길거리에서 갑자기 중천에 태양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에 우리나라에서도 사신을 보내어 의관제도를 혁신할 것과 (명나라에서) 세폐를 무겁게 배정한데 대한 폐단을 주청하기로 하였는 바, 이는 황제에게 직접 단독으로 대면하여 할 일이라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므로, 이 사명을 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국파 염국보(菊坡 廉國寶)가 포은선생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이 사명을 받들고 중국에 가서 끝내 이 모든 사항을 자상하게 주청하여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즉시 하륜(河崙)과 염정수(廉廷秀) 등 제공(諸公)과 함께 건의하여 피변(皮弁,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을 면상(冕裳)으로 개혁하였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이로부터 복구되었으니, 그 세도(世道)를 만회시키고, 종묘사직을 튼튼히 보호하는데 있어 어찌 최초적인 일대사업(一大事業)이 아니겠는가. 그후 지금까지 4백여 년 동안에 걸쳐 시운(時運)이 비색(否塞)해짐으로써 세상에 예의와 질서가 모조리 무너졌는데도, 아직은 감히 선왕의 법복이 아닌 오랑캐의 옷을 우리나라 사람에 입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선현들의 힘인 것이다.

  호남에 사는 염상정(廉相正) 씨가 이 관복주청록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것으로 인하여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이에 앞서 간신 이인임(奸臣 李仁任), 지윤(池奫) 등이 사람을 사주하여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갑자기 원나라를 섬기자는 의논을 제청하였다. 그러자 우리 선조 반남선생 박상충(朴尙衷)이 맨 먼저 소(疏)를 올려, 이인임을 베죽일 것을 주청했다가 그들의 모해(謀害)를 받아 도리어 형장(刑杖)을 받고 유배되던 도중에 돌아가셨다. 이어서 포은선생 및 염흥방(廉興邦), 염정수(廉廷秀)도 동시에 죄를 받고 조정을 떠났다. 대개 그 후로 성취(成就)한 것에 대해 일부의 사서(史書)에는 불리하게 적혀 있기도 하지만, 백세(百世) 아래까지 엄연하게 생기(生氣)가 감돌고 있다.

  국보(國寶)의 호는 국파이고, 흥방(興邦)의 호는 동정이고, 정수(廷秀)의 호는 청강인데, 모두 도첨의중찬을 지낸 염승익(廉承益)의 손자이고, 곡성부원군 충경공 염제신(廉悌臣)의 아들이다. 이 3형제는 모두 재상(宰相)의 지위에 이르렀고, 또 한 시대에 혁혁했던 훈업(勳業)이 사서(史書)에 끊임없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도 어쩌다가 권간(權奸)의 비위에 거슬리어 집안까지 패망함으로써 염씨의 후손이 마침내 부진하여 그 혁혁하던 귀족(貴族)의 후손들이 그만 한미한 겨레로 전락하여 보첩을 만들려고 해도 사적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슬프기 그지없다.

  나에게 찾아 온 염상정은 국파의 먼 후손으로, 동정과 청강은 염상정의 먼 할아버지가 된신다. 최근에 포은선생의 문집을 보고 나서 비로소  홍무 년간에 국파공이 중국에 사신 갔던 사유를 알아내고서는, 나에게 말 한 마디를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 선조 박상충께서 염씨 형제들과는 출처(出處 : 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물러나는 일)와 영고(榮枯 : 현달함과 침체함)에 있어서 서로 관련된 것이 많으니, 이런 정의는 자손들이 대대로 강론하여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한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박종정(朴宗正)은 삼가쓰다(1986년판문헌록 209-211쪽).

염국보 : 구연사 봉안축문(龜淵祠 奉安祝文)

       국파(菊坡)가 조상을 잘 계승하여
       가문의 명성을 더욱 천양했도다.
       이미 대신(大臣) 지위에 올랐고
       일찍이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도다.

       포은(鄭夢周) 목은(李穡)은 친구로 사귀었고
       동정(東亭)과 청강(淸江)은 아우였도다.
       명나라 황제가 즉위하자 세폐 받들고
       사신(使臣)으로 가서 미납된 공물 모두 면제받고
       의관제도를 혁신하였네.
       이것은 바로 (국파)공의 혜택이오이다.
군수 이휘재가 지었음.

국파시고(菊坡詩稿)

  [1986년판 대동보 문헌록] 제6편 선세시고(先世詩稿, 884-976쪽)중 염국보(廉國寶)의 국파시고(菊坡詩稿, 917-922쪽)는 출처가 없이 글쓴이만 밝혀 놓았다.

1. “국파 원운 부전(菊坡原韻 不傳)”

  문헌록 918쪽 : 부 차국파운(附 次菊坡韻)
  출처 [도은선생시집 제2권] : 차민망운(次民望韻)

        그 누가 시골이 궁벽하다 이르는고(誰謂村居僻)
        참으로 내 뜻엔 꼭 알맞다오(眞成適我情)
        구름 한가하니 이 몸조차 게을러지고(雲閒身覺懶)
        산이 아름다우니 눈이 한층 밝구나(山好眼增明)

        시는 읊어 본 다음에 고치고(詩藁吟餘改)
        첫사발은 식후에 기울인다오(茶甌飯後傾茶)
        이전부터 이 맛을 알았기에(從來知此味)
        다시금 공명을 떠나 버렸네(更別策功名).
        이상은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시이다.

첫째, 국파시고의 첫머리에 염국보의 원운이 전해오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菊坡原韻 不傳). 둘째, 민망 관련 시를 국파 관련 시로 바꾼 것이 눈에 띈다. 국파시고의 ‘부 국파차운(附 次菊坡韻)’은 원제목이 “차민망운(次民望韻)”이고, 지은이는 목은 이색이 아니라 도은 이숭인(李崇仁)으로 밝혀졌다. 이는 1남 국보와 3남 정수의 자(字)가 똑같은 “민망(民望)”이고, 염국보 관련 시문이 적다는 점에서 “次民望韻”을 “附 次菊坡韻”으로 배려한 듯 하다. 셋째, 청강시고의“부 야좌차청강운(附 夜坐次淸江韻)”은 원제목이 야좌차민망운(夜坐次民望韻)”이고, “부 지일용청강운(附 至日用淸江韻)”의 원제목은 “지일 용민망운 재부용별운(至日 用民望韻 再賦用別韻)”이다(도은선생시집 제2권) 이는 염정수의 자 민망을 호 청강으로 바꾼 것일 뿐이다. 넷째, 도은집(陶隱集)에는 이숭인이 “민망(民望)”을 차운한 7개의 시가 더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은 물론이고, 참고로 이숭인이 염정수의 처남임을 부언해 둔다. 다섯째, 김구용의 척약제선생학음집 하권 “민망대경(民望大卿)”에서 민망이 “염정수”라는 사실과 정도전의 삼봉집 제2권 “차민망운송박생(次民望韻送朴生)” 역시 민망 염정수의 자(字), 호는 훤정(萱庭)이라고 밝혀 놓았다. 이는 “차민망운(次民望韻)”이 청강공 관련 시로 여기게 한다.

2. “염상국파이시견증(廉相菊坡以詩見贈)

  문헌록 918-920쪽 : 증이목은시 일(贈李牧隱詩 逸)   부 사염상국파이시견증 3수(附 謝廉相菊坡以詩見贈 三首)
  출처 [목은시고 제21권] : 염상국파이시견증(廉相菊坡以詩見贈)

       용모와 동작이 중국 관리와 흡사하여(容儀大逼北庭官)
        중국 관리들과 같이 앉아있으면 구별하기 어렵다오(雜坐群胡欲辨難)
        강남쪽의 경박한 태도를 떨쳐버리고(脫落江南輕薄態)
        혼자서 붓 끝에 풍월을 불러들이네(獨呼風月入毫端)

        늙어서 미관말직으로 고생하는 이 몇 사람인고(幾人白首困微官)
        국파공의 집은 모두가 고관임을 부러워하네(歆艶公家大小難)
        정당문학에 제수될 날 머지 않으리니(進拜政堂應不遠)
        나의 축하시를 책 끝에 넣어 주게나(賀詩容我冠篇端)

        내가 지금 왜 휴직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我今何故樂休官)
        날마다 서로 만나기 쉬워서라네(只爲朝朝合坐難)
        또 수레 붙잡고 금강산을 가려 하노니(又欲扶轝楓岳去)
        눈처럼 흰 일만 봉우리 구름 끝에 비치리(萬峯如雪照雲端)

                이상은 목은 이색(李穡)의 시이다.

  목은 이색이 염국보에게 보낸 시는 없어졌다고 지적했다(贈李牧隱詩 逸). 그리고 “부 사염상국파이시견증 3수(附 謝廉相菊坡以詩見贈 三首)”의 원제목이 “염상국파이시견증(謝廉相菊坡以詩見贈)”으로 밝혀졌다(목은시고 제21권). 한편, 1수는 염국보의 용모와 동작을, 2수는 염국보의 가족이 모두 고관임을, 정당문학이 될만한 인물임을, 3수는 이색과 염국보와의 돈독한 우정을 묘사했다. 한편, 이색의 목은시고(牧隱詩藁)와 목은문고(牧隱文藁)를 살펴보면 충경공과 동정공 관련 시문들보다 분명한 것은 국파공에 관한 것이 훨씬 더 적다는 것이다.

3. 국파시권(菊坡詩券)

  문헌록 918-920쪽 : 차국파시권 일(次菊坡詩券 逸)    부 차국파시권운 2수(附 次菊坡試券韻 二首)   [목은시고 제5권] : 차운염낭중시권 국보(次韻廉郎中試券 國寶)

門戶如今孰並雄
家傳黃閣有淸風
郎君莫歎回谿翅
鵬擊三千道路通

 

事過誰知一代雄
寂寥黃卷古人風
行雲流水無窮意
獨立乾坤八面通

문호여금숙병웅
가전황각유청풍
낭군막탄회계시
붕격삼천도로통

 

사과수지일대웅
적료황권고인풍
행운유수무궁의
독립건곤팔면통

집안의 문벌을 지금 어느 누가 당하랴
대대로 전해 온 재상 자리 맑은 바람이 이네
그대는 회계의 날개 한탄하지 마소
붕새가 박차고 날면 삼천리 도로가 탁 트이리니

일 지났으니 한 시대 영웅을 그 누가 알랴
적막한 시권만이 고인의 풍도를 간직했네
떠가는 구름 흐르는 물처럼 무궁한 뜻이
천지 간에 우뚝하여 막힌 곳이 없구나.

    고찰 : 염낭중의 국파시권(菊坡詩券)이 없어졌다는데, 이는 염국보가 낭중(郎中) 때 지은 시들을 엮은 책자일 것이다. 목은시고 제5권의 ‘차운염낭중시권 국보(次韻廉郎中詩券 國寶)를 문헌록의 국파시고에서는 제목을 ‘부 차국파시권운 2수’로 바꿔 놓았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문헌록을 수정 보완할 경우, 원제목대로 살려두는 것이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여하간, 이색은 그의 시를 통해서 당대에 염문은 재상급 문벌 집안이고, 염국보는 한 동안 관직에 물러 났지만 마치 봉새처럼 앞날이 촉망되는 인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4. 이오성과 염서성(廉瑞城)

  문헌록 920-921쪽 : 출처 [목은시고 제26권]
 
제목 : 昨訪李商議設酌。以病力辭。次至邊四宰宅。會有客已過三爵。李鼇城,廉瑞城繼至。
        至晚客去。主人又邀僕等入翌廊。張燈燭。夜將半逃出。明日吟成 一首

        두 분(이오성과 염국보)의 용맹과 슬기는 나라의 간성이라(二公勇智是干城)
        모월(旄鉞) 갖고 원정 갔다 막 돌아왔네(旄鉞初回自遠征)
        당에 가득한 빈객들은 기쁨이 한량없고(賓客滿堂歡意洽)
        술 권하는 주인 낭군 안색이 맑기도 해라(郞君行酒動容淸)
        모월(旄鉞)-왕의 명을 받고 출정하는 장수가 갖는 기(旗)와 도끼
        붉은 얼굴(젊은이)은 좌석이 환한데 노랫소리 절묘하고(紅顏照座歌箏妙)
        흰머리는 갓끈에 흩날려(白髮飄纓□□□(3자 없어짐))
        너무 즐거워 한 밤중이 지난 줄도 모르고(樂甚不知過夜半)
        이 태평한 모습 그리려 해도 붓이 없어 걱정이로세(只愁無筆畵昇平)   이상의(李商議)가 베푼 술자리에 참가한 이오성(李鼇城)과 염서성(廉瑞城)이 국가의 간성임을 노래한 것인데, 출처는 [목은시고 제26권]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이오성을 알 수가 없지만, 염서성은 염국보 또는 염흥방 중 한 분일 것이다. 이는 두 분의 군호(君號)가 서성군(瑞城君)이므로 염서성을 염국보로 보았는데, 재검토할 부분인 것 같다.

5. 염정당(廉政堂)

  문헌록 921-922쪽 : 출처 [목은시고 제28권]
 
제목 : 病中末由扈駕觀獵吟成短律馳一騎奉呈李二相馬前幸與廉政堂竝轡一覽。
          如蒙分惠所餘。亦所不辭也

     남녁 들에서 사냥하는 일 규정되었으니(南郊火獵案成規)。
     무위(武威)를 드날려서 태평의 기반 보존하리라(講虎揚威保泰基)。
     용맹은 군중에 뛰어나 적을 잘 물리치고(勇冠軍中工挫敵)。
     말(馬) 위에서 성공하여 군사 지휘에 익숙하다오(功成馬上習行師)。

     철마다 사방을 시찰하니 기뻐하는 천안을 길이 받들고(時巡長奉天顏喜)。
     하루에 세 번 접견하니 나라가 어찌 위태로우랴(晝接何憂國體危)
     늙고 병들어 어가를 따라가지 못하고(白髮病餘難扈駕)。
     야채만 먹으려니 노쇠한 내 모습이 가엾구나(菜盤相對嘆吾衰)。

  고찰 : 염정당(廉政堂)을 문헌록에서는 국파시고에 소개하였는데, 출처는 [목은시고 28권]이었다. 참고할 것은 [목은시고 9권]과 [문헌록 898쪽]에서 염정당(廉政堂)은 곡성(曲城), 즉 충경공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염정당이 염국보 여부는 재검토 대상이다.

6. 염제신, 염상형제, 염동정

  출처 [목은시고 제19권] : 염제신, 염상형제(국보 정수), 염흥방
 
제목 : 醴泉府院君夫人蔡氏忌齋。廉侍中設行於水精寺。僕與廉相兄弟諸娚。親登南峯。顧瞻山勢。但以煙靄。不辨城中萬屋。小晴則眞絶境也。隨山而下神孝寺。影殿在焉。下馬步數十步。出紅門跨馬。至橋邊別諸公。與東亭特過成均謁聖。坐明倫堂東夾室。學官三員諸生二員來謁。小歇而出。至朴簽院門外。分馬而歸。

  시 平康忌旦水精廬。淸淨僧筵照碧虛。石矗聯峯似屛障。煙沈平地失閻閭。
      永陵影殿松侵戶。文廟儒宮草映除。病肺苦嫌謀飮酒。寂寥歸讀古人書。

  고찰 : 문헌록에 없었던 것으로서 출처는 [목은시고 제19권]이다. 예천부원군 권한공(醴泉府院君 權漢功)의 아내 채씨(蔡氏), 즉, 장모님의 제사에 사위이신 염제신 문하시중(廉悌臣 門下侍中)이 수정사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할머님의 제사에 참가한 염동정(흥방) 이외의 염상형제(廉相兄弟)는 염국보와 염정수라고 본다.

7. 곡성부원군 염제신, 염봉성(廉蓬城, 국보)

  출처 [목은시고 제24권] 詩

  七月初七日。主上殿下誕日也。曲城府院君爲首。諸君進手帕。穡從其後。行禮拜。飮宣賜酒。趨出。與李判開城,廉蓬城,韓淸城。同至廣濟寺池邊任中郞家賞花。開者一。未拆者二三而止。中郞云尙未也。今月望後。當盡開。於是更約後會而歸。吳六和判書設食。

           蓂陛才行禮。蓮池更荷恩。淸風動□□。小雨水生痕。(2자 미상)
         北寺苽堆案。東隣酒滿樽。碧筒如象鼻。勝事謝乾坤。
         對境欣淸淨。聯鞍訪懶殘。微酣高興發。向老此心安。
         柳影暑氣薄。荷花秋色寬。重游諒不遠。沽酒引朝冠。

  고찰 : 문헌록에 없었던 것으로서 출처는 [목은시고 24권]이다. 7월 7일에 임금님의 생신 축하 자리에서 곡성부원군 염제신이 제일 웃어른이고, 염봉성(廉蓬城)의 경우는 흥방이나 정수에게 봉성이란 지칭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염국보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충경시고는 물론 국파시고에 포함시킬 수도 있어 보인다.

8. 염동정, 염대경(廉大卿)

  문헌록 967-968쪽 : 출처 [목은시고 제28권]
 
제목  外舅花原君諸孫。爲權正郞煖房正郞。張幕設筵。妓樂甚盛。請父行押坐。於是小丈人密直公。居主人之位。權判書,閔判事及僕與焉。李商議,廉東亭,任大諫,廉大卿。亦以醴泉外孫。皆在賓位。而東亭又其座主也。故特邀。朴密直至。則兩恩門叔父姑夫內外兄弟皆在。正郞榮矣哉。入夜醉歸。明日吟成 一首。呈李密直,李商議,廉東亭,朴密直。

   무덕있는 처남은 나와 동갑인데(妻兄武德我同庚)。
   둘째 아들이 지금 벌써 이름 드날리네(仲子如今已有名)。
   사위로 맞은 소년은 부부가 다 아름답고(入贅少年居室美)。
   친목의 고상한 연회는 예절이 밝기도 하네(睦親高會節文明)。

   목옹은 병든 지 오래라 때에 따라 즐기지만(牧翁久病隨時樂)。
   좌주들 함께 모이니 절세의 영화로세(座主偕臨絶代榮)。
   저녁때 가랑비 내려 푸른 장막 적시니(微雨晩來霑翠幕)。
   다시금 시흥이 십분 맑아 지누나(更敎詩興十分淸)。

  고찰 : 문헌록의 동정시고에 있는 것인데, 출처는 [목은시고 제28권]으로 밝혀졌다. 염대경(廉大卿)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이숭인(李崇仁)의 ‘민망대경(民望大卿)’에서 민망이 곧 ‘염정수’라는 점에서 청강공일 가능성이 더 많다.

염국보의 유족과 후손들

국파 염국보(廉國寶)의 후손들은 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으로 도피해서 살고 있어서 다른 후손들보다도 족보를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704년에 최초의 염씨족보 제작과 1753년에 두 번째 족보 발간 이후 세 번째로 1802년(正祖, 임술년)에 족보를 간행하였는데, 국파공파(菊坡公派)의 후손들은 가까이 호남(湖南), 영남(領南)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이 다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1857년 정사보 서문, 출처 :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109-111쪽).

1849년판 곡성염씨세고(曲城廉氏世稿) 1986년판 문헌록 223-226쪽

   곡성염씨세고(曲城廉氏世稿) : 헌종 15년(1849) 간행한 곡성염씨 여러 사람들의 시문(詩文)을 수록한 책. 제1권은 고려때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매헌선생일고/梅軒先生逸稿>, 제2권은 염제신의 맏아들 염국보(廉國寶)의 <국파유적/菊坡遺蹟)>과 둘째 아들 염흥방의 <동정일고/東亭逸稿>로 되어 있다. 책 끝에는 16대손 염중묵의 소지(小識)가 실려있다. 제3권은 염제신의 셋째 아들 정수의 <청강일고/淸江逸稿>와 치용의 <참의공일고/參議公逸稿> 및 염제신의 9대손 병조참판 염말경의 참판공일고(參判公逸稿)가 수록되어 있다. 제4권은 부록인데, 〈귀주사기(龜州詞記)〉 〈사당상량문(祠堂上樑文)〉〈봉안문(奉安文)〉 등(문헌록 177-179쪽), 책 머리에는 이휘녕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는 이기수의 곡성세고후지(曲城世稿後識)와 금시술의 발(跋)이 있다. 4권 2책. 인본(야후백과사전)

곡성염씨세고 부소지(附小識) : 염중묵(廉重默, 17세손)은 묘연한 일개 후손으로서 궁벽한 초야에 묻혀 살다보니, 식견이 천박하여 선열들을 천양하려는 뜻으로 왕년에 귀연(龜淵)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영정을 옮겨 봉안하였으나 어찌 내가 힘을 들여서 조상에게 보답했다는 구실이 될 수 있겠는가. 그윽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묻혀진 것이 더욱 묻혀질까봐 염려하여 사방에 돌아 다니는 수고를 꺼리지 않고 명산 석실 사이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와서 [여지승람], [동문선] 등의 책을 상고한 결과, 매헌공(염제신)의 시 1수, 동정공(염흥방)의 시 4수, 청강공(염정수)의 시 1수를 찾아내고, 집에 있는 고지(古紙)속에서 또 참의공(염치용)의 글 1편과 훈정공의 글 여러 편을 찾아 냈다. 이를 나누어서 4권으로 만들고, 묘도문 만사 제문 등 남에게서 받은 여러 가지 글을 각기 첨부, 국파공(菊坡公)에게는 비록 저술은 없지만 역시 별도로 부록으로 만들고 이를 모두 합해서 [곡성세고(曲城世稿)]라고 명명하였다(문헌록 177-179쪽)

국파 염국보 : 곡성염씨세고의 서문에서 “염국보(廉國寶)는 문경공(安輔)의 고제(高弟, 우수한 제자)로서 고려 말엽 말세적인 단상의 그릇됨을 삼년상(三年喪)으로 고쳤고, 오랑캐의 비루한 풍속을 중화관복으로 바꾸었으며, 의리를 통열히 개진하여 마침내 도주(島主)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목은(이색)과 포은(정몽주)의 명(銘)과 기(記)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문헌록 177-179쪽).

1857년판 정사보(丁巳譜) 서문(序文)

   아, 팔도에 흩어져 사는 우리 염씨는 모두가 매헌(梅軒, 충경공 염제신) 할아버지의 후손인데, 국파(菊坡), 동정(東亭), 청강(淸江) 3형제에서 비로소 파가 나뉘어졌다.

  무진년(1388년)에 화를 당했을 때 다행히 태조(太祖) 이성계가 죄없는 사람들을 사실대로 밝혀주어 구원한 것으로 인하여 겨우 살아 남은 가족들 몇 사람이나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후 조선의 태종,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연달아 우리 후손들을 찾아서 등용하는 은혜를 입어 가문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는데, 문과(文科)와 음직(부모의 덕택으로 하는 벼슬) 또는 생원 진사 등이 대대로 끊이지 않아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요원한 맥을 아직까지 보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조 임금께서 승지공(承旨公)에게 유시한 글에, "너는 바로 삼한구족(三韓舊族)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종대왕께서는 현령공(縣令公)에게 "가상하다. 두문동의 후손(杜門洞 後孫)이로구나"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기 그지없다.

  비록 근세에는 크게 현달한 자손은 없지만, 오늘날 한미한 것을 한할 것이 있겠는가. 대채로 이 보첩을 앞뒤로 해서 세 차례나 하였는데, 북도에 사는 청강공파(淸江公派)는 거리가 너무 먼 때문에 보첩에서 빠진 경우가 있고, 서도에 사는 동정공파(東亭公派)도 간혹 곤궁하여 족보에 참여하지 못한 경우가 있어서 족보가 한 쪽으로 치우치게 편찬되는 흠을 면치 못하였다.....곡성백 15세손 염종걸. 파주염씨대동보 문헌록, 1986. 99-109쪽).

염국보의 관직에 대한 고증

  1657년 경 발간된 조종운의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염국보 판개성(判開城)이란 기록이 있다. 이로 보면, 국파공(염국보)은 판개성직(判開城職, 즉 開城市長)을 역임한 사실이 있었다고 하겠다(파주염씨종보 1999년 제12호 8면, 씨족원류의 내용, 글 염종환).

1) 염종환의 견해

  국파공의 관직을 보면, 결론부터 말해 충경공 염제신이 돌아가신 후 관직이 변경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짐작컨대, 부친이 돌아가시고 장자로서 삼년거상(三年居喪)을 마치시고 우왕 11년 4월에 지공거로서 인재를 뽑는 일을 주관한 일이 있었지만, 이 때의 관직도 서성군(瑞城君)으로만 표시되었을 뿐이다. 이 즈음 동생되시는 동정공(염흥방)께서 정승 반열에 있었으니 다른 관직을 받은 일 없이 2년 후 신군부의 전횡으로 문중 모두가 화를 당하게 된다. 때문에 국파공의 관직은 충경공 신도비문의 내용 그대로 고려국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高麗國 推忠輔理功臣 重大匡 瑞城君 藝文館大提學)으로 했으면 한다.

  여기서 한가지 언급하고싶은 것은 공신명이 어떠한 근거에 의해서 추충보절협찬공신(推忠保節協贊功臣)으로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족보손록 등과 축문에서 가끔 보는데, 신도비문 내용보다 더 확실한 근거는 없는 듯하다.
  또 어떠한 근거로 ‘삼중대광’으로 했는지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직도 근거를 찾지 못했다. 가끔 봉서성군(封瑞城君)하는 경우도 보는데, 봉(封)자는 빼는 게 예다(파주염씨종보, 1996년 제9호 6면, 양세조위의 관작-축문, 비석문 등의 통일을 위하여. 24세 염종환).

  충경공이 돌아가신 1382년부터 6년 후에 국파공이 돌아가신 1388년 무진 정월까지 더 이상 국파공에 대한 벼슬의 기록이 없으니 6년 동안 승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推忠輔理功臣 重大匡 瑞城君 藝文館大提學) 벼슬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추충보리공신의 이름도 역사나 문헌에는 다른 기록이 없다. 그런데 우리 문중에서 어느 때의 족보에 추충보절협찬공신이라고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는데, 두 공신 이름의 뜻도 충경공신도비문의 것이 격이 있고 근거도 확실하니 통일되어야 할 것이다.
  중대광(重大匡)은 종1품(從一品)의 품계이다(이 또한 삼중대광라고 한 곳이 있는데 근거가 없다). 서성군(瑞城君)은 1품에서 2품 벼슬의 공신에게 주어진 군호(君號)이다.

  예문관대제학에서 예문관은 나라의 제찬, 사령 등을 받았던 관청으로 장은 재신(宰臣)이 겸했다. 대제학은 정2품의 품계로 홍문관(나라 내부의 경적, 치문한/治文翰, 비고문/備顧問의 일을 담당)과 함께 문형(文衡)이라 하여 국가 최고 문병(文柄)을 잡은 곳으로 학문과 관계되는 모든 일에 관여하며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종신 동안 재임했고 전임자의 추천으로 후임자가 임명하는게 상례였다.

  국파공의 벼슬은 파주염씨대동보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직이 첨가되어 있는데, 역사에서나 문헌에 근거가 없고, 춘추관의 장인 영사(領事)와 다음의 감사(監事), 다음 직이 지사(知事)로서 정2품의 벼슬로 국파공이 받은 근거가 없고, 청강공께서는 받은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파주염씨종보, 2001년 제14호 4면, 선조분의 관계와 관직. 염종환).

2) 염수동의 견해

  보절협찬(保節協贊)과 보리(輔理)는 뜻도 다르고 격(格)도 다르다. 또 국파공의 품계를 손록에는 ‘삼중대광’인데, 충경공신도비문에는 ‘중대광’이다. 고려사 문산계(文散階)를 보면 다음과 같은 변동을 볼 수 있다. 공민왕 11년 이후부터 정1품상은 ‘벽상삼한삼중대광’, 정1품하는 ‘삼중대광’, 종1품은 ‘중대광’, 정2품은 ‘광정대부’였다. 그런데 공민왕 18년 정1품상은 ‘특진보국삼중대광’, 정1품하는 ‘특진삼중대광’, 종1품상은 ‘삼중대광’, 종1품하는 ‘중대광’, 정2품상은 ‘선록대부’, 정2품하는 ‘숭록대부’라고 했다. 공민왕 21년에도 등급의 이름을 고쳤는데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삼중대광’과 ‘중대광’은 품계가 틀리다는 점은 확실하다(파주염씨종보 1998년 제11호 4면, 유고와 사적의 보존, 글 염수동).

국파 염국보(菊坡 廉國寶)의 행적

  염국보(廉國寶, ?~1388/우왕 14)는 고려의 문신(文臣). 본관은 서원(瑞原 : 경기 파주). 자는 민망(民望), 호는 국파(菊坡), 충경공 염제신(忠敬公 廉悌臣, 1304-1382)의 맏아들로서 1388년 1월 18일(음)에 별세하였다.
  염국보의 공신호와 관작은 추충보리공신(推忠輔理功臣), 중대광(重大匡, 종1품), 서성군(瑞城君, 1-2품 공신 군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정2품)에 이르렀다.

  염국보가 젊어서 공부했던 성리학(性理學)은 익제 이제현(李齊賢, 1287-1367)-문경공 안보(安輔, 1302-1357)의 계보인데, 이는 당대의 신학문이었다. 또한 염국보는 안보의 문하생들인 이보림(이제현의 손자), 이인, 우현보(1333-1400), 정습인(초계정씨 박사공파 10세, 초계정씨홈), 이집(1314-1387, 초명 이원령) 등과 사귀었고, 이들은 다같이 이름이 높았는데, 특히 염국보는 더욱 인기가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고 따랐다는 것이다. 또한 염국보는 이색(1328-1396), 정몽주(1337-1392)와 이숭인(1349-1392) 등의 석학들과 도의를 논함은 물론 절차탁마하여 선량한 행실과 뛰어난 기국을 성취하던 무렵에 아버님 염제신께서는 좌정승, 우정승 및 수문하시중을 지낸 재상급 반열에 오른 집안이었다.

  염국보는 공민왕 4년(1355)에 안을기과방에서 한방신, 우현보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다. 2년 후인 공민왕 6년(1357)에 아우님 흥방이 장원급제를 함으로써, 염문의 3부자가 국정에 참여하였다. 1358년에 아버님 염제신(55세)은 문하시중(門下侍中), 1359년에 염흥방은 밀직사 좌대언, 1361년에 염제신은 곡성백, 1362년에 염흥방은 지신사, 1363년에 염제신은 우정승과 1364년에 영도첨의였다. 그러나 염제신은 1365년에 신돈이 득세로 6년 동안 집에 머물던 1367년에 염흥방은 밀직지신사가 되었다. 그간에 염국보는 낭중(郎中) 및 안렴사(按廉使)를 역임, 공민왕 19년(1370)일 때 쯤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종3품 상계), 전의령(典儀令, 정3품),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堤學, 정4품), 지제교(知製敎, 정4품)였으며, 맏아들 치중(致中)은 목릉직이고, 둘째 아들 치용(致庸)은 창릉직이며, 따님은 어렸다고 한다.

  공민왕 20년(1371)에 3남 염정수의 과거급제를 맞이하여 삼형제 모두의 과거급제, 즉 삼자등과댁(三子登科宅)으로써, 공민왕은 삼형제의 모친 권씨부인에게 진한국대부인으로 봉했고, 또한 이색은 염정수에 관한 훤정기(萱庭記)를 남겨 주었다. 공민왕 23년(1374)에 아버님 염제신은 문하시중에 중임되었고, 밀직부사 염흥방은 동지공거로서 33명의 인재를 선발했다. 1375-76년에는 당시 문하시중 이인임 탄핵사건에 많은 인물들과 함께 염문 삼형제도 유배 당했다. 귀양지는 염국보가 순창이고, 염흥방은 여주이며, 염정수가 북청이었다. 유배 당시 염흥방 관련 이색의 작품 침류정기(枕流亭記)와 어은기(漁隱記)가 [목은고]와 [동문선]에 전해 온다. 한편, [목은시고 제5권]의 ‘차운염낭중시권 국보’라는 이색의 시는 염국보의 귀양시절에 지은 작품 같다. 그러나 염낭중시권(廉郎中詩卷)은 전해오지 않고 있다.

  우왕 2년(1376)에 예문관대제학 염국보는 한림 정몽주와 왜구의 침략을 저지하는데 기여하였다. 우왕 6년(1380)에 서성군 염흥방 지공거는 39명을 선발하였다. 우왕 8년(1382)에 부친 염제신께서 향년 79세로 별세했고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우왕 9년(1383)에 지신사 염정수가 성균시 시관으로서 105명을 선발, 우왕 11년(1385)에 서성군 염국보 지공거와 정당문학 정몽주 동지공거가 33명을 선발, 우왕 12년(1386)에 삼사좌사 염흥방 동지공거가 맹사성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이처럼, 염문 선조들과 삼형제는 계속해서 수많은 인재등용에 공헌해 왔다.

  우왕 12년(1386) 고려와 명나라(1368-1644)가 불편할 때 사신 염국보는 부사 정몽주와 서장관 한상질과 함께 파견되어서 명 태조에게 아뢰고 대답한 말씀이 자상하고 분명하여 해마다 고려에서 명에 바친 공물과 5년 동안 바치지 못한 공물 등을 탕감 받았고, 명에서 유배 당한 사신 홍상재, 이자용, 김보생 등을 유배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우왕 13년(1387)에 염국보는 염정수, 호정 하륜, 포은 정몽주, 강회백, 이숭인 등과 함께 고려에서 원호복을 입지 않도록 건의한 결과로 백관의 복장이 명관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는 고려에 있어서 의관제도의 혁신적인 변화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염국보는 정몽주, 이숭인 등과 당시 나라 풍속이 점점 문란해지고 부모의 초상을 당해도 상복을 1백일 밖에 입지 않는 단상제도를 없애고, 삼년상을 치루는 삼년복제가 시행되도록 함으로써 나쁜 풍속을 개혁하는데 앞장을 선 바 있었다. 이같은 사실들이 ‘국파공사적’, ‘국파공사적후서’와 ‘관복주청록’에 기록되어 있다.

  우왕 14년(1388) 1월 당시 문하시중 최영과 신군부세력 이성계의 일시적인 연합세력이 때마침 발생한 조반 옥사 사건을 빌미로 그들의 정적으로 부상한 이인임 일파(임견미, 염흥방, 반복해, 이성림, 도길부)의 다섯 가문의 일족들을 참살했던 1월 18일에 염국보 역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염낭중시권]은 전해오지 않지만, 그의 인품이나 집안에 대하여 이색은 “용모와 동작이 중국 관리와 구별하기 어렵고, 국파공 집안은 모두가 고관이며, 정당문학이 될만한 인물이고, 이색이 휴직을 하면서까지도 매일 만나고싶은 친구”라는 것이 염국보의 모습이다.

아내와 처가 : 염국보의 아내는 안동군부인 권씨다. 장인의 성함은 권렴(權濂), 현복군(玄福君)이셨다(권염묘지명의 주인공). 아내의 할아버지는 권준(權準)인데 길창부원군 창화공이며 호는 송제다. 증조 할아버지는 권부(權溥)인데 시호는 문정, 호는 국제, 영가부원군이다. 아내의 외할아버지 평양 조련(趙璉)은 찬성충목공인데 구관은 상원이다. 염국보의 다섯 분의 처남과 네 분의 처제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 간락하게 소개해 놓았다.

2남 1녀 : 염국보의 2남 1녀 중 맏아들은 염치중이고, 둘째 아들은 염치용이다. 이처럼, 염국보의 두 아들에 대한 작명은 성리학의 영향인 것 같다. 그 이유는 1남은 중용의 중에 도달하라는 “치중”이고, 2남은 용에 이르라는 “치용”이기 때문이다. 따님의 남편은 안조동(安祖同, 직제학)은 문성공 안유(安裕)의 후손이다. 한편, 1남 염치중(廉致中)은 [고려사]에는 살해 된 것으로 적혀 있는데, 이같은 역사기록과는 전혀 다르게 어렵게 살아 남아서 나주에 은거했고, 후손들이 대를 잇고 있다. 2남 염치용(廉致庸)은 경기도 광주 한강가(현재 서울시 서초구 염곡동)에 24년간 은거하던 중 조선왕조의 부름을 받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 사신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인물이었다. 이에 대한 자초지종은 변계량의 [춘정집 제5권 송참의공서(送參議公序)]에 잘 나타나 있다.

  묘소(墓所)와 향사(享事) : 묘소는 영천 도선산에 있는 묘소가 실묘(實墓)로 보는 견해이나, 상석이나 비석 등이 없어 고증의 길이 없다. 영천의 묘소를 실묘로 보는 자료는 종보 제6호를 참조(영천 도선산 자료 안내☞ 누르세요.)
철종 3(1852)년 임자에 선비들의 발론으로 나주 금강서원, 보성 양산서원( 청계영당), 청도 자인 구연사, 보령 수현사, 옥천 용강사, 대덕 효평사 등에 모시고 예를 갖추어 향사하고 있다. 축문 및 기타는 [1986년판 문헌록]에 소개되어 있다.   2005년 1월 일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문학박사. 24세손 염태호(廉泰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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